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여주인공 ‘금단의 사랑’을 멈춰세운 서소문 건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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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이수의 성문 밖 첫 동네
- 서소문 건널목(땡땡거리)을 지나간 사람들
- 서소문 건널목(땡땡거리)을 지나간 사람들
택배가 없던 시절이다. 광고주에게서 받은 광고 필름은 데드라인 전에 넘겨야 윤전기가 돌아가고 신문이 나온다. 1분 1초가 아쉬운 시간, 광고 필름을 가지고 신문사로 급히 가다가 '땡땡거리'에서 차단기에 막히면 헛수고다. 서소문에서 급하게 차를 몰아도 이곳에서 차단기에 걸리면 온전히 기차에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차단기가 내려가기 전 더 속도를 내 앞차를 따라붙어야 한다. 건널목을 지키는 아저씨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을 각오를 하고 말이다. 더 힘든 것은 열차가 지나가고 차단기가 올라가기를 기다리는데 반대편에서 또 다른 열차가 오는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참으로 화가 나는 순간이다.
땡땡거리며 지나가는 기차, 그러니 아무리 바빠도 어쩔 수 없이 한 템포 쉬어 가야 하는 곳이 이 '땡땡거리'다. 이 거리 만큼 우리에게 아련한 정서를 제공해 주는 곳도 흔치 않다. 아니 마음 놓고 지나가는 기차를 볼 곳도 서울에서는 흔치 않다. 승용차와 버스, 전차가 대중화 돼 기차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타니 말이다. 최근 1967년에 개봉된 한국영화 '귀로'를 봤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신 분은 '연식'이 꽤 되신 분일 것이다. 영화를 보다가 이 '땡땡거리'가 나와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귀로'는 이만희 감독이 만든 영화로 여주인공 문정숙은 한국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하반신이 마비된 남편(김진규)과 함께 산다.
성불구가 된 남편의 유일한 낙은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것이다. 아내 문정숙은 세속적 욕망에 초탈한 여인으로 그려지지만 마음 속 불덩어리는 어쩌지 못한 모양이다. 아내는 매주 남편이 쓴 원고를 신문사에 가져다 준다. 집이 있는 인천에서 출발해 서울역에 내려 이 '땡땡거리'를 지나야 신문사가 나온다. 그 신문사가 한국경제신문사는 아니다. 그녀도 나처럼 데드라인 전에 원고를 전하려고 바삐 움직이지만 차단기에 걸려 버린다. 신문사는 시청 앞에 있다. 시청 앞 육교가 보이는 걸로 보아 1973년 폐간한 대한일보 사옥을 촬영지로 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고의 세월을 잘 견뎌온 문정숙의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린 젊고 잘생긴 남자는 신입 기자다. 젊은 기자는 문정숙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말한다. 지금이라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때는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절이었다.
영화는 지금 보아도 탄탄한 구성에 카메라 앵글도 좋다. 여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압권이다. 철커덕, 철커덕하는 기차 바퀴 소리는 문정숙의 콩닥거리는 마음의 표현이다. '땡땡거리'의 차단기는 문정숙의 질주하는 마음을 차단한다. 차단기 앞에 선 문정숙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는 배경으로 등장하는 서울역 주변의 모습이다. 땡땡거리, 서소문 고가 주변 건물들, 덕수궁 대한문이 섬처럼 고립된 모습, 시청 주변의 60년대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지역 중림동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차단기 안을 지나는 이 기차는 어디로 가는 걸까?
지금은 경의중앙선이라 하여 도라산역까지 가지만 예전에는 경의선이라 하여 신의주까지 가는 기차였다. 1906년 개통한 경의선은 용산이 시발역이다. 용산에서 수색을 지났다. 지금의 전철 6호선 라인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런데 용산역이 외곽에 있다 보니 서울에서 가는 사람들이 불편한 것이다. 사대문 안 사람들이 경의선을 타려면 경성역에서 용산역까지 가서 경의선을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성역에서 신촌, 서강을 거쳐 수색으로 가는 경의선 지선을 만들었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남대문역(경성역) 수색 간에 선로 공사, 직선화 공사를 해서 바로 용산을 거치지 않고 가도록 했다. 그때 생긴 철길이 중림동 '땡땡거리'를 지나가는 이 선로이다. 역사가 새로 생겼다. 서소문역, 아현리역, 신촌역이다.
이곳은 3·1운동과도 관계가 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을 한 시위대가 이 철길을 건너 프랑스 영사관(당시는 외교권이 없었기에 대사관이 아닌 영사관이다)으로 향했다. 왜일까?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종전 협정을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열게 된다. 그곳에서 1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식민지 처리에 대한 협의가 있었다. 불쌍한 조선의 백성들은 이 경의선 철길을 건너 일본의 폭정을 호소하고 프랑스에게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영사관으로 간 것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행렬이었다. 프랑스 영사는 시위대와 면담하고 조선의 독립 청원을 본국에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또 시위대는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 기마대와 대치하게 된다. 성난 시위대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근처 서대문역 일대에서 시위가 자주 일어나자 1919년 3월 31일 역은 폐쇄된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이 철길은 아직도 북한을 관통하지 못하고 도라산에서 멈춘다.
조선시대에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이곳에서 참수된 순교자들의 행렬이 이어졌고 100여 년 전에는 독립을 외치던 백성의 행렬들이 이 철길을 따라 지나갔다. 전쟁의 참화 후 1960년대에는 문정숙이 남편의 원고를 들고 지나갔다. 이 근처에서 직장 생활을 한 나도 숱하게 이 '땡땡거리'를 지나갔다.
차를 몰아 다시 땡땡거리며 내려오는 차단기 앞에 서 보았다. 각자의 일로 바쁜 사람들이 차단기가 올라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앞에는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노숙자 쉼터가 있다. 'Heart to God, Hand to Man'(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이 쉼터에 계신 분들도 지금까지 무척 바쁘게 살았을 것이다. 이제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시기를. 그 옆에 로또 복권 판매소가 있다. 신문사 근무 시절, 회식을 하고 돌아가다가 팀원들과 복권을 사서 한 장씩 나누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1등에 당첨되면 'N분에 1'하기로 했는데 당첨 됐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당첨이 안 된 것인지 당첨되고도 시치미를 떼는 것인지… 모두 바쁜 일상의 풍속화들이다.
이제는 원고를 들고 급히 뛸 일도 없다. 빠른 걸음으로 지나는 사람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천천히 가시라고. 차단기 앞에서는 잠시 쉬시라고.
땡땡거리며 지나가는 기차, 그러니 아무리 바빠도 어쩔 수 없이 한 템포 쉬어 가야 하는 곳이 이 '땡땡거리'다. 이 거리 만큼 우리에게 아련한 정서를 제공해 주는 곳도 흔치 않다. 아니 마음 놓고 지나가는 기차를 볼 곳도 서울에서는 흔치 않다. 승용차와 버스, 전차가 대중화 돼 기차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타니 말이다. 최근 1967년에 개봉된 한국영화 '귀로'를 봤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신 분은 '연식'이 꽤 되신 분일 것이다. 영화를 보다가 이 '땡땡거리'가 나와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귀로'는 이만희 감독이 만든 영화로 여주인공 문정숙은 한국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하반신이 마비된 남편(김진규)과 함께 산다.
성불구가 된 남편의 유일한 낙은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것이다. 아내 문정숙은 세속적 욕망에 초탈한 여인으로 그려지지만 마음 속 불덩어리는 어쩌지 못한 모양이다. 아내는 매주 남편이 쓴 원고를 신문사에 가져다 준다. 집이 있는 인천에서 출발해 서울역에 내려 이 '땡땡거리'를 지나야 신문사가 나온다. 그 신문사가 한국경제신문사는 아니다. 그녀도 나처럼 데드라인 전에 원고를 전하려고 바삐 움직이지만 차단기에 걸려 버린다. 신문사는 시청 앞에 있다. 시청 앞 육교가 보이는 걸로 보아 1973년 폐간한 대한일보 사옥을 촬영지로 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고의 세월을 잘 견뎌온 문정숙의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린 젊고 잘생긴 남자는 신입 기자다. 젊은 기자는 문정숙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말한다. 지금이라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때는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절이었다.
영화는 지금 보아도 탄탄한 구성에 카메라 앵글도 좋다. 여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압권이다. 철커덕, 철커덕하는 기차 바퀴 소리는 문정숙의 콩닥거리는 마음의 표현이다. '땡땡거리'의 차단기는 문정숙의 질주하는 마음을 차단한다. 차단기 앞에 선 문정숙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는 배경으로 등장하는 서울역 주변의 모습이다. 땡땡거리, 서소문 고가 주변 건물들, 덕수궁 대한문이 섬처럼 고립된 모습, 시청 주변의 60년대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지역 중림동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차단기 안을 지나는 이 기차는 어디로 가는 걸까?
지금은 경의중앙선이라 하여 도라산역까지 가지만 예전에는 경의선이라 하여 신의주까지 가는 기차였다. 1906년 개통한 경의선은 용산이 시발역이다. 용산에서 수색을 지났다. 지금의 전철 6호선 라인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런데 용산역이 외곽에 있다 보니 서울에서 가는 사람들이 불편한 것이다. 사대문 안 사람들이 경의선을 타려면 경성역에서 용산역까지 가서 경의선을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성역에서 신촌, 서강을 거쳐 수색으로 가는 경의선 지선을 만들었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남대문역(경성역) 수색 간에 선로 공사, 직선화 공사를 해서 바로 용산을 거치지 않고 가도록 했다. 그때 생긴 철길이 중림동 '땡땡거리'를 지나가는 이 선로이다. 역사가 새로 생겼다. 서소문역, 아현리역, 신촌역이다.
이곳은 3·1운동과도 관계가 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을 한 시위대가 이 철길을 건너 프랑스 영사관(당시는 외교권이 없었기에 대사관이 아닌 영사관이다)으로 향했다. 왜일까?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종전 협정을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열게 된다. 그곳에서 1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식민지 처리에 대한 협의가 있었다. 불쌍한 조선의 백성들은 이 경의선 철길을 건너 일본의 폭정을 호소하고 프랑스에게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영사관으로 간 것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행렬이었다. 프랑스 영사는 시위대와 면담하고 조선의 독립 청원을 본국에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또 시위대는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 기마대와 대치하게 된다. 성난 시위대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근처 서대문역 일대에서 시위가 자주 일어나자 1919년 3월 31일 역은 폐쇄된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이 철길은 아직도 북한을 관통하지 못하고 도라산에서 멈춘다.
조선시대에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이곳에서 참수된 순교자들의 행렬이 이어졌고 100여 년 전에는 독립을 외치던 백성의 행렬들이 이 철길을 따라 지나갔다. 전쟁의 참화 후 1960년대에는 문정숙이 남편의 원고를 들고 지나갔다. 이 근처에서 직장 생활을 한 나도 숱하게 이 '땡땡거리'를 지나갔다.
차를 몰아 다시 땡땡거리며 내려오는 차단기 앞에 서 보았다. 각자의 일로 바쁜 사람들이 차단기가 올라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앞에는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노숙자 쉼터가 있다. 'Heart to God, Hand to Man'(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이 쉼터에 계신 분들도 지금까지 무척 바쁘게 살았을 것이다. 이제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시기를. 그 옆에 로또 복권 판매소가 있다. 신문사 근무 시절, 회식을 하고 돌아가다가 팀원들과 복권을 사서 한 장씩 나누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1등에 당첨되면 'N분에 1'하기로 했는데 당첨 됐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당첨이 안 된 것인지 당첨되고도 시치미를 떼는 것인지… 모두 바쁜 일상의 풍속화들이다.
이제는 원고를 들고 급히 뛸 일도 없다. 빠른 걸음으로 지나는 사람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천천히 가시라고. 차단기 앞에서는 잠시 쉬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