전통 판소리를 감상하는 방법-이자람이 들려주는 '팁'
그의 말을 따라 가다 보니 평면적으로 커다란 덩어리처럼 들리던 오케스트라의 협연이 각 악기별 멜로디가 만드는 공간마다 색을 달리하여 들렸다. 그가 내뱉는 음악 전문 용어들이 낯설면서도 ‘아, 클래식 음악은 이런 것을 감상 포인트로 하는구나. 이걸 알고 연주를 들으면 그 구간이 기다려지기도 하고 연주자의 색다른 해석에 엄청난 기쁨을 느끼거나 반대로 실망을 느끼게도 되겠구나. 이걸 알고 듣는 클래식 애호가들은 얼마나 재미있게, 크게, 넓게 음악을 만나고 있는 걸까 부럽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전문적인 용어 사용을 많이 했으며, 그로 인해 꽤 많은 청중이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동일한 개념과 약속된 언어를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동일한 기준으로 감상하는 클래식 음악이라는 장르가 순간 부러웠다.
1년 동안 필자가 섰던 판소리 무대 - 홀로 90분 이상 행한 공연 기준 - 를 세어보니 대략 '노인과 바다'로 6회, '이방인의 노래'로 5회, '작창'과 '바탕'을 포함한 판소리 모음 공연으로 6회의 공연을 했다. '작창'은 필자가 만든 창작 판소리 작품의 주요 대목으로 구성하는 공연이며, '바탕'은 전통 판소리로 이루어진 공연이다. 그렇다면 총 17회의 공연 중 창작 판소리가 11회를 넘어가니 제목을 고민할 만도 하겠다.
먼저 말해두지만, 판소리를 감상하는 방법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어폐가 있다.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미덕은 깨끗하게 대상을 만나고 그로부터 느껴지는 나 개인의 감각을 인지하는 것이고 사실은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끗하게 대상을 만나기란 늘 쉽지 않고 낯설고 생경한 예술을 처음 대할 때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몰라 괜스레 타인의 눈치를 보았던 경험은 늘 있는지라, 필자 개인이 판소리를 감상할 때 재미를 느끼는 요소들을 하나의 팁으로 여러분께 드려보겠다.
필자 역시 귀명창이라는 존재들을 어린 시절 스승님들의 국립극장 무대나 완창 무대의 객석에서 ‘잘한다이!’하는 목소리로 만나본 적 있으나 명창분들이 명을 다해 작고 하신 후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던 귀명창들의 목소리도 듣기 어렵게 되었다.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용어로서의 그 대상이 사라진 귀명창이라는 단어는 이제, ‘소리 속을 아는 사람’ 정도로 소리 전공자 사이에서 상용되고 있다. 그마저도 이제 잘 쓰이지 않는 것이, 지금 시대에 소리를 배운 소리꾼들이 아닌 이상 판소리의 음악적 미학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수년간 판소리를 연구한 학자들이나 고음반을 사랑하는 애호가들 정도일 것이다.
판소리는 그 소리를 수양하는데 집중적인 수년이 필요한 만큼, 그 속을 알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갖는데도 집중적으로 즐기는 수년이 필요하다. 왜, 독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책이라는 것이 언어의 퇴화 - 스마트폰 사용에 따른 언어의 퇴화 문제는 2000년대의 사회 문제 중 하나이다 -에 따라 함께 읽기 쉬운 수준으로 퇴화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독자는 그를 읽어낼 수 있는 훈련을 지속해야 하는 상황인 것처럼.
그러니 현대인들에게 판소리 듣기란 쉽지 않다. 알아듣기 어려운 한자어와 고어가 많은데 심지어 반복은커녕 서사는 계속 흘러 따라가기 바쁘니 이게 쉬울 리가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꾼의 연희 능력에 따라 전통 판소리 또한 재미있는 공연이 된다. 그래서 판소리는 ‘듣는 예술’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함께하는 예술’이 되는 것이다.)
이에 하나 더하자면 높고 낮게 지르는 소리의 질감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지, 칼날처럼 날카로운지, 맑으면서도 깊이가 있는지, 명확하게 그 음을 가로지르는지, 바위처럼 크게 내려치는지 등을 여러분의 취향대로 감각하는 것, 이것이 ‘내게 맞는 성음을 찾아가는 일’이다.
또 더하자면 화려하게 짜인 시김새를 마치 새처럼, 마치 시냇물처럼, 마치 바람처럼 잘 구사하며 사설 위에 그려진 음악적 화려함을 표현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보통 추임새는 이 시김새 구간에서 터져 나온다. 마치 피겨 스케이트 선수가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키면 박수가 터져 나오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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