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마리아 칼라스가 살려낸 비극적 사랑, 루치아
어느 날 극작가 살바토레 캄마라노가 대작곡가 가에타노 도니체티에게 물었다. 신작 오페라로 어떤 소재를 원하느냐고. 도니체티는 단 한 문장의 짧은 답신을 보냈다. “사랑 이야기를, 그것도 처절한 사랑 이야기를!(Voglio amor, e amor violento!)”

도니체티의 바람대로 캄마라노는 스코틀랜드의 대문호 월터 스콧이 쓴 <람메르무어의 신부>를 소재로 골랐다. 원수 집안끼리의 사랑을 다룬 처절한 비극이었다. 람메르무어의 영주 엔리코는 점차 쇠락해가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여동생 루치아를 유력자 집안의 아들과 정략 결혼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루치아에게는 사랑을 맹세한 연인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 집안과 수대째 내려오는 철천지원수인 레벤스우드 가문의 당주 에드가르도였다.

에드가르도가 잠시 외교 업무 수행을 위해 프랑스로 떠나자 오빠 엔리코는 루치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회유 작업을 벌인다. 처음에는 말로 설득해 보지만, 이미 에드가르도와 약혼반지까지 교환한 루치아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결국 엔리코는 수하 가신들을 시켜 가짜 편지를 꾸민다. 에드가르도가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냉정한 절연의 편지를 써 보낸 것처럼 조작한 것이다.

[아르떼 칼럼] 마리아 칼라스가 살려낸 비극적 사랑, 루치아
연인의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에 당황한 루치아는 얼떨결에 정략결혼으로 내몰린다. 오빠 엔리코는 유력자의 자제인 아르투로와의 결혼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이고, 루치아는 반쯤 혼이 빠진 상태에서 결혼 서약서에 서명하고 만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에드가르도가 프랑스에서 돌아와 결혼식장에 난입한다. “이 결혼은 무효이며, 루치아와 나는 약혼한 사이”라고 외치지만, 루치아는 이미 결혼 서약을 끝낸 상태. 에드가르도가 끌려 나가고, 그제야 루치아도 깨닫는다. 오빠의 간계에 속아 연인을 배신하고, 자신은 마음에도 없는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는 사실을.

그날 밤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신부 루치아가 그만 실성해 새신랑 아르투로를 칼로 살해하고 정신을 완전히 잃은 채 피투성이가 된 드레스를 입고 저택의 로비로 터벅터벅 걸어 나온 것이다. 한참 결혼 피로연을 즐기던 하객들은 경악하고, 루치아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에드가르도와의 지난 사랑을 되새기며 피눈물을 흘린다. 저 유명한 ‘광란의 장면(mad scene)’이다. 루치아는 이 부분에서 무려 20여 분간 피를 토하는 듯한 비통한 노래를 쏟아내고는 결국 그 자리에서 혼절해 죽고 만다.

이 곡은 너무나 노래하기 어려워 한동안 성악가들의 서커스적인 스킬만 나열하는 기계적인 아리아라는 비난도 받았다. 이런 상황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 역사상 최고의 소프라노로 손꼽히는 마리아 칼라스(사진)다. 그녀가 극적인 노래와 표현력으로 객석을 울음바다로 만든 이후로 ‘루치아’에 대한 해석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원래는 카나리아처럼 가녀린 미성으로 ‘예쁘게만’ 루치아를 노래하던 소프라노들도 이제는 뜨거운 영혼이 주입된 감동적인 해석이 필요해졌다. 작곡가 도니체티가 진정으로 갈망했던, ‘처절한 사랑의 비극’은 칼라스에 의해 비로소 성취됐고, 지금도 오페라 애호가들은 역사상 최고의 소프라노 아리아로 주저 없이 이 ‘광란의 장면’을 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