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털 박혀도 할 말은 한다…'합리성 신봉자' 산업부 장관
행시 수석으로 선배들 제치고 산업부정책과장 발탁됐으나
경제공부 목말라 사표 … KAIST에 먼저 임용 제안 ‘소신행보’
전기료 협상땐 “한전, 이럴거면 기재부 가져가시라” 쓴소리도

‘행정고시 29회 수석합격→하버드대 박사→첫 보직 과장으로 부처 선임인 산업정책과장 발탁→KAIST 종신 교수→산업통상자원부 장관으로 복귀.’

이창양 산업부 장관의 이력이다. 이 장관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부전공으론 경제학을 했다고 한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에 대해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하는 ‘합리성 신봉자’”라고 평가한다.

한다면 한다 엘리트 코스 밟다 돌연 교수로

이 장관이 ‘하고 싶은 일은 꼭 하는 성격’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은 사표다. 1999년 이 장관은 산업부를 떠들썩하게 했던 인사의 주인공이었다.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돌아온 ‘이창양 서기관’을 당시 정덕구 산업자원부 장관이 산업정책과장으로 발탁했기 때문이다. 산업정책과장은 산업정책을 총괄하는 과장으로 산업부 선임과장 자리다. 원래대로라면 ‘이창양 서기관’보다 몇기수 위 선배가 앉아야 할 자리였다. 그런데 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 전신) 차관을 하다 산업부 장관을 맡게 된 정덕구 당시 장관이 ‘초짜 과장’을 선임과장 자리에 앉힌 것이다. 한마디로 ‘에이스 과장’으로 인정한 셈이다. 연공서열과 기수 문화가 강한 공직 사회, 그것도 1990년대 관가에선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당시 산업정책과장은 국장급 이상만 참석하던 간부회의에도 배석했는데, 이 자리에서 정 전 장관은 ‘이창양 과장’에게 질문을 자주 한 뒤 대답을 들으면 “그렇지, 저렇게 답해야지”라고 칭찬할 정도로 총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장관은 얼마 되지 않아 사표를 썼다. 정 장관이 사표 수리를 오랫동안 해주지 않았지만, 이 장관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장관이 공직을 떠나기로 한 이유는 공부 때문이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 장관이) 1999년 당시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하는 경제가 아닌 지식경제로의 패러다임 변화의 필요성을 하버드대와 산업정책과장을 거치며 절실하게 느낀 것으로 안다”며 “자신 또한 그 분야의 공부가 더욱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전했다. 첨단기술 경쟁력이 글로벌 경제전쟁의 성패를 가르는 상황을 내다본 것이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해 12월 6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관련 산업계 긴급 점검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허문찬 기자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해 12월 6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관련 산업계 긴급 점검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허문찬 기자
이 장관은 요즘도 주말에는 책과 신문을 놓지 않는 ‘공부 벌레’다. 파이낸셜타임스를 거의 빼놓지 않고 읽고, 주말엔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를 즐겨 읽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코노미스트와 각종 해외 원문 자료를 탐독한 뒤 현업 실·국·과장에게 “이런 것을 봤는데 혹시 읽어 봤느냐, 업무에 참조하면 좋겠다”고 전해주는 일이 많다는 전언이다. 예컨대 독일의 탈원전이 보도되고 있지만, 탈원전으로 전기 요금이 올라 독일의 산업경쟁력이 떨어지는 현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식이다.

할 말은 한다 … 대선 때 尹 자문역할 맡아

이 장관이 산업부를 그만둔 사실이 언론 보도로 알려지자 여러 대학에서 교수 임용 제안이 왔다고 한다. 그가 하버드대에서 공부한 전공은 기술혁신, 이노베이션에 대한 정책학이다. 이 장관은 이를 가장 잘 연구해 가르칠 수 있는 학교는 KAIST라고 생각했지만, KAIST에서는 정작 제안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이 장관은 KAIST에 먼저 연락해 자신을 임용해달라고 부탁했다. KAIST는 “임용은 가능하다”고 했지만 제시하는 조건은 다른 대학에 비해 좋지 않았다. 특히 공무원으로 일한 경력을 전혀 인정해주지 않았다. 다른 대학에선 공무원 경력을 일부 인정해줬지만 KAIST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장관은 소신대로 KAIST를 택했다. 공무원 경력 인정이 안 돼 전임강사부터 시작했지만 얼마 안 돼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를 거쳐 종신교수(테뉴어)가 됐다.

이 장관은 친화력도 좋은 편이다. KAIST 경영대학 교수 시절, 동료 교수보다는 학생들과 어울리며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KAIST에 다녔던 한 대학원생은 “KAIST 경영대는 학부가 없고 MBA 위주여서 연령대가 높은 편”이라며 “이 장관이 교수 시절 대학원생들과 교류하며 활발히 토론을 벌이는 스타일이었던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교수법도 남달랐다고 한다. 파워포인트를 이용한 프레젠테이션(PT)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이었지만 PT를 하지 않고 서술형 텍스트 자료를 즐겨 썼다고 한다. 이 장관은 KAIST 우수강의상을 두 번(2005·2007) 받고, 창의강의대상(2008), 학술상(2010),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송곡과학기술상(2008) 등을 수상하며 ‘스타 교수’가 됐다. 종신교수가 된 것도 이런 연구 결과 덕분이다. 이 장관이 종신교수직 심사를 받을 당시 해당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 12명에게 해당 교수에 대한 연구평판 질문을 보내는 일종의 글로벌 평판조회를 했는데, 이를 거뜬히 통과한 것이다.
미운털 박혀도 할 말은 한다…'합리성 신봉자' 산업부 장관
지난 대선에선 윤석열 대통령의 자문 역할을 했다. 한 관료는 “윤석열 대선캠프엔 몇몇 브레인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이창양 장관이 돋보일 때가 많았다”고 했다. 대선 후 이 장관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경제2분과 간사를 맡았다. 경제1분과 간사가 현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 2분과 간사가 이 장관이었다. 이후 이 장관은 윤석열 정부 초대 산업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산업부 내에서 이 장관의 신망은 두텁다. 직원들이 준비한 행사가 끝나면 지갑을 꺼내 애쓴 직원들을 챙겨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산업부 공무원은 “해외 출장을 가거나 국내 행사 후에 (이 장관이) 항상 ‘수고했다. 식사라도 하라’며 지갑을 꺼내곤 한다”고 했다.

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 외국 장관들과 만나서도 금방 친해진다고 한다. 산업부 한 관계자는 “국내에서도 친화력이 좋지만 외국인과 쉽게 친해지는 걸 보면서 더욱 놀랐다”며 “외국 생활 경험도 작용했겠으나 기본적으로 열려 있는 합리적 마인드가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는 편이다. 산업부 실무 공무원 시절엔 술을 꽤 많이 마셨지만 최근엔 저녁 자리에선 술을 거의 하지 않거나, 마시더라도 소주 2~3잔 분량을 마시는 정도다.

에너지정책 정상화가 최대 과제

이 장관은 ‘합리성’에 대해 강한 신념이 있다고 한다. 산업부 공무원, 경제학 박사, 경영대 교수, 기업 사외이사 이력이 그를 ‘합리성 신봉자’로 만들었다는 평가가 많다. 대표적인 게 전기요금 인상이다. 물가를 관리하는 기획재정부와 여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여당 사이에서 전기요금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정부 관계자는 “기재부가 물가를 이유로 전기요금 인상을 꺼릴 때 이 장관이 추경호 부총리를 만나 ‘이럴 거면 한전을 기재부가 가져가서 기획재정전력산업부로 하시라’고 말해 깜짝 놀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만큼 적극적으로 전기요금 인상을 요구한 것이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해 9월 21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과 회담한 뒤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산업부 제공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해 9월 21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과 회담한 뒤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산업부 제공
이 장관은 기재부, 여당과의 당정 협의에서 기자들이 나가고 회의가 비공개로 전환되면 한전채로 인한 채권시장 교란, 한전 재무부실에 따른 송전선로 투자 미흡, 이에 따른 산업 안정성 저하, 싼 전기요금으로 인한 잠재적 통상 분쟁 우려 등을 주장하며 전기요금 정상화 주장을 굽히지 않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여당 일각에선 ‘미운털’이 박혔다는 얘기도 들린다.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아 현안을 두고 이 장관과 마주하기를 부담스러워한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는 게 산업부 본연의 임무라는 게 이 장관의 소신이라고 한다. 이 장관은 국회에서도 “전기요금 동결은 한전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발언을 이어가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론 원전 정상화에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며 당선됐고, 원전 정상화가 윤석열 정부의 상징과도 같은데, 정작 산업부는 제 속도를 못 낸다는 시각이 적지 않은 것.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산업부 2차관을 전격 교체한 뒤 대통령실 강경성 산업정책비서관을 그 자리에 내려보낸 것도 이런 ‘경고성 메시지’라는 시각이 많다. 이에 따라 원전을 비롯한 에너지 정책 정상화가 이 장관의 최대 숙제 중 하나가 될 것이란 관측이 많다.

박한신 기자 p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