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후 탈북한 재일교포, 북 탄광에서 만났던 국군 포로들 증언
"국군포로들은 '대한민국이 우릴 버리나 보다'하고 실망하더라"
"내가 2006년 탈북할 때까지 국군포로 형님들이 살아 계셨다.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왔을 때 그분들이 대단한 기대를 걸었는데, 이후 실망했던 얼굴들이 눈에 선하다.

그분들은 '대한민국이 우리를 포로라고 버리는가 보다'하고 실망했다.

"
재일교포 이상봉(가명) 씨가 2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대북 인권단체 물망초가 개최한 인권 세미나 '함경북도 탄광에서 만난 국군포로들, 북송 재일교포의 증언'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1946년 일본 이시카와현에서 태어난 이씨는 북한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날조 선전에 속아 1959∼1984년 북한으로 향한 약 9만3천여 재일교포 중 한 명이다.

천안과 김천 출신 부모 손을 잡고 1960년 북송선에 오른 그는 북송 1년 만에 실상을 깨닫고 일본에 남아 있던 형에게 "형님은 절대 오지 말 것"이라는 비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북에서 배고픔에 시달린 그는 식량 배급을 조금이나마 더 받는다는 탄광 채탄공으로 자원했고, 함북 유선탄광에서 국군포로들을 만났다.

탄광은 "갱 밖이 최저 영하 26도, 갱 안은 영상 34도 이상"으로 "북극과 적도 차이" 환경이었다고 했다.

자원자 외에 출신 성분이 나쁜 사람들이 탄광에 배치됐는데 국군포로들도 그렇게 분류돼 가장 오랜 기간 중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씨는 "국군포로 형님들은 자기한테 오는 사람은 다 밀고자, 감시자라는 생각에 절대 사람을 곁에 붙이지 않더라"며 "나는 일본에서 와서 같이 고생하는 사람이니 믿어 달라고 했다"고 떠올렸다.

그가 기억하는 국군포로들의 이름은 이승식, 리상범, 박주용, 주용수, 박팔양 등이다.

북한 당국은 국군포로들에게 3명 이상 모이지 말 것, 이산가족 상봉 신청 금지, 대한민국 대신 '남조선 괴뢰' 호칭 사용 등의 규칙을 강요했다고 전했다.

이씨와 가깝게 지냈던 국군포로 이승식은 키가 커서 '꺽다리 괴뢰군'으로 불렸다고 한다.

일을 마친 뒤 이씨와 함께 개울가에서 새카매진 몸을 씻고는 하면서 서로 속내를 털어놓는 사이가 됐다.

이승식은 탄광에서 일하는 틈틈이 야간 학교에 다녀 기능공 자격증을 따고 절단기를 개발하는 등 북한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지만, 1989년 또는 1990년 탈북해 중국으로 갔다가 공안에 붙잡혀 강제 송환된 뒤 아내, 세 자녀와 함께 공개 총살됐다는 게 이씨 기억이다.

이씨는 그 처형을 자신도 의무적으로 봐야만 했었다며 "이승식 가족이 한 일은 다른 국가에 사는 사람은 당연히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며 "집단에 밀고자가 섞여 있었기 때문에 당시 나는 심정을 토로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국군포로들은 '대한민국이 우릴 버리나 보다'하고 실망하더라"
그는 자신이 탈북해 일본이나 한국에 갈 것을 미리 생각했더라면 국군포로들에 대해 더 자세히 기록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며 "아쉽고 미안하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함께 일했던 국군포로들은 1931∼1933년생이 많았고, 살아있으면 90살이 넘었다.

그분들은 90대 나이에 고초를 겪고 있다.

시간이 없다"면서 "하루바삐 국군포로를 구원하자"고 호소했다.

물망초 인권연구소 소장을 맡은 이재원 변호사는 "조국으로 돌아온 국군포로 80분 가운데 70분이 이미 돌아가셨고, 휴전 당시 억류된 8만3천여 포로 중 몇 분이나 살아계신지, 정부는 이들을 모시고 올 생각이나 하는지 답답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전선에 나갔다가 포로가 된 분들을 귀환시켜야 한다는 명제는 단순한 인권적 요구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국가가 국민에게 애국심을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적 기초이기 때문"이라며 "끈질기게 송환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