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히고 휘어지고…디지털 시대 성큼 앞당긴 '유리의 변신'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투명하고 빛나는 물질인 유리. 유리가 디지털 시대를 성큼 앞당기는 핵심 소재로 떠오르고 있다. 가변성이 뛰어난 유리에 신기술을 접목해 접히고 휘어지는 속성을 구현하면서 나타난 변화다. 전통적 소재인 유리가 생활 가전, 통신, 건축, 에너지 등 산업 분야 곳곳에서 시장 판도를 흔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 유리

접히고 휘어지고…디지털 시대 성큼 앞당긴 '유리의 변신'
인류가 유리 제조 기술을 언제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에서 처음 사용된 뒤 전 세계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한다. 유리는 신비로우면서 아름다운 빛을 낸다는 이유로, 오랜 시간 특정 계층의 귀중품으로 사용됐다.

중세 시대에는 가톨릭 성당의 창을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활용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3세기에 안경이 발명되고 15세기 들어 인쇄술의 발달로 안경 수요가 함께 증가하면서 안경 제조 기술도 발전했다. 일반인도 유리 안경을 쓰게 되면서 유럽 과학의 발전에 속도가 붙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망원경과 현미경이 연이어 발명되면서 과학적 용도로 그 쓰임새가 확장됐다. 멀리 있는 것을 가깝게, 가까운 것을 더 자세하게 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평가도 있다.

유리가 실생활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다. 판유리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유리의 저변이 넓어졌다. 내열유리, 강화유리, 안전유리와 같은 특수 목적의 유리가 등장한 것도 이때다. 한정된 건물에만 사용되던 유리창이 대중화되자, 실내에서도 자연광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자동차 앞과 뒤에 유리가 사용되면서는 자동차 편의성과 안전성을 높였다. 초기 자동차에는 윈드실드가 없어 운전용 고글을 써야 했다. 토머스 에디슨의 발명품인 백열전구 역시 이를 감싸는 유리구가 있어 대중화를 앞당긴 것으로 전해진다.
접히고 휘어지고…디지털 시대 성큼 앞당긴 '유리의 변신'

○정보화 시대 개막과 유리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특수유리의 쓰임새는 더욱 확장됐다. 초고속 통신망의 근간이 된 광섬유가 머리카락 굵기보다 가는 고순도 유리섬유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터넷과 광대역 연결망은 전력망만큼이나 촘촘하게 연결돼 있어 전 세계 사람들의 소통 방식을 변화시켰다. 그 변화 속도는 코로나19를 겪으며 가속화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증강현실, 자율주행, 사물인터넷을 포함한 소비자 트렌드 및 기술 혁신은 더욱 높은 속도와 대역폭을 지원하는 광대역망이 요구된다. 이는 고순도 유리를 기반으로 한 광통신 기술로만 구현할 수 있다.

TV, 모니터, 노트북 등 디스플레이 제품에 사용되는 핵심 부품을 논할 때도 유리를 빼놓을 수 없다. 기판유리는 액정에 신호를 전달할 수 있는 박막회로가 그려지는 원판과 다양한 색상을 볼 수 있게 빛을 투과할 수 있는 컬러필터 등으로 나뉜다. 더욱 생생하고 몰입감 높은 디스플레이 구현에도 유리가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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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는 미래 디스플레이 혁신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특히 특수유리의 존재감이 더욱 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스마트윈도, 투명 디스플레이 및 3차원(3D) 디스플레이 등 디스플레이의 확장성이 커지고 있어서다.

하루에도 수백~수천 번을 터치하고, 잠드는 그 순간까지 함께하는 현대인의 필수품 스마트폰에도 특수유리는 핵심 부품으로 사용된다. 커버 유리는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스크래치와 충격으로부터 스마트폰을 보호해준다. 커버글라스의 대명사인 ‘고릴라글라스’는 2007년 출시 이후 현재까지 약 80억 대 기기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모바일·차량용 디스플레이 등으로 유리 수요 확산…기업들 신기술 개발 잇단 투자
유리는 응용법 따라 특성·성능 다양…코닝, 유리 기판 등 R&D 투자 활발

접히고 휘어지고…디지털 시대 성큼 앞당긴 '유리의 변신'
유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모래의 주성분 실리카(이산화규소)가 주재료다. 규소는 지구에서 산소 다음으로 풍부한 물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리는 규소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규소에 다양한 원소와 비율을 조합해 무수히 많은 유리 조성을 개발했다.

유리의 수천 년 역사 중 과학적 접근 방법을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350여 년에 불과하다. 그만큼 유리의 소재로서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유리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주기율표의 다양한 원소와 실리카를 결합해 거의 무한대의 새로운 유리 조성을 만들 수 있다. 응용 방법에 따라 유리의 특성 및 성능도 달라진다.

올해는 유엔이 지정한 ‘세계 유리의 해’다. 유엔은 인류의 삶에 영향력을 미친 기술 소재를 매년 지정해 이를 기념하고 있는데, 유리도 그 대열에 올랐다. 코닝 관계자는 “유리가 인류의 삶에 미친 지대한 영향력과 공로가 인정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접히고 휘어지고…디지털 시대 성큼 앞당긴 '유리의 변신'
유리의 해를 맞아 관련 기술에 투자하는 기업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미국 유리 제조·가공업체 코닝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회사는 해마다 평균 매출의 8%를 디스플레이 분야 등에 투자하고 있다.

유리 기판의 주요 무대는 모바일, TV에서 차량용 디스플레이로도 확장하는 모양새다. 벤츠 신형 전기차 EQS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하이퍼스크린에 코닝의 커버 유리 제품이 적용된 게 대표적이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첨단 미래형 제품을 선보이려면 유리 기판 개발과 공정 개선이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삼성전자가 코닝과 기술 협력을 통해 유리 소재 분야 경쟁력을 높인 덕분에 휘어지거나 접히는 스마트폰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화 유리(고릴라글라스)와 플렉시블(휘는) 유리, 광섬유 등 기술 개발이 진전을 보이면 또 다른 신제품이 나올 수 있다고 업계에선 보고 있다.

코닝뿐 아니라 주요 경쟁사인 일본 아사히글라스, 닛폰일렉트릭글라스(NEG) 등은 LCD(액정표시장치)에서 OLED 분야로 사업 영역 확대를 위해 새로운 기판 유리 개발에 힘을 쏟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양한 소재와 가스를 증착, 코팅하는 방법으로 유리 기판 내구성을 강화하고 있다.

정지은 기자/도움말=코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