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술은 지기를 만나면
천 잔도 부족하고
말은 뜻이 안 맞으면
반 마디도 많다네.

酒逢知己千杯少
話不投機半句多.

*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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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아침 시편] 마음 맞는 사람과는 천 잔도 부족하고…
“살다 보면 어떤 걸 외우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것보다는 애초에 잘못된 걸 기억하고 있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더 많아요.”

한시에 조예가 깊은 한 시인의 말입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젊은 시절에 듣고 너무 좋아서 오랫동안 애송해온 시구 얘기더군요. ‘술자리서 지기 만나면 천 잔도 부족하고/ 의기가 맞지 않는다면 반 마디 말도 많네(酒逢知己千杯少 意氣不和半句多)’라는 멋진 구절이 구양수(歐陽修, 1007~1072)의 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구양수 전집에는 이런 내용 없어

“30여 년이 흐른 뒤 우연히 출처를 찾아보았더니 세상에나! 구양수시문집은 물론 ‘사고전서(四庫全書)’ 어디에도 없어요. 인터넷이 되지 않던 시절이라 검색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기억으로만 여러 자리에서 인용하곤 했는데 원문이 보이지 않다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찾아본 결과 구양수의 시 ‘봄날 서호에서 사법조에게 부치는 노래(春日西湖寄謝法曹韻)’에 후세 사람이 덧붙인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내용인즉, 시 중간의 ‘저기 호숫가에 한 동이 술이 있으니/ 만 리 밖 하늘 끝 사람을 떠올리노라(遙知湖上一樽酒 能憶天涯萬里人)’는 구절을 한 번 더 반복하면서 그 앞에다 ‘술은 지기를 만나면 천 잔도 부족하고/ 말은 뜻이 안 맞으면 반 마디도 많다네(酒逢知己千杯少 話不投機半句多)’라는 구절을 집어넣었다는 것이지요.
이 구절에 ‘후인수개판(後人修改版)’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는데, 구양수시문집의 원판(原版)에 없는 후세인의 추가분이라는 뜻이죠.

결국 이 멋진 시구는 구양수 원작이 아니었던 겁니다. 게다가 젊은 날 외웠던 ‘의기가 맞지 않는다면(意氣不和)’은 어디에도 없는 구절이었지요. ‘말은 뜻이 안 맞으면(話不投機)’이라는 구절을 우리나라 사람 누군가가 또 한 번 비틀어서 변형한 것입니다.

‘명심보감’에도 비슷한 구절이…

그 얘기를 듣고 보니 궁금증이 더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도 검색에 나섰지요. 구양수보다 300여 년 뒤에 활동한 원나라 말기 시인 겸 극작가 고명(高明)의 희곡 ‘비파기(琵琶記)’에서 비슷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술잔 배(杯)’가 ‘술병 종(鍾)’으로 바뀐 정도인데, 오래 전승된 민간의 속담이 그의 손에 의해 극본에 녹아든 모양입니다.

하긴 지금도 중국 사람들이 오랜 벗을 만나 술잔을 기울일 때 흔히 입에 올리는 속담이 바로 ‘지우펑즈지 첸베이샤오(酒逢知己千杯少)’이고, 이에 ‘화뿌터우지 빤쥐둬(話不投機半句多)’가 뒤따르는 걸 보면 먼 옛날부터 입으로 전해온 명구임엔 틀림없습니다.

우리의 옛 어린이 학습서인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비슷한 구절이 보이는군요. 여기에도 ‘술병 종(鍾)’이 쓰였습니다. ‘명심보감’은 고려 문신 추적(秋適, 1246~1317)이 1305년에 중국 고전의 금언·명구를 발췌·편집한 책이죠. 송나라 구양수보다는 후대이고 원나라 고명보다는 조금 앞선 시기이니, 구양수 시에 붙은 추가분을 뽑아 넣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후대의 숱한 증보 과정에서 포함됐을 수도 있지만요.

아무튼 오늘같이 좋은 날, 그리운 벗들은 어디에서 천 잔 술을 기울이고 있을까요? 아니면 천 마디 수다 끝에 만 리 밖 고운 님을 떠올리고 있을까요?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