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었던가. 어느 좋은 날 오후에 우연히 한 영상을 보았다. 말솜씨 좋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각 구간마다 세세하게 어떠한 점을 중점적으로 감상하면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주는 영상이었다.

그의 말을 따라 가다 보니 평면적으로 커다란 덩어리처럼 들리던 오케스트라의 협연이 각 악기별 멜로디가 만드는 공간마다 색을 달리하여 들렸다. 그가 내뱉는 음악 전문 용어들이 낯설면서도 ‘아, 클래식 음악은 이런 것을 감상 포인트로 하는구나. 이걸 알고 연주를 들으면 그 구간이 기다려지기도 하고 연주자의 색다른 해석에 엄청난 기쁨을 느끼거나 반대로 실망을 느끼게도 되겠구나. 이걸 알고 듣는 클래식 애호가들은 얼마나 재미있게, 크게, 넓게 음악을 만나고 있는 걸까 부럽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전문적인 용어 사용을 많이 했으며, 그로 인해 꽤 많은 청중이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동일한 개념과 약속된 언어를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동일한 기준으로 감상하는 클래식 음악이라는 장르가 순간 부러웠다.
그 후, ‘식후엔 커피’가 마치 떼어 놓을 수 없는 순서인 것처럼, 나의 생각은 판소리 감상에 대한 사유로 넘어왔다. ‘현재 한국에서, 판소리를 이와 같이 ‘알고 듣는(보는)’ 관객이 얼마나 있을까.’
사진 제공= Private Curve / 공연 <작창 2007/2011> 실황
사진 제공= Private Curve / 공연 <작창 2007/2011> 실황
이 글의 제목을 ‘창작 판소리를 감상하는 방법’으로 해야 할지 ‘전통 판소리를 감상하는 방법’으로 해야 할지 잠시 고민을 했다.

1년 동안 필자가 섰던 판소리 무대 - 홀로 90분 이상 행한 공연 기준 - 를 세어보니 대략 '노인과 바다'로 6회, '이방인의 노래'로 5회, '작창'과 '바탕'을 포함한 판소리 모음 공연으로 6회의 공연을 했다. '작창'은 필자가 만든 창작 판소리 작품의 주요 대목으로 구성하는 공연이며, '바탕'은 전통 판소리로 이루어진 공연이다. 그렇다면 총 17회의 공연 중 창작 판소리가 11회를 넘어가니 제목을 고민할 만도 하겠다.
그러나 전통 판소리를 딛고 창작 판소리가 태어나듯, 판소리를 감상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에서도 전통 판소리의 감상법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창작 판소리에 관한 동일한 주제의 글은 조만간 이어가도록 하겠다.)

먼저 말해두지만, 판소리를 감상하는 방법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어폐가 있다.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미덕은 깨끗하게 대상을 만나고 그로부터 느껴지는 나 개인의 감각을 인지하는 것이고 사실은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끗하게 대상을 만나기란 늘 쉽지 않고 낯설고 생경한 예술을 처음 대할 때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몰라 괜스레 타인의 눈치를 보았던 경험은 늘 있는지라, 필자 개인이 판소리를 감상할 때 재미를 느끼는 요소들을 하나의 팁으로 여러분께 드려보겠다.
사진 제공= Private Curve / 공연 <작창 2007/2011> 실황
사진 제공= Private Curve / 공연 <작창 2007/2011> 실황
판소리에는 귀명창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현재는 잘 사용하지 않거나 그 의미가 변화한 이 단어는 조선 말기 판소리 향유층이 많은 시기에 판소리를 즐기는 향유층, 그중에서도 판소리에 대한 감상 경험이 많고 지식이 해박해 좋은 판소리에 추임새로 큰 반응을 하여, 판소리가 벌어진 판에서 소리꾼에게도, 좌중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을 귀명창이라 일컬었다.

필자 역시 귀명창이라는 존재들을 어린 시절 스승님들의 국립극장 무대나 완창 무대의 객석에서 ‘잘한다이!’하는 목소리로 만나본 적 있으나 명창분들이 명을 다해 작고 하신 후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던 귀명창들의 목소리도 듣기 어렵게 되었다.
현시대에 귀명창이 존재하는지, 사실 귀명창이 특정 인물인 것인지 혹은 어떠한 현상을 일컫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마도, 과거에 특정 인물이었던 귀명창들(국립극장 관계자들이 ‘아 오늘 오셨어?’라 말하던)은 이제 극장에 오시기 힘든 상황일 것이다.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용어로서의 그 대상이 사라진 귀명창이라는 단어는 이제, ‘소리 속을 아는 사람’ 정도로 소리 전공자 사이에서 상용되고 있다. 그마저도 이제 잘 쓰이지 않는 것이, 지금 시대에 소리를 배운 소리꾼들이 아닌 이상 판소리의 음악적 미학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수년간 판소리를 연구한 학자들이나 고음반을 사랑하는 애호가들 정도일 것이다.

판소리는 그 소리를 수양하는데 집중적인 수년이 필요한 만큼, 그 속을 알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갖는데도 집중적으로 즐기는 수년이 필요하다. 왜, 독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책이라는 것이 언어의 퇴화 - 스마트폰 사용에 따른 언어의 퇴화 문제는 2000년대의 사회 문제 중 하나이다 -에 따라 함께 읽기 쉬운 수준으로 퇴화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독자는 그를 읽어낼 수 있는 훈련을 지속해야 하는 상황인 것처럼.
사진제공 서울예술단 / 공연 <순신> 장면
사진제공 서울예술단 / 공연 <순신> 장면
전통적으로 판소리 사설은 서사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장단마다 짜여 있는 소리의 구조는 현대인에게 익숙한 반복, 분절,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노래 구조와는 거리가 멀다. 요즘 사랑받는 음악의 조건으로 흔히들 말하는 후크(반복적이고 단순한 멜로디와 가사로 이루어져 감상 후에도 청자의 머릿속에 재생이 가능한 구간)는 판소리에는 - 민요를 차용하여 만들어진 방아타령이나 농부가와 같은 곡을 제외하면 - 없다.

그러니 현대인들에게 판소리 듣기란 쉽지 않다. 알아듣기 어려운 한자어와 고어가 많은데 심지어 반복은커녕 서사는 계속 흘러 따라가기 바쁘니 이게 쉬울 리가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꾼의 연희 능력에 따라 전통 판소리 또한 재미있는 공연이 된다. 그래서 판소리는 ‘듣는 예술’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함께하는 예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판소리 공연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외래어를 만난 듯 이 발화 방식에 낯섦을 가장 먼저 느낀다. 그리고 그 후에는 무대 위의 서술자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기 시작하며 (어쨌거나 한국말이며, 잘 쓰인 문학이므로 앞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 후에는 소리꾼이 목에 핏대가 서가며 높이 지르는 '상청'(높은 음)에 놀라고, 인간이 저렇게나 낮은 음도 냈던가 싶을 정도의 '하청'(낮은 음)에 놀라고, 뭔진 모르겠으나 엄청나게 높은 기술인 듯한 시김새들을 생경하게 경험한다. 그러다 보면 또 고수의 장단에 눈이 간다. 쉬운 것 같은 반복적인 장단 속에서 소리꾼과 고수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다양한 리듬을 넘나든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엔, 소리꾼의 이야기 전달력, 음악적 기술의 완성도, 성음의 깊이, 소리꾼 개인의 매력, 이야기 자체의 재미가 섞여 뭉뚱그려진 감상을 안고 극장을 나선다.
자 여기까지가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판소리 공연을 경험했던 여러분의 첫 경험 혹은 지금의 경험과 유사할 것이다. (다른 것, 혹은 첨언할 것, 수정할 것이 있다면 내게 알려달라.)
사진 제공= Private Curve / 공연 <작창 2007/2011> 실황
사진 제공= Private Curve / 공연 <작창 2007/2011> 실황
앞서 말했듯이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공연에 다녀온 여러분의 모든 신체 감각이 경험한 그 뭉뚱그려진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에 한발 더 나아가 판소리를 감상하고픈 여러분께는, 내가 판소리를 즐기는 몇 가지 방식을 알려주겠다.
먼저, 사설이 쓰인 유려함을 살펴보면 조선 시대 양반들이 얼마나 웃기는 사람들이었는지 알게 되고 그를 발견할 때마다 놀랍고 재미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선 소리꾼의 발음을 잘 들어야 한다. 이 사람이 지금 정확하게 발음하고 있는지, 혹은 성음을 내느라고 목 근육을 넓게 누르거나 혀를 습관적으로 입천장에 대느라 발음이 잘 들리지 않는지 같은 것을. 이를 통해 가사를 획득하고 동시에 소리꾼의 기량을 가늠할 수 있다.

이에 하나 더하자면 높고 낮게 지르는 소리의 질감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지, 칼날처럼 날카로운지, 맑으면서도 깊이가 있는지, 명확하게 그 음을 가로지르는지, 바위처럼 크게 내려치는지 등을 여러분의 취향대로 감각하는 것, 이것이 ‘내게 맞는 성음을 찾아가는 일’이다.

또 더하자면 화려하게 짜인 시김새를 마치 새처럼, 마치 시냇물처럼, 마치 바람처럼 잘 구사하며 사설 위에 그려진 음악적 화려함을 표현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보통 추임새는 이 시김새 구간에서 터져 나온다. 마치 피겨 스케이트 선수가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키면 박수가 터져 나오듯이 말이다.
또 더한다면 이러한 사설과 높고 낮은 음들과 장단, 화려한 시김새가 서로 어떻게 만나서 시너지를 일으키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아…. 이 경지는 얼마나 재미지고 무궁무진한지 모른다. 필자도 반복 연습을 통해 30년이 넘도록 연습하면서 지속적으로 얻는 재미다. 이 안에 숨은 유머, 따뜻함, 인간에 대한 연민 등이 과거의 사랑으로부터 지금의 사랑까지 관통하여 우리의 가슴을 건드린다.
그에 또 더한다면 이제부터는 소리꾼 개인의 영역이다. 과연 소리꾼이 여러분이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도록 어떠한 태도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지, 그 태도는 어떠한 사유를 당신에게 선사하는지와 같은 것은 모든 공연예술이 그러하듯 꽤나 높은 수준의 훈련과 성찰을 통해 발현될 수 있는 영역이다.
동시대 귀명창의 탄생과 성장을 바란다. 드디어 눈에 띄는 양적 팽창을 이루고 있는 판소리 공연 수요의 증가를 목도하며, 조심스레 이 다음을 바라본다. 소리꾼과 소리 이야기로 밤을 지새울 수 있는 귀명창 지음이 늘어난다면, 소리꾼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힘이 날지, 얼마나 그간의 소외에 대한 서러움을 보상받을지 상상할 수 있어 벅찬 기분이 든다.
사진 제공= Private Curve / 공연 <작창 2007/2011> 실황
사진 제공= Private Curve / 공연 <작창 2007/2011> 실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