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관객들이 모인 공연장. 무대 뒤에서 한 발레리노가 심호흡을 하고 있습니다. 다소 긴장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결연한 표정으로 공연에 오를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무대로 뛰어나가 점프를 하는데요. 마치 우아한 백조 한 마리가 멋지게 비상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1)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영국 북부 작은 탄광촌에서 살던 11살 소년 빌리가 25살에 멋진 발레리노가 되어 공연을 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빌리는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 발레리노에 대한 선입견을 이겨내고 당당히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이죠. 영화는 이를 무대 위를 날아오르는 장면으로 표현해 관객들에게 짜릿한 전율과 큰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은 덕분에 동명의 뮤지컬도 만들어졌죠. 영화는 영국 로열발레단의 발레리노 필립 모슬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소년 빌리는 배우 제이미 벨이 연기했는데요. 마지막 장면에 나온 성인 빌리는 실제 로열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노였던 애덤 쿠퍼가 연기해 화제가 됐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음악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1893)가 만든 '백조의 호수'의 메인 테마곡 '정경'입니다. 고전 발레 음악의 정수로 꼽히는 곡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발레 음악이기도 하죠.
'백조의 호수'는 악마의 저주로 인해 낮에는 백조로 살고, 밤에는 공주로 살아가는 오데트 공주와 그를 사랑하는 지그프리드 왕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의 매니저였던 블라디미르 베기체프가 썼고, 차이콥스키가 의뢰를 받아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차이콥스키와 빌리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빌리처럼 차이콥스키도 러시아 광산촌 캄스코봇킨스크에서 태어났죠. 아버지도 광산 감독관이었습니다. 빌리의 아버지가 발레리노 꿈을 반대했듯, 차이콥스키의 아버지 또한 그가 음악가 아니라 법조인이 되길 원했습니다. 또 빌리가 뛰어난 발레리노가 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것처럼, 차이콥스키도 굴곡진 삶을 살았습니다.
차이콥스키가 처음으로 발레 음악에 도전했던 ‘백조의 호수’의 초연도 크게 실패했습니다. 음악이 이상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음악이 좋아서 문제가 됐습니다. 음악이 발레의 보조 수단에 그쳐야 하는데, 전면에 부각됐다는 게 혹평의 이유였죠. 차이콥스키는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작품이 실패하자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시는 발레 음악을 작곡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이후 마음을 바꿨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발레 음악을 잇달아 만들었죠. 큰 실패에도 다시 의지를 갖고 꾸준히 작업한 덕분일까요. 그의 사후 '백조의 호수'도 재평가를 받게 됐고,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백조의 호수'는 다양한 버전으로 각색되기도 했는데요. 그중 영국 출신의 안무가 매튜 본이 1995년 초연했던 '백조의 호수'가 유명합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빌리가 보여주는 무대도 매튜 본이 만든 버전입니다. 그가 재창조한 '백조의 호수'는 현대 무용계의 최고 인기작으로 꼽힙니다. 미국 브로드웨이와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열풍을 만들어내며 토니상, 로렌스 올리비에상 등을 휩쓸었죠.
그 비결은 파격적인 시도에 있습니다. '발레'하면 가냘픈 여성 발레리나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이 작품에선 근육질의 남성 무용수들이 무대에 오릅니다. 내용도 원작과 많이 다릅니다. 이 작품에서 오데트는 왕자의 사랑만 기다리는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약한 성격으로 방황을 거듭하던 지그프리드 왕자가 뜨겁게 갈구하는 열망의 대상이 됩니다.
영화에서 성인 빌리가 공연에서 맡은 역할도 오데트 역입니다. 빌리가 힘차게 비상하는 장면은 강인한 백조의 모습을 고스란히 표현한겁니다.
오데트 역을 발레리노가 맡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작품엔 동성애적 코드가 담겼는데요. 차이콥스키 또한 동성애자였습니다. 그는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사회적 인식과 시선에 시달리며 괴로워했습니다. 이성과 결혼을 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이혼했죠. 계속된 실패와 차가운 사회적 시선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끝까지 창작혼을 불태운 차이콥스키. 어려운 사정과 주위의 반대에도 발레리노의 꿈을 키워나간 빌리. 음악과 영화 속에 담긴 이들의 이야기는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음악과 영화를 사랑하고 끊임없이 감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명작은 오늘을 살아가고 버텨나갈 동력이 되어줍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