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 칼럼] 디스플레이특별법은 왜 안 만드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장비업체 A사에는 중국 디스플레이 제조 업체의 러브콜이 쏟아진다. 기술 합작으로 중국에서 제품을 생산하자는 것이다. 중국 정부가 현지에서 만든 장비·부품을 쓰는 자국 디스플레이 업체에 더 많은 보조금을 주고 있어서다. A사 관계자는 “경영난을 겪는 업체들은 쉽게 중국의 유혹에 넘어갈 것”이라며 “국내 생산 장비와 부품을 사용할 때 세제 혜택이나 보조금을 주는 방안을 서둘러 마련하지 않으면 OLED 생태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글로벌 반도체·배터리 패권 전쟁 와중에 또 하나의 미래 먹거리인 OLED 산업에 비상등이 켜졌다. 시장조사기관 옴디아에 따르면 글로벌 중소형 OLED(스마트폰용) 시장 점유율이 2019년 한국 90.3%·중국 9.7%였지만, 올해는 한국 72%·중국 27%로 격차가 좁혀질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중국이 2024년 중소형 OLED 분야에서 세계 1위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막대한 정부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등에 업은 중국 업체들은 TV용 대형 OLED도 조만간 양산에 나설 태세다.

다자간 경쟁 체제인 반도체·배터리와 달리 디스플레이는 한·중 양자 대결 구도여서 물러설 곳이 없다. 중국이 공급망을 장악하면 전방산업인 IT(정보기술)·가전까지 위태로워진다. 지난해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 수출액은 약 214억달러에 달했다.

2004년 종주국 일본을 제치고 디스플레이 산업 세계 1위에 오른 한국은 17년간 지켜온 선두 자리를 지난해 중국에 빼앗겼다. 저가 물량 공세로 액정표시장치(LCD) 시장을 집어삼킨 중국 업체들은 OLED 공략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애플에 아이폰14용 OLED 패널 공급을 시작한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업체 BOE는 지난 5월 미국의 한 전시회에서 95인치 TV용 OLED 패널을 선보였다. CSOT(차이나스타), 톈마, 비전옥스 등도 증설에 나서며 OLED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BOE와 비전옥스는 지난 2월 저온다결정산화물 박막트랜지스터 기술을 접목한 OLED 패널 양산에 들어가 LG·삼성디스플레이와의 기술 격차가 사라졌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중국 업체의 기술 및 설비 투자에 가속도가 붙은 데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큰 몫을 했다. 중국 정부는 ‘인프라 구축-설비투자-패널 생산-판매’의 전 단계에 걸쳐 디스플레이 산업을 전방위로 지원한다. 한국 업체들이 확보에 애를 먹는 토지와 용수, 전기 등은 무상 지원한다. 중국 업체들은 설비투자 비용도 대부분 정부 보조금으로 해결한다. 중국 정부는 생산 목표·수율 달성 때 격려금을 지급하는 것은 물론 적자가 나면 보조금으로 메워준다. BOE는 2016년부터 5년간 1조6000억원, CSOT는 9200억원의 적자 보조금을 받았다.

중국과 달리 한국에선 디스플레이 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이 사실상 전무하다. LG디스플레이가 2019년 1조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냈을 때 어떤 지원도 없었다. 반도체·배터리와 비교하면 OLED 등 디스플레이는 찬밥 신세다. 지난달 시행된 반도체특별법(국가첨단전략산업법)의 지원 대상에 반도체, 2차전지, 바이오는 들어갔지만, 디스플레이는 빠진 것만 봐도 그렇다. 디스플레이는 조세특례제한법상 국가전략기술에도 포함되지 않아 업계에서 홀대론과 함께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중국이 무섭게 쫓아오는데도 정부와 정치권의 위기의식은 실종된 상태라는 게 더 큰 문제다. 중국은 글로벌 LCD 시장에서 10년 걸렸던 점유율 10%를 OLED 분야에서는 6년 만에 달성했다. 대규모 장치 산업인 디스플레이는 선제적인 투자로 승부가 갈린다. 기업의 신규 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연구개발(R&D)과 설비투자, 인력 양성 등에 파격적인 지원을 담은 ‘디스플레이특별법’ 같은 지원책 마련이 시급한 이유다. 그래야 OLED가 LCD의 전철을 밟는 일을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