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서울 서초동의 한 골프채 매장. 신제품 클럽을 둘러보는 동안 점원이 슬며시 다가왔다. “괜찮은 중고채 매물이 여럿 나왔는데 한 번 보겠느냐”는 것. 그의 손에는 T사의 T200 아이언이 들려 있었다. 중고 시장에서 120만~140만원에 거래되는 고가 제품으로, 지금 당장 주문해도 두 달은 기다려야 손에 쥘 수 있는 인기 브랜드다. 그는 그러나 “80만원만 달라”고 깜짝 에누리를 제안했다. 맨눈으로 봐서는 멀쩡한 클럽. 하지만 하자가 있는 ‘침수 골프채’였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난 8일 기록적인 폭우로 물에 잠긴 침수 골프채들이 중고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중고 상인들은 침수 골프채를 세척해 정상 골프채로 판매하고 있다. 골프채는 통째로 물에 잠기면 그립 끝부분에 있는 작은 공기 구멍으로 물이 들어가 골프채 내부가 손상된다.

서울 강남, 관악, 서초구 일대 중고 골프채 매장 10곳을 업계 전문가와 둘러본 결과 일부 매장에서 침수 중고채를 정상 중고채로 판매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시중가보다 저렴하게 나왔다는 클럽의 그립을 교체하기 위해 끝부분을 뒤집어 보니 침수된 흔적(진흙)이 발견됐다. 가죽으로 된 그립에는 미처 없애지 못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진흙을 닦아내고 물기를 말린 골프채는 겉으로 보기에 깨끗하지만 샤프트 내부는 녹이 슬어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클럽 헤드와 샤프트를 이어주는 페럴 내부에 도포된 접착제(에폭시)도 산화된다. 동행한 골프용품 전문가는 “침수차도 속이고 판매하는 마당에 침수 골프채는 정보도 없어 수많은 피해자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티샷 했는데 헤드가 뚝"…'침수 골프채' 주의보 [영상]
온라인 골프용품 시장 상황도 비슷하다. 골마켓, 당근마켓 등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도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침수채가 매물로 올라와 있다. 온라인 거래 특성상 침수 여부를 확인하기 쉽지 않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지난 20일 침수 골프채를 구매할 뻔했다는 문모씨(48)는 “드라이버 헤드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판매자를 추궁했더니 침수 사실을 실토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침수 골프채는 안전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며 세심한 주의를 당부했다. 웬만한 남성 아마추어 골퍼는 시속 100㎞ 이상 속도로 강하게 공을 때리는데 이때 충격으로 샤프트가 부러지거나 헤드가 분리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립 끝부분을 손으로 뒤집어봤을 때 오염물질이 발견되면 침수를 의심해봐야 한다.
그립 끝부분을 손으로 뒤집어봤을 때 오염물질이 발견되면 침수를 의심해봐야 한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중고 골프채를 구매할 때 침수 여부를 꼭 확인할 것을 주문했다. 골프용품 연구개발회사를 운영하는 박모씨(43)는 “그립 끝을 살짝 뒤집었을 때 흙이 묻어나오는지 확인할 수 있다”며 “최근에 나오는 중고 골프채 중 특이하게 싼 클럽은 한 번쯤 의심해 보는 게 좋다”고 말했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