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e] 최지인의 탐나는 책
김목인,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위즈덤하우스, 2023)
새로운 고백도 아니지만, 음악가이자 번역가, 작가인 김목인을 좋아한다. 수년 전 그를 인터뷰어로 섭외하여 여러 명사의 ‘최애 책’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한 적이 있다. 문학과 독서를 향한 그의 깊은 애정과 폭넓은 지식, 그리고 어느 순간에도 상대에게 편안함을 주는 겸손하고 다정한 태도가 없었다면, 그때 나는 극악의 스케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고 여전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잭 케루악을 무척 좋아하여 『다르마 행려』를 직접 번역했을 뿐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음악가』처럼 메타적 에세이를 쓰는 데도 능한 작가. 한편, 나는 그를 농성장에서도 종종 만나곤 했다. 작은 투쟁의 현장에 기쁘게 와서 전해주던 담담하고 조용한 노래를 들으며 어두운 아스팔트 위에서 느끼던 막막함과 슬픔이 조금씩 잦아들던 시간을 기억한다. 따뜻함 속에 날카로움도 가진 각성된 예술가, 나도 언젠가 꼭 다시 함께 일하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 김목인이다.
그런 그가 소설을 썼다니!! 탐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 바로 위픽 시리즈로 출간된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이었다. 약 80페이지가량의 비교적 짧은 분량으로 완성도 있게 구성된 이 소설은 각자의 계기로 오래된 아코디언에 관심을 갖게 된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단한 스펙터클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저 평범하게 열심히 살아온 G가 어느 프랑스인이 경매로 내놓은 옛 시절의 아코디언을 이베이에서 원하는 가격에 낙찰받아 여러 우여곡절을 겪는 과정은 읽는 이에게 감정의 역동을 충분히 만들어낸다. 여러 작은 호의들로 끝내 이 작은 행운을 거머쥘 수 있게 되는 순간 내 마음속까지 잔잔히 전해지는 기쁨이 작지 않았다. 이는 어느 백반집에서 우연히 오래된 아코디언을 얻는 L의 이야기와 포개지며, 드물지만 우리의 삶에 몇 번쯤은 안겨져야 마땅할 소소한 행운과 즐거움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소설을 읽고 그가 ‘작가의 말’에 추천해둔 조스 바셀리와 앙드레 아스티에 등의 아코디언 연주를 들었다. 생각보다 높고 경쾌하며 소박한 인상의 선율이 귀를 채우며 떠듬떠듬 운지법을 익혀가는 투박한 손들을 떠올렸다. 김목인만큼 평범한 사람들의 얄궂고도 사랑스러운 일상을 잘 포착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굳이 밤에 옷을 챙겨 입고 라면을 사러 가는 사람, 환자를 방문하려다 수액을 맞고 잠드는 보험회사 직원,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며 그녀의 고향 가로수길에 관해 말하는 남자……. 김목인 예술의 가장 멋진 부분을 이 소설에서도 발견할 수 있어 정말 많이 기뻤다고 말해보고 싶다.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는 전설 시대 중국이 배경이다. 남성혐오증을 갖고 있는 투란도트 공주는 각국에서 몰려오는 구혼자들을 모두 물리치는데, 그 방법이 독특하다. 공주는 왕자들에게 아리송한 수수께끼 세 가지를 낸다. 모두 맞히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지만 하나라도 틀리면 곧바로 참수형에 처해진다. 때로는 넌센스 퀴즈 같고, 때로는 매혹적인 문학적 알레고리를 지닌 문제들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어둑한 밤 그것은 커다란 날개짓을 하며 인류라는 심연 위를 날아다닌다. 그것은 밤마다 태어나고 아침이 되면 죽어버리지. 그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희망(La Speranza)이다.지금껏 수 백 명의 왕자들이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때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그녀에게 구혼장을 내민다. 칼라프는 우여곡절 끝에 수수께끼를 모두 풀어내지만 그래도 공주는 계속해서 왕자의 사랑을 거부한다. 급기야 왕자는 역으로 문제 하나를 낸다. “내일 아침까지 내 이름을 알아내면 투란도트 공주 당신의 승리, 그렇지 않으면 내가 찬란한 사랑으로 당신을 설득하리라.” 새벽녘에 왕자가 사랑의 승리를 예감하며 부르는 아리아가 저 유명한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이다.그런데 이 오페라의 여주인공은 사실 두 명이다. 표독하게 왕자를 쏘아 붙이는 투란도트 공주 외에 류(Liu)라는 여자 시종이 있다. 그녀는 칼라프 왕자를 사모하며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중국까지 왔다. 류는 작곡가 푸치니가 그간 창조해왔던 전설적인 여주인공의 계보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미미, 토스카, 나비부인 등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멜랑콜리형 리릭 소프라노 말이다. 류가 1막에서 노래하는 ‘왕자님, 들어주세요(Signore, ascolta)’는 감동적인 명곡이다. 일찍이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의 열렬한 팬이었던 퀸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가장 사랑하던 아리아이기도 했다. 그래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도 삽입되어 있다.그러나 투란도트 공주는 다르다. 강렬하고 극적인 표현력과 엄청난 성량을 요구하는 이른바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전형이다. 푸치니는 지금껏 이런 캐릭터를 창조해본 적이 없었다. 고심을 거듭하던 그는 독일 스타일의 표현주의적 강인함과 이탈리아 오페라 특유의 유려한 선율미를 잘 조화시켜 끝내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를 창조해내는데 성공했다. 다만 기존의 이탈리아 소프라노들에겐 너무도 낯선 배역이라, 지금도 주로 독일이나 북유럽에서 온 바그너 성악가들이 곧잘 투란도트 공주를 부른다. 스웨덴 태생의 비르기트 닐손이 전설적인 투란도트로 유명하며, 우리 시대엔 니나 슈템메가 그 계보를 잇고 있다.언젠가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공연을 보다가, 닐손의 투란도트를 실제로 들었다는 관객 한 분과 만났다. 단아한 자태의 이 귀부인은 그때가 1960년대 말쯤이었다고 했다. 자신은 <라 보엠>같은 섬세한 오페라만 듣는데, <투란도트>를 처음 보고는 너무나 놀랐단다. ‘세상에, 소프라노 목소리가 저렇게 무섭다고?!’ 그러나 이 공포의 프리마 돈나도 3막에 이르면 얼음이 녹아내리듯 한결 표정이 부드러워져, 피날레에서 칼라프 왕자와 찬란한 사랑의 2중창을 부르게 된다. 그렇다, 사랑은 모든 것을 녹인다. 이것이야말로 푸치니 오페라의 마법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우아한 여자이다. 영어로는 graceful이고 한자로는 優雅이다. 불어는 élégance이다. 한글이든 영어든 한자든 그리고 프랑스어로든 다 있어 보인다. 품격이 있다. 우아함은 지성과 교양에서 나온다. 깎아지른 듯한 콧날이나 CD보다 작은 얼굴, S라인 몸매는 짧게는 사흘, 길게는 3년 간다. 우아한 여자는 남자를 혹은 상대 파트너를 3년을 넘어 평생을 좌지우지한다. 우아한 여자의 가장 큰 특징은 나이에 상관없이 매혹적이라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홍콩과 중국, 할리우드에서 광폭 활동을 하고 있는 양자경은 이제 60이 넘었지만 아직 뭇 남성으로부터 대시의 대상이다. 그녀는 남자로 하여금 (이 여자라면)지배당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양자경에 대해 사람들은 요즘 죄 ‘에브리씽 에브리 웨어 올 앳 원쓰’를 얘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로 양자경은 할리우드 최고의 유리 천정이라고 했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기 때문이다. 할 베리 이후 유색인종, 특히 아시아 계 여성이 주연상을 거머쥔 것은 양자경이 처음이다. 실로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에브리씽 에브리 웨어 올 앳 원쓰’가 그렇게나 좋은 영화이고 기발한 영화인지는 약간의 호불호가 갈리고 여기서의 양자경의 연기가 최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영화가 그녀의 매력을 십분 살려 내고 있는 가는 의심스럽다. 뭐 그냥 세탁소 아줌마 캐릭터였으니까.양자경은 중년의 나이를 넘어서면서 오히려 더 섹시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선보인다. 그건 몸을 되도록 감추는 무협물의 의상을 입고서도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우습게 보는(?) 영화 ‘검우강호(劍雨江湖)’는 양자경이 어떠한 배우이고 어떠한 여자인지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준다. 2010년 작품이고 오우삼이 공동감독으로 참여한 영화이다. 이때 양자경의 나이는 48살이었다. 상대역 배우는 30대 중반의 한국 배우 정우성이었다.나름 자기 복제가 심했던 오우삼의 영화인 만큼 ‘검우강호’도 황당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페이스 오프(face off·단순한 성형이 아니라 얼굴 자체를 바꾸는 것)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뭐 사실 무협영화 자체가 말이 안되는 판타지이니까 상관은 없는 일이다…라고 오우삼은 생각했을 것이다. 여자 주인공(임희뢰)은 청부 암살업자이고 무림 고수이다. 그녀는 지니게 되면 최고 무술의 경지를 이루게 된다는 '달마의 유해'를 중간에 가로챈다. 그리고 얼굴을 바꾸고 다른 여성(양자경)으로 새로 태어난다. 다른 얼굴이 된 여자는 자신을 좇는 무림의 모든 고수들을 피하기 위해 잠수를 탄다. 그녀는 한 시골 마을에서 비단장사를 시작한다. 어느 날 그녀의 눈에 젊고 튼실한 남자(정우성)가 들어 오는데 지금으로 얘기하면 퀵 서비스 맨이다. 나이가 좀 있고 사연이 있어 보이는 비단장사 여자는 젊은 배달부를 데려다 멕이고, 입히고, 재우고, 안아 준다. 자, 근데 이런 식으로 얘기를 이어가면 한도 끝도 없다. 각설하고 극 후반에 남자가 여자의 가슴에 칼을 겨눈다. 여자는 남자를 똑 바로 바라보며, 그러나 부드럽게 묻는다. “그렇다면 지금껏 나를 단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나요?” 그러자 이 젊은 남자 칼을 쥔 손에 바짝 힘을 주면서 소리친다. “난 당신을 한번도 사랑한 적 없어!”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인간,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입으로는 사랑한 적 없다고 한다. 그것도 굳이 또박또박 문장을 만들어 가며.(이때 정우성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여자는 많은 생각을 담고 있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곧 남자를 고수의 실력으로 제압해 잠시 정신을 잃게 한 후 악당의 수괴(왕학기)와 최후의 일합을 겨룬다. 여자는 남자를 살리기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길을 선택한다. 이 영화에서는 돌 다리가 중간중간 인서트 컷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런 대사가 흐른다. ‘나는 하나의 돌 다리가 되어 500년동안 비와 눈을 맞으며 당신이 단 한번이라도 건너 가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양자경은 500년 된 돌다리 같은 여자이다. 대만 출신 이안 감독이 2000년에 만든 영화 ‘와호장룡’은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치 않은 작품이다. 양자경은 여기서, 주변의 젊은 여자(장쯔이)가 ‘들이대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직한 남자 리무바이(주윤발)를 늘 조용히, 옆에서, 오랜 시간을, 우아하게 지켜 보는 여자 수련으로 나온다. 푸른 여우의 독침을 맞고 남자가 죽기 전에 두 중년남녀는 손을 잡는다. 남자는 말한다. “주먹을 쥐면 그 안엔 아무 것도 없고 손을 펴면 모든 것을 쥘 수 있다오.” 여자는 그윽한 표정을 짓는다. ‘그윽하다’라는 순 우리말을 상응시킬 수 있는 여배우는 양자경밖에 없다. 드러내지 않고 깊고 평안한 표정을 보일 수 있는 여자는 살면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2012년에 프랑스 뤽 베송 감독이 만든 ‘더 레이디’는 양자경의 우아한 미모가 최고조로 구현된 영화이다. 온 세상 영화계에서 가장 ‘못돼 처먹은’ 감독으로 유명한 뤽 베송이지만(이 영화로 부산영화제에 와서는 무대인사 중간에 나가거나 자신의 뚱뚱한 외모가 나오는 게 싫다며 사진기자들에게 촬영을 하지 말라는 둥 패악을 부렸다) 이 영화에서 양자경의 캐릭터 하나만큼은 제대로 뽑아 냈다. 감독은 감독이다. ‘더 레이디’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는 아웅산 수치 여사의 이야기이다. 일종의 바이오그래피 영화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현재 다시 가택 구금 사태에 처해져 있지만 잠시 실권을 쥐었을 때(외교부 장관과 대통령 고문이었다. 수치 여사는 고인이 된 남편이 영국인이고 영국 국적을 지니고 있어 대통령이 될 수 없다.) 로힝야 족 학살 사건을 묵인하는 바람에 국제적 신망을 다소 잃은 상태이긴 하나 여전히 미얀마의 인권 문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더 레이디’를 보고 있으면 수치 여사로 분한 양자경의 싱크로율이 거의 백프로에 가까워 놀라게 된다. 아웅산 수치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양자경밖에 없다.양자경을 논할 때 ‘예스 마담’을 얘기하는 자 다 배신자(?)이다. 영화를 겉핥기로 아는 자들이다. ‘송가황조’같은 영화를 거론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영화의 송애령 역은 양자경이 늘 점잖고 우아한 맏이 역할에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는 너무 돈이 많은 싱가폴 여성으로 나와 본래 이미지와는 좀 달라 보였으나 우아하다는 건 어쩌면 ‘돈이 받쳐줘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 대목이기도 했다. 금방 잊혀진 영화 ‘건 파우더 밀크 셰이크’에서도 총격 액션을 (과거 샘 페킨파 감독이 보여줬던) 총격 발레의 느낌으로 선보인다. 양자경은 여기서 웨이트리스 복장으로 앞치마를 입고 샷건과 소총을 쏴댄다. 폭력적이라기 보다는 이상하게도 중후한 성적 매력을 발산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양자경은 평생을 잊지 못하는 과거의 여인 이미지이다. 이상한 미중 합작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양자경은 오래 전 연인인 양조위와 오랜만에 만나 죽을 듯이 일합을 겨루며 싸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안다. 양자경은 남자를 죽이지 않는다. 그것도 결국 죽을 듯이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반증할 뿐이다.자, 양자경이 물을 것이다. “나를 한번이라도 사랑한 적이 있나요?” 그것도 그윽한 눈빛으로. 당신은 뭐라고 답할 것인가. 그녀 앞에 서면 그녀의 62세라는 나이는 잠시 까먹게 될 것이다. 사랑엔 나이란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진부하지만 맞는 얘기이다.
21세기의 첫해인 2000년. 프랑스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에 단발 계약직 오디션이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하고, 나는 한걸음에 파리로 향했다. 5년간의 국립발레단원 생활을 정리하고 외국 발레단으로의 도전을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무모했던 용기 덕이었는지 운 좋게 오디션에 합격하고 파리오페라발레단과 의 인연을 시작할 수 있었다. 5개월의 짧은 계약 기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나의 무용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총 세 개의 레퍼토리에 출연을 했는데, 마지막 작품이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전설적인 발레리노이자 안무가이며 파리오페라발레단장을 역임했던 “루돌프 누레예프”의 안무작 ‘로미오와 쥴리엣’. 전체적인 연출과 안무 그리고 의상, 조명, 스토리텔링 등 어느것 하나 모자람 없는 완벽한 작품이었다. 비록 군무무용수였었지만 그럼에도 그 작품을 보고 연기하며 두 가지 꿈이 생겼다. “언젠가는 반드시 ‘로미오’ 역을 해보고 싶다”는 것, 그리고 “나의 인생 목표는 파리오페라단의 에뚜왈(최고 등급의 무용수)가 되는 것이다”라는 것. 계약 기간이 끝나고 종신단원 오디션이 있었는데, 단 한 명만 선발하는 그 오디션에서 또 다시 행운의 여신이 찾아와 준 덕에 1위를 차지해 한국인 최초로 입단할 수 있었다.그렇게 한국을 떠난 지 반년만에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종신단원이 됐고,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그해 8월 고국의 국립발레단은 정기공연이자 국내 초연으로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당시 단장)의 제안과 배려로 그 공연에서 “로미오” 역을 맡게 됐다. 귀국전 파리에 있는 동안 이 작품의 공연실황을 영상으로 먼저 보며 연구했었는데 최고의 명작이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영상만으로 별 감흥이 없었다. 당시 보고 있던 영상의 퀄리티가 그리 높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더 실질적인 이유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이미 “파리오페라발레단” 버전의 “로미오와 쥴리엣”이 더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마이요”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로 캐스팅 되는 행운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솔직하게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연습과정에서 하나하나 사라졌고 그 과정은 신선한 충격의 연속이었다.당시 모나코 몬테카를로발레단의 ‘지오반나’라는 의욕 넘치던 트레이너가 국립발레단으로 와서 함께 리허설을 했는데, 동작 하나하나와 장면 하나하나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 작품만의 매력에 빠질수 있었다.당시 클래식 발레에만 너무 몰입해 있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작품을 통해 서서히 변해가고있던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안무가의 재해석이다. 원작에서도 중요한 역할이긴 하지만 클래식 발레 버전에선 크게 부각되지 않는 신부 ‘로렌스’가 극의 전반을 이끌어 나가고 있었고 누구보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통한 강인하고 모성애가 넘치는 “쥴리엣”의 “엄마”역은 자칫 극의 주인공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존재마저도 위협할 정도로 느껴졌다.안무적 기법은 또 어떤가. 마이요의 안무는 거의 모든 동작들이 마치 인간의 원초적 감정에서 표출되는 움직임들과 그 자체를 안무로 옮겨놓은 듯하다. 춤을 추는 무용수의 입장에선 극 속의 당시 상황과 감정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마술과도 같은 힘을 갖는다. 이런 점은 클래식 발레 작품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것들인데 마이요는 무용수들이나 관객들이 극을 보며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한계를 명확하게 잡아내고, 그 표현과 이해의 경계를 깨부수고자 했던 것같다.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 역시 그랬다. 아무리 극 중이어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키스’라는 행위를 무대라는 열린 공간에서 하는 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나 하는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안무가는 이 행위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안무에 활용했다. 2000년 당시엔 나를 비롯한 한국의 관객들에게도 이 부분은 꽤나 큰 문화적 충격이었다 생각된다.무대에 오르기 전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하나는 ‘이 장면을 직접 보는 관객들이 혹시 불편해 하거나 거부감을 가지지는 않을까’싶었던 것. 또 하나는 한편으로 ‘누군가가 이런 시도조차 재대로 하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그저 ”숨어서만 표현해야하는 굳이 드러내서 하면 안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과 다짐 때문이었는지실제 무대에서의 키스신은 리허설 때보다 더 열정적으로 했었었는데 4차례의 공연을 모두 지켜봤던 지금의 나의 아내의 입장에선 그 때가 얼마나 괴로웠을까 싶은 마음에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든다.안무가 마이요는 작품의 전체적 흐름에 발레의 기법을 유지하면서도 특이하게 ‘영화적인 기법’을 사용해 풀어낸다. 그래서 새로운 장르,새로운 형식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난 것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2막에서 티볼트가 로미오의 절친인 머큐쇼를 죽이는 장면과 이후 그에 대한 복수로 로미오가 티볼트를 스카프로 목을 감아 죽이는 장면이 있는데 그 급박한 상황에서 마이요는 영화적 기법인 ‘슬로우 모션’을 조명과 무용수들의 움직임으로 구성해 극에 대한 집중도를 최대한 끌어올린다. 마찬가지로 무용수들도 그 상황에 너무 몰입하다보니, 당시 티볼트 역을 맡았던 동료는 “자신이 정말 나(로미오)에게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고 고백하며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무대에서 춤추다 죽기’라는 일생일대의 소원을 “로미오와 쥴리엣”을 통해 이룰 뻔 했다는 농담 섞인 진담을 하기도 했다. 관객들에게 최고의 장면들 중 하나로 뽑히는 이 씬들은 연습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매번하는 리허설임에도 춤추는 사람과 지켜보는 사람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절정의 집중을 하게 되는데 “마이요”를 왜 천재적인 안무가라 부르는 지 확인시켜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무용수로서 한 가지 더 흥미로웠던 부분은 주인공인 “로미오와 쥴리엣” 이 둘의 심리 상태를 두 사람의 신체와 더불어 다른 특정 신체 부위 한 곳- ‘손’-을 통해 전달한다는 점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 그 표현의 확장성이 그렇게 다양하고 디테일하고 거대할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물론 안무가 혼자만으로 이 작품을 명작으로 만든 건 아니었다. 독특하면거도 아름다움을 잃지않는 감각의 의상(제롬 캐플랑), 미니멀하고 심플해 보지만 극의 상황을 잘 이해시키는 조명(어니스트 이뇽), 그리고 천제적인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의 아름답고 극적 선율들이 담긴 음악이 더해져 그야말로 무용수와 관객과 평단의 열렬한 환호를 얻을 수 밖에 없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세상엔 수 많은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고, 이들 역시 각각의 매력과 감동이 넘쳐흐른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들이 왜 그렇게도 ‘마이오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은 꼭 춰보고 싶어하는 지는 작품을 직접 보면 알 수 있다. 무대에서 로미오 역할을 하는 와중에도 작품의 1막이 끝나고, 2막을 지나 3막을 향해갈 때 흘러가고 있는 그 시간들에 대한 아쉬운 감정이 들게하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다. 영원토록 그 무대 위의 그 작품 속에서 머무르며 춤을 추고자 했던 강렬했던 나의 마음은 어느덧 50이 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세계 최고이자 천재적 안무가인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그의 삶과 그의 모든 작품 경의를 표하고 싶은 날이다. /김용걸 발레리노=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실기과 교수=전 국립발레단 주역.=한국인 최초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 솔리스트 (Ballet de L'Opera National de Paris, Suj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