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이 2013년 제작해 CJ토월극장 무대에 올린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예술의전당이 2013년 제작해 CJ토월극장 무대에 올린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는 전설 시대 중국이 배경이다. 남성혐오증을 갖고 있는 투란도트 공주는 각국에서 몰려오는 구혼자들을 모두 물리치는데, 그 방법이 독특하다. 공주는 왕자들에게 아리송한 수수께끼 세 가지를 낸다. 모두 맞히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지만 하나라도 틀리면 곧바로 참수형에 처해진다. 때로는 넌센스 퀴즈 같고, 때로는 매혹적인 문학적 알레고리를 지닌 문제들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어둑한 밤 그것은 커다란 날개짓을 하며 인류라는 심연 위를 날아다닌다. 그것은 밤마다 태어나고 아침이 되면 죽어버리지. 그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희망(La Speranza)이다.


지금껏 수 백 명의 왕자들이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때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그녀에게 구혼장을 내민다. 칼라프는 우여곡절 끝에 수수께끼를 모두 풀어내지만 그래도 공주는 계속해서 왕자의 사랑을 거부한다. 급기야 왕자는 역으로 문제 하나를 낸다. “내일 아침까지 내 이름을 알아내면 투란도트 공주 당신의 승리, 그렇지 않으면 내가 찬란한 사랑으로 당신을 설득하리라.” 새벽녘에 왕자가 사랑의 승리를 예감하며 부르는 아리아가 저 유명한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이다.

그런데 이 오페라의 여주인공은 사실 두 명이다. 표독하게 왕자를 쏘아 붙이는 투란도트 공주 외에 류(Liu)라는 여자 시종이 있다. 그녀는 칼라프 왕자를 사모하며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중국까지 왔다. 류는 작곡가 푸치니가 그간 창조해왔던 전설적인 여주인공의 계보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미미, 토스카, 나비부인 등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멜랑콜리형 리릭 소프라노 말이다. 류가 1막에서 노래하는 ‘왕자님, 들어주세요(Signore, ascolta)’는 감동적인 명곡이다. 일찍이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의 열렬한 팬이었던 퀸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가장 사랑하던 아리아이기도 했다. 그래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도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투란도트 공주는 다르다. 강렬하고 극적인 표현력과 엄청난 성량을 요구하는 이른바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전형이다. 푸치니는 지금껏 이런 캐릭터를 창조해본 적이 없었다. 고심을 거듭하던 그는 독일 스타일의 표현주의적 강인함과 이탈리아 오페라 특유의 유려한 선율미를 잘 조화시켜 끝내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를 창조해내는데 성공했다. 다만 기존의 이탈리아 소프라노들에겐 너무도 낯선 배역이라, 지금도 주로 독일이나 북유럽에서 온 바그너 성악가들이 곧잘 투란도트 공주를 부른다. 스웨덴 태생의 비르기트 닐손이 전설적인 투란도트로 유명하며, 우리 시대엔 니나 슈템메가 그 계보를 잇고 있다.

언젠가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공연을 보다가, 닐손의 투란도트를 실제로 들었다는 관객 한 분과 만났다. 단아한 자태의 이 귀부인은 그때가 1960년대 말쯤이었다고 했다. 자신은 <라 보엠>같은 섬세한 오페라만 듣는데, <투란도트>를 처음 보고는 너무나 놀랐단다. ‘세상에, 소프라노 목소리가 저렇게 무섭다고?!’ 그러나 이 공포의 프리마 돈나도 3막에 이르면 얼음이 녹아내리듯 한결 표정이 부드러워져, 피날레에서 칼라프 왕자와 찬란한 사랑의 2중창을 부르게 된다. 그렇다, 사랑은 모든 것을 녹인다. 이것이야말로 푸치니 오페라의 마법이 아닐까.
얼음장 같은 '투란도트' 공주, 아무나 못 부르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