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칼럼] 문제는 킬러 문항이 아니라 킬러 전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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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전쟁 사교육 열기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인재 블랙홀 의대 쏠림 현상
'고인 사회'는 기득권의 자양분
사회 역동성 높이는
교육·노동 개혁 절실한 까닭
윤성민 논설위원
더 심각한 문제는
인재 블랙홀 의대 쏠림 현상
'고인 사회'는 기득권의 자양분
사회 역동성 높이는
교육·노동 개혁 절실한 까닭
윤성민 논설위원
입시가 전쟁인 한국에는 시험 문제에 얽힌 전설적인 사건이 적잖다. 1969년 중학교 무시험 배정이 도입되기 전에는 경기중학교 입학이 ‘KS마크’를 다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경기중 출신 대부분이 경기고에 진학했고, 또 그중 상당수가 서울대에 갔다. 1964년 중학 입시의 ‘무즙 파동’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엿을 만들 때 엿기름을 대신할 수 있는 물질을 묻는 사지선다형 문항이 발단이다. 학부모들은 정답 디아스타제뿐만 아니라 다른 보기에 있던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며 법원 제소는 물론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솥째 들고나와 시위했다. 결국 6개월 뒤 무즙을 답으로 표기한 학생 중 38명을 경기중 등에 전학시키는 것으로 수습했다. 이 과정에서 문교부 차관과 서울교육감 등 8명이 옷을 벗었다.
2021년 수능 생명과학 문제 오류 사태에는 학생들의 집단 지성이 발휘되고, 해외 석학까지 등장한다. 수험생 92명은 법원에 소송을 내면서 미국 명문대의 생물학 전공 교수들에게 이메일로 오류 여부를 질의했다. 스탠퍼드대 석좌교수가 트위터에 “문제에 수학적 모순이 있다”고 올린 게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원 정답 처리와 함께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원장이 사퇴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목해 유행어가 된 ‘킬러 문항’이 이런 유형의 문제들이다. 교수도 지문을 읽다가 화가 치밀 정도로 배배 꼬아서 통상 정답률이 한 자릿수대인 초고난도 문제다. 윤 대통령은 수능시험에서 킬러 문항 배제와 함께 교육당국과 사교육계 간 카르텔을 척결 대상으로 제시했다. ‘검사 윤석열’의 세계관이 응축된 2021년 6월 대선 출마 선언문 속 ‘정권과 이해관계로 얽힌 이권 카르텔’에는 애당초 사교육 카르텔도 포함돼 있었다.
사교육이 거대 비즈니스화한 실태는 생각 이상이다. 운동권 출신 학원 강사가 세운 국내 최대 사교육 기업은 빌딩 관리 자회사를 두고 있고, 최근엔 골프장도 인수했다. 교육당국이 변별력을 내세워 킬러 문항을 출제하고, 이를 풀 수 있는 요령을 가르치는 학원과 사교육 업체가 떼돈을 버는 것을 보곤 태양광 이권 카르텔과 비슷한 분노를 느꼈을 법하다. 그러나 교육 카르텔에는 여느 카르텔과 다른 구성의 차이가 있다.
수요자, 곧 학부모다. 한국의 사교육 시장은 교육열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라고 보는 게 맞다. 더 이상 동원할 정책이 있을까 싶은 그 숱한 입시 변천사 속에서 절대 사그라지지 않은 상수가 교육열이다. 여기에 교육당국이 정책을 내놓는 순간 이미 대책을 만들어 실행하는 사교육의 적응력이 학부모들을 충족시켰다. 둘은 한국 교육을 입시 전쟁터로 만든 사실상의 공범이다.
지금 병적 교육열이 수렴되고 있는 곳은 딱 하나, 의대, 좀 더 넓히면 메디컬 전공 ‘의치한약수(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다. 그 의치한약수의 당락을 가르는 역할이 바로 킬러 문항이다. 대통령의 킬러 문항 지적 이후 공정거래위원회·국세청 조사를 받은 대치동의 재수생 킬러 문항 전문 학원은 지난해 전국 39개 의대 정시합격자의 49.9%를 배출했다는 ‘입결’을 자랑하던 곳이다.
킬러 문항은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손도 못 대는 구조여서 수능 시험의 공정성 논란을 빚는다. 그러나 우리는 킬러 문항을 없앤다고 사교육 열기가 잡히지 않을 것이란 걸 뻔히 안다. 올 수능에 킬러 문항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의대 ‘반수생’이 더 늘어날 조짐이라고 하지 않는가. 기실 사교육 열병보다 더 큰 문제는 맹목적 의대 쏠림 현상이다. 의과대학교의 ‘교’는 ‘校’가 아니라 ‘敎’가 된 현실이다. 한 학부모 단체 대표의 표현대로 의대 광풍에 사로잡힌 학부모들은 기득권만을 절대 가치로 믿는 신흥 종교의 광신자에 가깝다.
기득권은 ‘고인 사회’에서 무럭무럭 자라난다. 과거 대학 전공 선호도를 보면 자연계 수재들에게 서울대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가 최고이던 시절이 꽤 있었다. 그때 배출된 인재들이 우리 과학기술 수준을 높이고, 반도체 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의대 쏠림 현상의 해법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선 어떻게든 모색해야 한다. 사회가 꿈틀대며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역동성을 높여야 한다. 교육·노동개혁이 절실한 이유 중 하나다. 학원에 초등의대반이 생기는 것은 초등학생들이 중학교 입시 지옥을 겪던 1950~1960년대로 우리 교육이 반세기 이상 퇴보한 것이다. 인재 블랙홀이 된 의대 광풍은 저출산만큼이나 국가 경쟁력에 위험 요소다.
엿을 만들 때 엿기름을 대신할 수 있는 물질을 묻는 사지선다형 문항이 발단이다. 학부모들은 정답 디아스타제뿐만 아니라 다른 보기에 있던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며 법원 제소는 물론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솥째 들고나와 시위했다. 결국 6개월 뒤 무즙을 답으로 표기한 학생 중 38명을 경기중 등에 전학시키는 것으로 수습했다. 이 과정에서 문교부 차관과 서울교육감 등 8명이 옷을 벗었다.
2021년 수능 생명과학 문제 오류 사태에는 학생들의 집단 지성이 발휘되고, 해외 석학까지 등장한다. 수험생 92명은 법원에 소송을 내면서 미국 명문대의 생물학 전공 교수들에게 이메일로 오류 여부를 질의했다. 스탠퍼드대 석좌교수가 트위터에 “문제에 수학적 모순이 있다”고 올린 게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원 정답 처리와 함께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원장이 사퇴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목해 유행어가 된 ‘킬러 문항’이 이런 유형의 문제들이다. 교수도 지문을 읽다가 화가 치밀 정도로 배배 꼬아서 통상 정답률이 한 자릿수대인 초고난도 문제다. 윤 대통령은 수능시험에서 킬러 문항 배제와 함께 교육당국과 사교육계 간 카르텔을 척결 대상으로 제시했다. ‘검사 윤석열’의 세계관이 응축된 2021년 6월 대선 출마 선언문 속 ‘정권과 이해관계로 얽힌 이권 카르텔’에는 애당초 사교육 카르텔도 포함돼 있었다.
사교육이 거대 비즈니스화한 실태는 생각 이상이다. 운동권 출신 학원 강사가 세운 국내 최대 사교육 기업은 빌딩 관리 자회사를 두고 있고, 최근엔 골프장도 인수했다. 교육당국이 변별력을 내세워 킬러 문항을 출제하고, 이를 풀 수 있는 요령을 가르치는 학원과 사교육 업체가 떼돈을 버는 것을 보곤 태양광 이권 카르텔과 비슷한 분노를 느꼈을 법하다. 그러나 교육 카르텔에는 여느 카르텔과 다른 구성의 차이가 있다.
수요자, 곧 학부모다. 한국의 사교육 시장은 교육열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라고 보는 게 맞다. 더 이상 동원할 정책이 있을까 싶은 그 숱한 입시 변천사 속에서 절대 사그라지지 않은 상수가 교육열이다. 여기에 교육당국이 정책을 내놓는 순간 이미 대책을 만들어 실행하는 사교육의 적응력이 학부모들을 충족시켰다. 둘은 한국 교육을 입시 전쟁터로 만든 사실상의 공범이다.
지금 병적 교육열이 수렴되고 있는 곳은 딱 하나, 의대, 좀 더 넓히면 메디컬 전공 ‘의치한약수(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다. 그 의치한약수의 당락을 가르는 역할이 바로 킬러 문항이다. 대통령의 킬러 문항 지적 이후 공정거래위원회·국세청 조사를 받은 대치동의 재수생 킬러 문항 전문 학원은 지난해 전국 39개 의대 정시합격자의 49.9%를 배출했다는 ‘입결’을 자랑하던 곳이다.
킬러 문항은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손도 못 대는 구조여서 수능 시험의 공정성 논란을 빚는다. 그러나 우리는 킬러 문항을 없앤다고 사교육 열기가 잡히지 않을 것이란 걸 뻔히 안다. 올 수능에 킬러 문항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의대 ‘반수생’이 더 늘어날 조짐이라고 하지 않는가. 기실 사교육 열병보다 더 큰 문제는 맹목적 의대 쏠림 현상이다. 의과대학교의 ‘교’는 ‘校’가 아니라 ‘敎’가 된 현실이다. 한 학부모 단체 대표의 표현대로 의대 광풍에 사로잡힌 학부모들은 기득권만을 절대 가치로 믿는 신흥 종교의 광신자에 가깝다.
기득권은 ‘고인 사회’에서 무럭무럭 자라난다. 과거 대학 전공 선호도를 보면 자연계 수재들에게 서울대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가 최고이던 시절이 꽤 있었다. 그때 배출된 인재들이 우리 과학기술 수준을 높이고, 반도체 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의대 쏠림 현상의 해법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선 어떻게든 모색해야 한다. 사회가 꿈틀대며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역동성을 높여야 한다. 교육·노동개혁이 절실한 이유 중 하나다. 학원에 초등의대반이 생기는 것은 초등학생들이 중학교 입시 지옥을 겪던 1950~1960년대로 우리 교육이 반세기 이상 퇴보한 것이다. 인재 블랙홀이 된 의대 광풍은 저출산만큼이나 국가 경쟁력에 위험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