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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두현 기자
    고두현 기자 편집국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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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사랑 연인과 이별한 김소월은… [고두현의 아침 시편]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김소월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그림자 같은 벗 하나이 내게 있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쓸데없는 괴로움으로만 보내었겠습니까!오늘은 또 다시, 당신의 가슴속, 속모를 곳을울면서 나는 휘저어 버리고 떠납니다 그려.허수한 맘, 둘 곳 없는 심사에 쓰라린 가슴은그것이 사랑, 사랑이던 줄이 아니도 잊힙니다.* 김소월(1902~1934): 평북 구성 태생.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시집 <진달래꽃>.오는 9월 8일은 시인 김소월이 탄생한 지 120년이 되는 날입니다.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가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에서 첫울음을 터뜨린 날이지요. 소월의 고향은 봄마다 산꽃이 지천으로 피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옥녀봉에서 만나 풀피리 불던 소녀할아버지가 개설한 독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한 그는 곧 남산소학교에 입학했지요. 같은 반 동네 소녀 오순과 친하게 된 뒤로는 옥녀봉 냉천터에서 자주 만나곤 했습니다. 바위에 올라 함께 피리를 불거나 노래를 불렀고, 숲 사이의 시냇가를 거닐기도 했죠. 어릴 때의 이런 추억은 훗날 ‘풀따기’라는 시에도 잘 묘사돼 있습니다.“우리 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 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져요.”(일부 발췌)오순은 의붓어미 밑에서 자랐는데 집이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 아래로 동생이 다섯 명이나 있었으니 더욱 궁핍했죠. 소월이 숙모에게 들은 전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시 ‘접동새’의 주인공과 비슷한 처지였다고

    2024.07.22 10:00
  • 사후 46년 만에 등단한 문학청년 남정국 [고두현의 아침 시편]

    독백체 7 -불새를 꿈꾸며                                       남정국아니다, 순아그게 아니라 나는 불새가 되고 싶은 거다활활 타며 날아가는 새, 아니면 불같이 붉은 새온몸으로 허물어지는 새허물어져서 자신을 이루는 새그리하여 어떤 코뮤니스트의 깃발보다도 더욱더욱 붉게나는 괴로워하고 싶은 것이다피를 흘리고 싶은 것이다자유롭고 싶은 것이다.아니다, 순아정말 그것이 아니라나는 불새가 되고 싶은 것이다빠알갛게 달아오른 아침 해 속에서푸더덕거리며 잠을 깨는 새, 꿈틀대는 힘을그침 없는 울음으로 뱉아내는 새아주아주 뜨거운 새.춥구나, 도와다오아름다운 불새를 꿈꾸며하루를 버리고 이틀을 버려도비켜 가는 것뿐인데도와다오나는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순아내가 너의 볼을 만지면그 볼의 온기만큼만, 그만큼만 순아.-----------------------------------------문학청년 남정국(南正國)이 고려대학교 1학년 때인 1978년 9월에 쓴 시입니다. 1958년 12월 21일생이니 만 19세 때였지요. 두 달 뒤인 11월 4일, 그는 경기도 대성리 북한강에서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만 20년의 삶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에 빠진 벗들을 모두 구하고 차가운 강 밑으로 사라진 그를 1주일간의 수색 끝에 발견했다고 합니다.그가 남긴 시편들은 이듬해 친구들에 의해 소박한 문집으로 묶였습니다. 그러나 어수선한 시국 속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반세기 가까이 잊혔던 그의 작품들이 최근 유고 시집 『불을 느낀다』(엠엔북스)로 되살아났습니다.이 시집에는 새로 발견한 시 한 편을 포함한 27편의 시와 생전의 일기, 초고,

    2024.07.18 21:06
  • 하늘처럼 큰 눈 가진 이가 있다면… [고두현의 아침 시편]

    산에서 보는 달(蔽月山房詩)왕양명산이 가깝고 달이 먼지라 달이 작게 느껴져사람들은 산이 달보다 크다 말하네.만일 하늘처럼 큰 눈 가진 이가 있다면산이 작고 달이 더 큰 것을 볼 수 있을 텐데.山近月遠覺月小, 便道此山大於月.若人有眼大如天, 還見山小月更闊.* 왕양명(王陽明, 1472~1529): 명나라 시인.명나라 시인 왕양명이 열한 살 때 지었다는 시입니다. 자연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마음의 풍경이 달라지는 것을 절묘하게 표현했지요? 단순한 원근법을 넘어 우주의 근본 이치를 꿰뚫는 혜안이 놀랍습니다.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얘기한 게 1543년이고, 갈릴레이가 이를 확인한 것이 1632년인데, 1483년에 10대 소년이 이런 시를 썼으니 천재가 아닐 수 없지요. 세상을 하늘처럼 큰 눈으로 보려는 시각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한시 원문 제목에 나오는 폐월산방(蔽月山房)은 절강성 금산(金山) 위에 있던 승방이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는군요.왕양명은 그의 호(號), 본명은 수인(守仁)입니다.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말이 트이지 않아 부모의 애를 태우다가 이름을 수인으로 바꾸자 말문이 터졌다고 해요. 이후 워낙 총명해서 아버지가 개인 교사를 붙여줬습니다.하루는 “천하에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이냐”라는 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눴는데, “과거에 급제하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선생의 말에 어린 양명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학문을 하여 성현이 되는 것이 천하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이렇게 조숙했던 그는 14세 때 이미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우고 병서를 읽었지요. 15세에는 집을 떠

    2024.07.15 10:00
  • 우리 사랑은 늘어나는 금박처럼 [고두현의 아침 시편]

        이별의 말      —슬퍼하지 말기를                          존 던덕 있는 사람들이 온화하게 세상 뜨며,자신의 영혼에게 가자고, 속삭이고,그러는 동안 슬퍼하는 친구 몇몇이이제 운명하나 보다, 혹은 아니라고 말할 때처럼,그처럼 우리도 자연스럽게, 소란스럽지 않게,눈물의 홍수도, 한숨의 폭풍도 보이지 맙시다,속인(俗人)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말하는 건우리의 기쁨을 모독하는 것일 테니.지진은 재해와 공포를 초래하니,사람들은 그 피해가 어떤 것인지 압니다.그러나 천체의 움직임은,훨씬 클지라도,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따분한 지상의 연인들이 나누는 사랑은(그 정수가 감각이기에) 서로의 부재를용납할 수 없나니, 부재는 사랑을 이루는감각들을 지우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우리는, 지순한 사랑으로,부재가 무언지도 모를 정도로,서로의 마음을 확실히 믿고 있기에,눈, 입술, 손이 없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우리의 두 영혼은, 하나이기에,내가 떠난다 하더라도, 그건 다만끊기는 게 아니라, 늘어나는 것일 뿐입니다,공기마냥 얇게 펴진 금박(金箔)처럼. (이하 줄임)----------------------------------- 영영 이별이 아니라 잠깐 이별을 노래한 사랑 시입니다. 영국 시인 존 던(1572~1631)의 연애 시 중 한 편이지요.  존 던은 런던의 철물 상인과 극작가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법을 공부한 뒤 에식스 백작을 따라 스페인 원정에 두 차례 종군했고, 귀국 후 국새(國璽) 담당관인 에저튼 경의 비서가 됐습니다. 비서로 일하는 동안 그는 에저튼 경의 조카인 앤 모어와 사랑에 빠졌습

    2024.07.12 00:18
  • 귀는 왜 두 개일까…다섯 가지 숨은 이유[고두현의 문화살롱]

    카슨 매컬러스 소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의 주인공은 귀먹은 청년이다. 갑작스레 친구를 잃고 동네 카페에서 외롭게 시간을 보내는 그의 곁으로 몇몇 사람이 모이기 시작한다. 남모를 비밀 때문에 아내와 소원해진 카페 주인, 떠돌이 급진주의자, 음악으로 탈출구를 찾으려는 소녀, 인권을 생각하는 흑인 의사. 이들은 서서히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는 입술 모양을 열심히 읽으며 얘기를 들어준다. 그러나 눈만 껌벅일 뿐 뭐라고 대꾸를 해줄 수 없다.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원 위치 찾는 '양이(兩耳)효과'청각은 오감 중에서 가장 민감한 감각이다. 시각보다 빠르고 섬세하다. 우리 뇌는 시각 정보 변화를 초당 15~25회 정도 인지하지만, 청각 정보 변화는 초당 200회 이상 감지할 수 있다. 청각은 잠자는 중에 깨어 있고, 죽을 때도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다. 외부 음파를 모으는 귓바퀴는 포유동물에게만 있다. 귓바퀴 모양은 사람마다 달라서 ‘제2의 지문’ ‘이문(耳紋)’이라고 부른다. 여권 사진 찍을 때 귀를 드러내도록 하는 게 이런 연유다. 그런데 귀는 왜 두 개일까. 좌우 양 끝에 떨어져 있는 이유는 뭘까. 생물학적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먼저 소리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양쪽 귀가 필요하다. 방향감각은 생존과 직결된다. 위험 신호를 듣고 반사적으로 방향을 알아채야 한다. 양쪽 귀 사이의 거리는 17㎝ 안팎. 소리가 각각의 귀에 도달하는 시간과 세기가 다르다. 올빼미 실험에서도 100만분의 1초 차이로 음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 귀로 들으면 강약만 파악할 뿐 방향을 찾기 어렵다. 음의 세기와 도달시간 차

    2024.07.09 17:12
  • 양반들의 존경을 받은 '노비 시인' 정초부 [고두현의 아침 시편]

    산새는 얼굴을 알건만정초부산새는 옛날부터 산 사람 얼굴을 알고 있건만관아의 호적에는 아예들 늙은이 이름이 빠졌구나.큰 창고에 쌓인 쌀 한 톨도 얻기 어려워강가 누각에 홀로 기대어 저녁밥 짓는 연기만 바라보네.山禽舊識山人面, 郡藉今無野老名.一粒難分太倉粟, 江樓獨倚暮烟生.* 정초부(1714~1789) : 조선 후기의 노비 출신 시인.정초부(鄭樵夫)는 조선 정조 때 사람입니다. 초부란 나무꾼을 뜻하니 ‘정씨 나무꾼’이죠. 최하층 신분입니다. 지금의 양평 지역에 있는 여씨 집안의 가노(家奴)였지요.그런 노비가 어떻게 한시를 지을 줄 알았을까요. 운율과 성조, 기승전결을 두루 맞추기 위해서는 10년 이상 공부하며 내공을 익혀야 합니다. 10개가 넘는 규칙을 지키면서 문학성까지 발휘해야 하니 양반들에게도 쉬운 작업이 아니었죠.노비 신분 벗어난 뒤에도 쌀이 없어정초부는 어릴 때부터 낮에는 나무하고 밤엔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주인이 낭독하는 글을 듣고 바로 외워버릴 정도로 재주가 남달랐죠. 그런 그를 주인이 기특하게 여겨 자제들과 함께 글을 읽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학업 성취가 매우 빨랐고, 곧 시 잘 짓는 나무꾼으로 경기 일대에 명성이 자자해졌지요.그는 특히 과거시험에 쓰이는 과시(科詩)를 잘 지었습니다. 주인집 자제들이 과거에 급제하도록 도와주기까지 했죠. 이 덕분에 노비에서 벗어나 양인으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그는 지식을 뽐내는 것보다 정감이 넘치는 시를 많이 지었어요. 하층민이라고 해서 독설과 비판이 담겨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속으로 익히고 견디는 자세가 돋보인다는 평을 들었습니다.하지만 양인이 된 후로도 전처럼 나무를 해야

    2024.07.08 10:01
  • 남해 금산산장에서 보낸 며칠 [고두현의 아침 시편]

    오목고두현금산산장 노할머니일흔여덟,바둑판 같은 생 펼치고오목을 놓으시네.가고 싶은 길 참 많았제,못 가는 길 더 많았지만.서울서 내려온 딸이어머니, 그쪽은 절벽이에요오냐 그러면 이렇게 놓제.길은 미끄럽기도 하고 굽어졌다 펴지기도하면서 바둑판을 몇 굽이째 도는데세상의 모든 길이 흑 아니면 백,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 따라바둑돌은 저희끼리 잘그락거리며몸을 부딪네.밖에는 먼 길 가는 산꿩들다섯 발자국씩총, 총, 총, 총, 총점을 찍고노할머니 딸네 둘이첩첩 산 골짜기마다오 촉짜리 등불을 켜 다네.----------------------------------남해 금산 꼭대기에 산장이 하나 있습니다. 지은 지 100년도 넘은 금산산장입니다. 보리암에서 산길로 5분 정도 거리에 있지요.오래전 그곳에서 혼자 1주일을 지낼 수 있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번잡한 도시를 떠나 한적한 산장에서 며칠 동안 자기 시간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당일치기 등산이나 하룻밤 자는 둥 마는 둥 쫓기듯 내려오는 산행과는 애초부터 격이 다른 체험이었습니다. 여태까지 몰랐던 숲속 나무들의 체온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맑은 물을 떠 청량하게 세수하는 기분 또한 묘미였지요.산장에서 이틀째를 맞은 날, 저녁을 먹고 일어나는데 여든이 다 되어가는 주인 할머니가 바둑판을 펼칩니다. 아니 웬 바둑? 의아하게 바라보았더니 옆에 있던 환갑 나이의 딸이 바둑통을 챙기며 대답합니다. “자꾸 정신이 흐려진다고 해서…. 오목을 두면 그나마 머리를 쓰게 되고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해서요.”노할머니와 환갑에 가까운 딸네가 마주 앉아 밤늦도록 오목을 두는 모습이라니! 저도 곁에 앉아 한참을 구경했습니다. 두 사

    2024.07.04 17:12
  • 될성부른 나무는 '부름켜'부터 다르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나무나무보다 아름다운 시를내 다시 보지 못하리.허기진 입을 대지의 달콤한 젖가슴깊숙이 묻고 있는 나무온종일 앞에 덮인 두 팔을 들어 올린 채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나무그 가슴에 눈이 내리면 쉬었다 가게 하고비가 오면 다정히 말을 건네주는 나무시는 나 같은 바보들이 만들지만나무는 하나님만이 만들 수 있다네* 조이스 킬머(1886~1918): 미국 시인나뭇가지는 하늘을 향한 고성능 안테나다. 두 팔을 힘껏 벌리고 섬세한 촉수로 지혜의 빛을 잡아낸다. 광합성 과정에서 새로운 영감을 포착하면 푸른 잎사귀를 차르르 흔든다. 그럴 때 나무의 두 발은 더 깊은 땅속으로 뿌리를 뻗는다.대지에 발을 딛고 서 우주로 팔을 벌린 형상이 곧 나무[木]다. 그 밑동에 ‘한 일(一)’ 자를 받치면 세상의 근본[本]이 된다. 나무는 이렇게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상과 천상을 연결한다.나무는 뛰어난 인재(人材)를 의미한다. 목조건축이나 기구를 만드는 데 쓰는 나무를 재목(材木)이라고 한다. 이 또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거나 어떤 직위에 합당한 인물’을 가리킨다. 예부터 될성부른 떡잎과 들보로 쓸 만한 동량(棟梁)을 나무에 비유했다. 떡잎부터 나이테까지 결정짓는 ‘부름켜 경영’나무가 가장 바쁜 시기는 봄부터 초여름까지다. 날마다 새순을 밀어 올리느라 쉴 틈이 없다. 줄기를 살찌우며 몸집을 키우는 것도 이때다. 새로운 세포로 줄기나 뿌리를 굵게 만드는 식물의 부위를 ‘부름켜’라고 한다. 불어나다의 어간인 ‘붇’과 명사형 ‘음’, 층을 뜻하는 ‘켜’가 합쳐진 순우리말이다. 형성층(形成層, cambium)이라고도 한다.부름켜는

    2024.07.01 10:00
  • 그대 붉은 입술을 깨물었으니, 묻지 마라 [고두현의 아침 시편]

       모두 다 꽃                               하피즈장미는 어떻게 심장을 열어자신의 모든 아름다움을 세상에 내주었을까?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비추는빛의 격려 때문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는언제까지나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얼마 전 소개한 이란 시인 루미에 이어 이번에는 하피즈의 시를 들려드립니다. 14세기에 태어난 하피즈는 2행으로 된 연작 형식의 사랑시 ‘가잘’을 워낙 잘 써서 ‘이란의 시성(詩聖)’으로 칭송받는 시인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석탄 사업 실패로 막대한 부채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지요. 어릴 때 아버지가 외우던 코란을 귀동냥으로만 듣고 모두 암기했는데, 그의 필명 하피즈가 ‘코란을 모두 외운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주로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대부분이 연인이나 신에게 바치는 연시 형식을 띠고 있지요. 신앙을 사랑에 빗대어 표현한 게 많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내용도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국민 시인’으로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그의 시는 서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괴테가 그의 독일어 번역판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서동시집(西東詩集)>을 펴낼 정도였지요. 영국 시인 바이런과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 독일 철학자 니체도 그의 시를 좋아했습니다. 니체는 ‘하피즈에게’라는 시까지 썼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시 ‘모두 다 꽃’은 우선 장미의 아

    2024.06.27 18:27
  • 내 고장 유월은 비파가 익어가는 시절…[고두현의 문화살롱]

    남녘에서 아주 특별한 소포가 왔다. 초여름 햇볕에 잘 익은 황금빛 열매, 남해안 일대에서만 나는 아열대 과일 비파(枇杷). 경남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에 있는 김달진 시인의 생가에서 천 리 길을 달려왔다. 김달진문학관 바로 옆 생가 마당의 비파나무는 해마다 살구 크기만 한 ‘황금 열매’를 조랑조랑 맺는다. 비파는 가을에 꽃망울을 밀어 올리고, 겨울에 꽃을 피우며, 봄에 열매를 매달고, 여름에 노랗게 익는다. 사계절 기운을 두루 갖춘 덕분인지 향이 좋고 맛도 달다.  중국·일본 사신 갔다가 반한 맛비파에 얽힌 사연도 갖가지다. 생태학적 특징부터 인문학적 이야기까지 다채롭기 그지없다. 비파라는 이름은 잎과 열매가 현악기 비파(琵琶)와 닮은 데에서 유래했다. 발음도 한국과 중국, 일본이 비슷하다. 청동기 시대에 쓰인 비파형 동검 역시 생김새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비파형 동검은 중국 랴오닝 지역과 한반도 전역에서 발굴된 제례 의식용 장신구다. 칼의 하단부가 둥글게 퍼져 있어 악기 비파를 연상시킨다.비파 열매는 기원전 2세기부터 ‘비파십과(枇杷十果)’라고 해서 중국 남부의 10대 과일로 꼽혔다. <천자문>에 ‘비파는 늦게까지 푸르고 오동은 일찍 시든다(枇杷晩翠 梧桐早凋)’는 구절이 나오듯 사철 잎이 푸른 상록수다. 온난한 기후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경남 남해 거제 통영, 전남 완도 목포 순천, 제주 등 남부에서만 볼 수 있고 중북부에서는 보기 어렵다.이렇게 특이한 비파를 시인들이 그냥 두고 볼 리 없다. 두보는 ‘전사(田舍)’라는 시에서 “굴피나무 가지 가냘프게 드리우고/ 비파 열매 나무마다 향기를 풍기는데/ 가마우지는

    2024.06.25 17:45
  • 도연명이 금주를 선언한 이유 [고두현의 아침 시편]

    술을 끊으며(止酒)도연명성읍에 사는 것 그만두고자유롭게 노닐며 스스로 한가하네.앉는 건 높은 나무 그늘 아래에 멈추고걷는 건 사립문 안에 멈추네.좋은 맛은 텃밭의 아욱에서 그치고큰 즐거움은 어린 자식에서 그치네.평생 술을 끊지 못했으니술 끊으면 마음에 기쁨이 없기 때문이었네.저녁에 끊으면 편히 잠들지 못하고아침에 끊으면 일어날 수가 없네.날마다 날마다 끊으려고 했지만혈기의 작용이 멈추어 순조롭지 않네.단지 술을 끊는 게 즐겁지 않은 것만 알고끊는 게 몸에 이로운 것은 믿지 않네.비로소 끊는 게 좋다는 걸 깨닫고오늘 아침에 정말로 끊게 되었네.이로부터 한결같이 끊어 나가면장차 부상의 물가에 이르리라.맑은 얼굴이 예전 모습대로 머물 것이니어찌 천만년에 그치겠는가.居止次城邑 逍遙自閑止 坐止高蔭下 步止門裏好味止園葵 大歡止稚子 平生不止酒 止酒情無喜暮止不安寢 晨止不能起 日月欲止之 營衛止不理徒知止不樂 未信止利己 始覺止爲善 今朝眞止矣從此一止去 將止扶桑 淸顔止宿容 奚止千萬祀.* 도연명(陶淵明·365~427) : 중국 동진 말기에서 송대 초기의 시인.이태백과 함께 유난히 술을 좋아했던 도연명(陶淵明). 그가 술을 끊게 됐다니, 이 무슨 얘기일까요. 이 시를 쓴 시기를 짚어보니 그의 나이 마흔아홉 살 무렵입니다. 이보다 13년 뒤인 예순두 살에 세상을 떠난 걸 감안하면, 말년까지 아예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는 말인데….한자 ‘지(止)’라는 글자에 담긴 비밀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이후로도 술을 계속 즐겼습니다. 이 시에는 한자 ‘지(止)’ 자가 20개나 들어 있는데요, 그 글자 속에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대체 어떤 비밀일까요.학

    2024.06.24 10:00
  •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앨프레드 에드워드 하우스먼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지혜로운 사람이 들려준 말,“은화와 지폐와 동전은 다 주어도네 마음만은 함부로 주지 말아라.진주와 루비는 다 주어도네 순수한 마음만은 잃지 말아라.”그러나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아무런 소용도 없었어라.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그 사람이 다시금 들려준 말,“가슴 밑바닥에서 나오는 마음은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란다.그 사랑은 숱한 한숨과 끝없는 후회 속에서 얻어지느니.”내 나이 이젠 스물하고 둘오, 정말이어라, 정말이어라.-------------------------------영국 시인이자 고전학자인 앨프레드 에드워드 하우스먼(1859~1936)의 시입니다. 그의 시는 뛰어난 서정성과 절제미를 겸비하고 있습니다. 운율에 따라 읊조리기 좋지요. 이 시도 많은 작곡가에 의해 노래가 됐는데 널리 알려진 것만 44곡에 이릅니다. 한창때의 사랑을 다룬 이 시는 한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현자(賢者)의 조언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스물한 살은 너무 젊어서 낭만적인 감정에 휘둘리기 쉽지요. 어른이 됐으면서도 아직 경험이 부족한 풋내기. 사랑에 빠져 마음을 빼앗기면 감정에 휘둘리고 결국 후회할 것이라고 일러줘도 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이가 이 말의 깊은 뜻을 알 리 없습니다.  “가슴 밑바닥에서 나오는 마음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란다./ 그 사랑은 숱한 한숨과/ 끝없는 후회 속에서 얻어지느니”라는 경고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사랑에 빠진 젊은이는 정신없는 격랑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갑니다. 그렇게 사랑의 열병을 앓고 나서야

    2024.06.20 17:28
  • 다른 집 계단이 얼마나 가파른지 겪어 봐야 안다 [고두현의 인생명언]

    "너는 다른 사람의 빵이 얼마나 짠지, 다른 집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체험하게 될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구절이다. <신곡>은 단테가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어릴 때부터 짝사랑했던 베아트리체의 인도로 사후세계인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내용의 대서사시다. 43세 때인 1308년부터 쓰기 시작해 죽기 1년 전인 1320년에 완성했다. 단테가 신곡을 쓰게 된 것은 첫사랑 베아트리체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부유한 집안 딸이었던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강요로 돈 많은 상인에게 시집을 가고 말았다. 그리고 스물네 살에 꽃다운 생을 마감했다. 몇 년 전, 이탈리아에 갔을 때였다. 볼로냐 시내 한가운데의 마조레 광장을 찾았다. 산 페트로니오 성당과 델 포데스타 궁전이 있는 곳이다. 그 곁에 커다란 탑이 두 개 서 있는데, 둘 중 하나는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있다. 기울어진 탑 뒤편에서 단테의 글귀를 발견했다. 볼로냐 도서전에 들렀다가 700년 전의 단테를 만났으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단테는 피렌체 태생이지만 볼로냐 대학에서 많은 지식과 영감을 얻었다. 볼로냐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역사가 900년이 넘는다. 그가 들렀을 만한 장소와 그가 어루만졌을 기둥들을 쓰다듬으면서 탑의 글귀를 따라 시간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음날 단테의 생가가 있는 피렌체로 달려갔다. 생가는 피렌체의 두오모 광장 바로 옆에 있었다. 이 오래된 석조건물은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평생 잊지 못하고 밤마다 시를 쓰면서 슬픔을 달래던 곳이다. 단테는 르네상스 시대의

    2024.06.17 16:11
  • 사랑하라, 그러나 간격을 두라 [고두현의 아침 시편]

    사랑하라, 그러나 간격을 두라                       너희 함께 태어나 영원히 함께하리라.죽음의 천사가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신의 계율 속에서도 너희는 늘 함께하리라.그러나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창공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서로 사랑하되 그것으로 구속하지는 말라.너희 영혼의 해안 사이에 물결치는 바다를 놓아두라.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같은 잔을 마시지 말라.서로에게 빵을 주되 같은 빵을 먹지 말라.현악기의 줄들이 같은 화음을 내면서도 혼자이듯이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서로의 가슴을 주되 그 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오직 신의 손길만이 너희 가슴을 품을 수 있다.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사원의 기둥들은 서로 떨어져 있고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느니.* 칼릴 지브란(1883~1931) : 레바논 출신의 미국 시인덩굴식물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줄기를 감고 오릅니다. 칡은 대부분 왼쪽으로 감고, 등나무는 주로 오른쪽으로 감지요. 개중에 좌우를 가리지 않는 것도 있지만, 칡과 등나무가 다른 쪽으로 감고 오르다 얽히면 싸우게 됩니다. 이런 모습의 ‘칡 갈(葛)’과 ‘등나무 등(藤)’에서 유래한 말이 곧 갈등(葛藤)이죠.인간 세상에서도 생각이 한쪽으로만 꼬이는 사람끼리 만나면 부딪치게 됩니다. 갈등이 심해지면 자기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까지 망치고 말지요. 칡에 감긴 나무가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등나무 줄기에 목을 졸린 나무가 숨을 쉬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레바논 출신의 미국 시인 칼릴 지브란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

    2024.06.17 10:00
  • 김달진 시인의 ‘샘물’을 다시 읽는 까닭 [고두현의 아침 시편]

         샘물                    김달진숲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물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동그란 지구의 섬 위에 앉았다.-------------------------------------  새 시집이 좋은 인연을 만났습니다. 과분하게도 ‘김달진문학상’을 받게 됐습니다. 이 상은 시인이자 한학자인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 1907~1989) 선생을 기려 1990년에 제정한 것으로 올해 35회째입니다. 수상자가 두 명인데, 김수복 한국시인협회장과 공동 수상하게 돼 더욱 영광입니다. 신문 발표를 보고 많은 분이 축하와 응원을 보내주셨습니다. 9년 만에 펴낸 시집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2024.3)가 좋은 평가를 받아 기쁘지만, 상을 받을 때 두 손을 겸허히 모으는 것만큼이나 마음속에 두려움이 앞섭니다. 앞으로 더 깊이 생각하고 더 폭넓게 경험하고 더 겸손하게 공부하겠습니다. 시상식은 김달진문학제 기간인 10월 12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김달진문학관 생가에서 열립니다. 그에 앞서 오늘(14일) 저녁 6시 30분 고려대학교 100주년기념관에서 김달진문학상 기념 시낭독회가 펼쳐집니다. 초여름 밤, 시원한 바람과 싱그러운 시향(詩香)이 어우러진 곳에서 다시금 출발선에 선 ‘문청’의 자세를 되새기겠습니다.  수상 통보를 받고 이 시 「샘물」을 생각했습니다. 작은 샘물이 하늘과 바다로 무한히 넓어지는 풍경,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가 ‘동그란 지구의 섬 위에 앉’아 보는 시인의 모습…. 한 폭의 수묵담채화 같은 이 장면을 이렇게 시적으로 묘

    2024.06.13 15:38
  • 바닷가재가 오래 사는 건 껍질을 계속 벗기 때문 [고두현의 문화살롱]

    ‘나이 예순이면/ 살 만큼은 살았다 아니다/ 살아야 할 만큼은 살았다/ 이보다 덜 살면 요절이고/ 더 살면 덤이 된다/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지난 9일 타계한 김광림 시인의 시 ‘덤’의 앞부분이다. 1989년 펴낸 시집 <말의 사막에서>에 실린 이 시에는 ‘덤을 좀만 누리다’ 간 김종삼 시인(63)과 ‘진작 가버린’ 이중섭 화가(40), ‘쉰의 고개턱에 걸려’ 주저앉은 조지훈 시인(48), ‘일찌감치 숟갈을 놓은’ 김소월(32), 이상(27)이 등장한다.김광림 시인은 예순을 삶의 분기점으로 보고 이보다 덜 사는 것은 ‘요절’이요, 더 사는 것은 ‘덤’이라고 했다. 95세로 세상을 떠난 그에게 ‘덤’의 삶은 35년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쉬지 않고 정진하며 더 깊고 넓은 시의 세계를 열었다. 한국시인협회장을 맡아 우리 시의 국제화까지 일궜으니 여생의 ‘덤’에서 성찰과 지혜의 꽃을 가득 피운 셈이다. 60세 이후 새로 피워 올리는 꽃인간의 평균수명은 인류 역사의 99.9% 동안 20세를 넘지 못했다. 중세까지도 35세에 불과했다. 20세기 중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20세기 초반 태생보다 줄잡아 30년은 더 산다. 우리 사회의 은퇴 연령은 대부분 60세다. 이 나이를 지나고도 한참 더 살아야 한다. 이처럼 길게 주어진 ‘덤’의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덤’의 옛말은 ‘더음’으로, ‘더하다’는 의미의 ‘더으-’에 접미사 ‘-음’이 결합한 것이다. 그 자체로 플러스의 뜻을 갖고 있다. 발음은 1음절로 짧지만 내포된 의미는 길고 크다. 이를 내 삶에 접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보다 통념의 겉껍질

    2024.06.11 18:27
  • 취하라! 몰입하라! 무엇에? [고두현의 아침 시편]

    취하라샤를 보들레르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땅을 향해 그대 몸을 구부러뜨리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쉴 새 없이 취해야 한다.그러나 무엇에?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에나 그대 좋을 대로 아무튼 취해라.그리하여 때때로, 궁전의 섬돌 위에서, 도랑의 푸른 풀 위에서, 그대 방의 침울한 고독 속에서, 그대 깨어 일어나, 취기가 벌써 줄어들거나 사라지거든, 물어보라.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 시계에, 달아나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에, 말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 몇 시인가를.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지금은 취할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끊임없이 취하라!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이든 그대 마음대로.”* 샤를 보들레르(1821~1867) : 프랑스 시인.아주 도발적인 시죠? 이 시는 샤를 보들레르가 죽고 난 뒤에 나온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에 실려 있습니다. 주된 메시지는 도취와 몰입을 통해 시간의압박과 권태를 잊으라는 것이지요. 무언가에 집중할 때 우리 삶이 완성된다는 평소 철학을 담은 시이기도 합니다.센 강변로 17번지에 살았던 보들레르몇 년 전, 보들레르가 살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지요. 센 강 한가운데에 형제처럼 떠 있는 섬 두 개가 있는데 그중 큰 게 노트르담 대성당을 품고 있는 시테섬이고, 작은 게 고급 주택가로 이름난 생루이섬입니다. 보들레르는 생루이섬의 동쪽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도는 강변도로(Quai d&rsqu

    2024.06.10 10:00
  • 천 그루 숲도 도토리 한 알에서 시작된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우화랠프 월도 에머슨산과 다람쥐가 서로말다툼을 했다.산이 “꼬마 거드름쟁이”라고 하자다람쥐가 응수하기를“자네는 분명히 덩치가 크네.하지만 만물과 계절이모두 합쳐져야만한 해가 되고또한 세상을 이룬다네.그리고 나는 내 처지가 다람쥐라는 걸별로 부끄럽게 생각지 않네.내가 자네만큼 덩치는 크지 못하지만자네는 나처럼 작지도 않고나의 반만큼도 재빠르지 못하지 않은가.나도 자네가 나를 위해서오솔길을 만들어준다는 건 시인하네.그러나 재능은 제각기 고루고루일세.나는 등에다 숲을 지지 못하나자네는 도토리를 깔 수가 없지 않은가.”-----------------------------------19세기 미국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의 시입니다. 큰 산과 작은 다람쥐를 통해 세상 만물의 특성과 가치가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작품이지요. 몸집은 작아도 재빠른 ‘꼬마’의 디테일이 거대한 산의 큰 덩치와 대조를 이룹니다. “천 그루의 울창한 숲도 도토리 한 알에서 시작된다”고 한 에머슨의 명언도 이런 사유에서 나왔습니다.에머슨은 인간의 선함을 강조한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19세기에 유행한 염세주의를 벗어나 낙관적인 미래를 꿈꿨습니다. 인류의 앞날을 어둡게 본 볼테르나 바이런 등과 달리 인간에게는 선함이 악함보다 많다는 것을 믿었지요. 그는 <팡세>를 쓴 블레즈 파스칼이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지나치게 부각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1832년 말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연이 우리 인간 안에 있으며, 인간의 한 부분이다”라는 걸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후 “인간과 자연은 하나이며, 모든 사람이 다 특별하고 중요한

    2024.06.06 17:19
  • 마음 맞는 사람과는 천 잔도 부족하고… [고두현의 아침 시편]

    무제작자 미상술은 지기를 만나면천 잔도 부족하고말은 뜻이 안 맞으면반 마디도 많다네.酒逢知己千杯少話不投機半句多.“살다 보면 어떤 걸 외우지 못해 문제가 되는 것보다 애초에 잘못된 걸 기억하고 있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더 많아요.”한시에 조예가 깊은 한 시인의 말입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젊은 시절에 듣고 너무 좋아서 오랫동안 애송해온 시구 얘기더군요. “술자리서 지기 만나면 천 잔도 부족하고/ 의기가 맞지 않는다면 반 마디 말도 많네(酒逢知己千杯少 意氣不和半句多)”라는 멋진 구절이 구양수(歐陽修, 1007~1072)의 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구양수 전집에는 이런 내용 없어“30여 년이 흐른 뒤 우연히 출처를 찾아보았더니 세상에나! <구양수 시문집>은 물론 <사고전서(四庫全書)> 어디에도 없어요. 인터넷이 되지 않던 시절이라 검색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기억으로만 여러 자리에서 인용하곤 했는데 원문이 보이지 않다니….”온갖 방법을 동원해 찾아본 결과 구양수의 시 ‘봄날 서호에서 사법조에게 부치는 노래(春日西湖寄謝法曹韻)’에 후세 사람이 덧붙인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내용인즉, 시 중간의 “저기 호숫가에 한 동이 술이 있으니/ 만 리 밖 하늘 끝 사람을 떠올리노라(遙知湖上一樽酒 能憶天涯萬里人)”라는 구절을 한 번 더 반복하면서 그 앞에다 “술은 지기를 만나면 천 잔도 부족하고/ 말은 뜻이 안 맞으면 반 마디도 많다네(酒逢知己千杯少 話不投機半句多)”라는 구절을 집어넣었다는 것이지요.이 구절에 ‘후인수개판(後人修改版)’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는데, <구양수

    2024.06.03 10:00
  •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요. 레몬꽃 피는 나라 [고두현의 아침 시편]

    미뇽괴테당신은 아시나요, 저 레몬꽃 피는 나라?그늘진 잎 속에서 금빛 오렌지 빛나고푸른 하늘에선 부드러운 바람 불어오고도금양은 고요히, 월계수는 높이 서 있는 나라?그곳으로! 그곳으로!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사랑이여.당신은 아시나요. 그 집을? 둥근 기둥들이지붕을 떠받치고 있고, 홀은 휘황찬란, 방은 빛나고,대리석 입상들이 날 바라보며,“가엾은 아이야, 무슨 일을 당했니?” 물어주는 곳,그곳으로! 그곳으로!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나의 보호자.당신은 아시나요, 그 산, 그 구름다리를?노새가 안개 속에서 갈 길을 찾고동굴 속에는 오래된 용이 살고 있으며무너져 내리는 바위 위로는 다시폭포수 쏟아져 내리는 곳,그곳으로! 그곳으로!우리의 길이 뻗어 있어요. 오 아버지, 우리 그리로 가요.------------------------------괴테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에 나오는 시입니다. 소녀 미뇽이 주인공 빌헬름을 사모하며 부르는 노래이지요. 미뇽은 어린 나이에 이탈리아에서 유괴돼 곡마단에 끌려다녔는데, 여행 중이던 빌헬름이 매 맞는 그녀를 구해주자 고마움과 정을 느끼게 됐습니다.이 시는 미뇽의 마음을 통해 아름다운 남국과 그곳을 향한 사랑의 갈망을 함께 그리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미뇽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지만, 괴테의 관점에서 보자면 ‘따뜻한 남쪽 나라’ 이탈리아를 동경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기도 하지요.첫 번째 연에 나오는 도금양(桃金孃)은 지중해 연안에 많이 자라는 늘 푸른 떨기나무로 평화와 감사, 사랑을 상징합니다. ‘레몬꽃 피는 나라’ ‘금빛 오렌지’도 이탈리아를 가리키지요. 1연의 자연, 2연의 예술, 3연의 풍

    2024.05.30 16:09
  • 카프카의 또 다른 '변신'…안전모까지 개발? [고두현의 문화살롱]

    체코 수도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에서 10분 남짓 걸으면 나 포르지치 7번지가 나온다. 이곳에 고풍스러운 호텔 ‘센추리 올드 타운 프라하 M갤러리’가 있다. 1층 로비에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두상이 보인다. 벽에는 카프카 사인이 새겨져 있다. 식당 이름도 카프카 레스토랑이다. 이 호텔은 카프카가 오랫동안 근무한 노동자재해보험공사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다.카프카는 이곳에서 1908년부터 1922년까지 직장 생활을 했다. 노동자재해보험공사는 우리의 근로복지공단이나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해당하는 공공기관이다. 23세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법원과 민간 보험회사를 거쳐 노동자재해보험공사로 이직한 그는 5년 만에 부하 30명을 거느리는 부서기로 임명됐다. 전체 직원 250여 명 중 유대인은 그를 포함해 3명밖에 없었지만, 1920년에는 서기로 승진했고 1922년엔 서기장 자리에까지 올랐다.이곳에서 그는 동료와 상사들의 호평을 받는 엘리트 직원이었다. 유머 감각도 있고 사회성도 좋았다. 이전에 다닌 민간 보험회사에서는 온종일 찌들어 지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쉬지 않고 일해야 했고 업무도 무척 힘들었다. 결국 9개월 만에 이직했다. 재해보험공사에서는 오후 2시에 업무가 끝났기 때문에 글을 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시간 여유가 생긴 덕분인지 업무 능력과 창의력도 빛나기 시작했다.이 무렵 유럽의 노동 환경은 아주 열악했다. 공장에서 육중한 기계 장비에 부딪히거나 높은 데서 떨어져 죽는 사고가 비일비재했다. 목공 작업 중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도 잦았다. 그는 하루가 멀게 발생하는 산업재해를 공식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했다. 생생한 그림까지 곁들

    2024.05.28 18:13
  • 만리장성 쌓은 벽돌공들은 어디 갔나 [고두현의 아침 시편]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베르톨트 브레히트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책에는 왕들의 이름만 적혀 있다.왕들이 바윗덩어리들을 날랐을까?그리고 여러 번 파괴되었던 바빌론-누가 일으켜 세웠을까? 건축노동자들은황금빛 도시 리마의 어떤 집에 살았을까?만리장성을 다 쌓은 날 저녁, 벽돌공들은어디로 갔을까?(… 중략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그가 혼자서 해냈을까?시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취사병 한 명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스페인의 필립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하자울었다. 그 말고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서 이겼다. 그 말고또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역사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승리가 나온다.승리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십 년마다 한 명씩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그 비용은 누가 지불했을까?이렇게 많은 사실들,이렇게 많은 의문들.*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 : 독일 극작가이자 시인.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극작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시인으로도 유명합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등의 기막힌 시를 많이 썼지요.직설적인 진술과 절묘한 반전으로 현실의 모순을 비판한 ‘20세기 최고 독일 시인’으로 꼽힙니다. 주로 기존 가치관에 대한 비판과 자유 의식, 인간에 대한 사랑,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평화주의를 노래했죠.히틀러 집권 후 15년 넘게 망명제지 공장집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시를 쓴 브레히트는 뮌헨대 의과에 들어가 짧은 군 복무를 마친 뒤에 의학을 버리고 시와 연극에 매진했습니다.

    2024.05.27 10:00
  • 세상 떠난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 [고두현의 아침 시편]

    가난한 사랑 노래-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신경림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두 점을 치는 소리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집 뒤 감나무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한국 시단의 거목’ 신경림 선생께서 오늘(22일) 아침에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88세. 깊이 있는 성찰과 날카로운 현실감각으로 문인과 독자 모두에게 사랑받은 시인답게 장례도 대한민국 문인장(文人葬)으로 치러집니다.선생은 저에게도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맥주잔을 앞에 놓고 구수한 옛날이야기와 시작(詩作) 뒷얘기를 즐겁게 들려주셨고, “시는 혼자 골방에 들어앉아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생생한 삶터에서 치열하게 부대끼며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며 “힘닿는 데까지 일터를 지키면서 살아있는 시를 쓰라”고 말씀하셨지요.2005년에는 제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문예중앙)의 표4(표지 뒷면)에 감동적인 추천사를 써 주셨습니다. 그

    2024.05.22 17:02
  • “포기 대신 경험 살리고 더 잘할 방법을 찾았다” [고두현의 인생명언]

     “훌륭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할 때마다 그 경험에서 배우고,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뿐이다.” -할랜드 데이비드 샌더스 KFC 매장 입구에서 흰 양복에 지팡이를 걸치고 서 있는 노신사, ‘커넬 샌더스’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사람. 1890년 미국 인디애나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자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음식 만드는 법을 혼자 배웠고, 열 살 때부터 농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열두 살 때 초등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열여섯 살 때는 생계를 위해 나이를 속여가며 미 육군에 입대했지만 병을 앓는 바람에 넉 달 만에 전역했다. 이후 증기선 선원부터 철도 노동자, 보험 외판원, 주유소 일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가난했지만 결혼도 하고 아이도 얻었다. 그러나 대공황의 격랑에 휩쓸려 마흔 살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믿을 건 어릴 때 배운 요리 솜씨뿐이었다. 그는 주유소 한 귀퉁이에서 배고픈 여행자들에게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테이블 하나에 의자 여섯 개로 시작한 레스토랑은 입소문을 타고 날로 번창했다.  그는 여기서 번 돈으로 큰 모텔을 지었다. 그러나 불이 나 레스토랑과 모텔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자리에 레스토랑을 다시 지었지만, 고속도로가 관통하면서 손님이 뚝 끊겼다. 이제 남은 것은 빚더미뿐. 게다가 아들을 잃고 아내에게도 버림받았다. 나이 60에 모든 것을 잃고 극한 상황에 빠진 그는 정신병원 신세까지 졌다.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 사회보장기금 105달러를 들고 그는 마지막 희망

    2024.05.20 17:04
  • 50년간 벼슬하며 존경받은 비결 [고두현의 아침 시편]

    면앙정가(仰亭歌)송순인간 세상 떠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없다.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바람도 쐬려 하고 달도 맞으려 하니밤일랑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고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까.아침이 부족하니 저녁이라 싫겠는가.오늘이 부족하니 내일이라 넉넉하랴.이 산에 앉아 보고 저 산에 걸어 보니번거로운 마음에 버릴 일이 아주 없다.쉴 사이 없거든 길이나 전하리라.다만 푸른 지팡이만 다 무디어 가는구나.(생략)* 송순(宋純, 1493~1582) : 조선 중기 문신.송순(宋純)의 ‘면앙정가’는 그가 41세에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고향 전남 담양에 내려와서 지은 가사(歌辭)입니다. ‘면앙정(仰亭)’은 그가 지은 정자 이름이자 호(號)이기도 하지요.이 작품은 “반복·점층·대구법 등으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리고 경치 또한 실감나게 묘사한 절창”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첫 부분의 서사(序詞)에서는 면앙정이 있는 제월봉의 모습을 묘사했고, 두 번째 부분인 본사(本詞)에서는 면앙정에서 바라본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죠.사립문은 누가 닫고 떨어진 꽃은…본사의 앞부분에서 시선을 먼 곳으로 점차 이동하며 근·원경, 뒷부분에선 면앙정의 사계 풍경을 그렸습니다. 마지막 결사(結詞) 부분은 “이렇게 지내는 것도 모두 역군은(亦君恩, 역시 임금의 은혜)이샷다”라며 유학자로서의 충절을 표하고 있군요.위에 인용한 부분은 ‘면앙정가’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 우리말의 묘미를 절묘하게 살려냈다는 평을 듣지요. 속세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났지만 자연을 향유하느라 한가로울 겨를이 없다는 대목이 시인의 내면

    2024.05.20 10:00
  • 페르시아 대표 시인이 쓴 ‘사랑의 경전’ [고두현의 아침 시편]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루미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꽃과 술과 촛불이 있어요.당신이 안 오신다면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겠어요?당신이 오신다면 또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겠어요?-----------------------------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시를 쓴 사람은 페르시아 시인 루미(1207~1273)입니다. 본명은 잘랄 아드딘 무하마드 루미. 달달한 연애시를 주로 쓴 시인이지만, 사실 그는 신비주의자이자 금욕주의자인 종교인이었습니다.그의 대표작은 페르시아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는 <마스나비>(전6권)입니다. 이 시집은 ‘페르시아어의 코란’, ‘신비주의의 바이블’로 불릴 만큼 높이 평가받고 있지요.그는 이 시집에서 “당신이 분노하고 다툰다 해도 나에게는 하프의 선율보다 아름다우며”, “사랑에 침몰하여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지만 당신 안에 침몰하는 것이라면 더욱 깊이 침몰하겠다”고 노래합니다. 또 “초원에 내리는 비처럼 당신을 대신하여 울겠다”고 다짐합니다.여기에서 “초원에 내리는 비처럼” “대신하여 울겠다”는 “당신”은 그가 그토록 가 닿고자 했던 신이거나, 스승이자 친구이며 연인이었던 샴스이거나, 그 자신일 수도 있겠지요. 이 모든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종착지로 향하는 여정의 일부입니다.그는 1207년 9월 30일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땅인 발흐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학자들의 술탄’으로 불린 신학자였고 어머니는 지역 지도자의 딸이었지요. 그의 가족은 몽골의 침략을 피해 현재의 튀르키예인 아나톨리아로 이주했고, 이후 콘야에 정착했습니다. ‘루미’는 이때부터 불린 이름이라고 합니다

    2024.05.16 16:31
  • 황제 선물까지 돌려보낸 포청천 [고두현의 아침 시편]

    단주의 관사 벽에 쓰다(書端州郡齋壁)        포증맑은 마음은 정치의 뿌리요바른 도리는 이 몸이 추구하는 것.빼어난 나무는 훗날 용마루가 되고좋은 쇠는 갈고리가 되지 않는 법.창고가 가득하면 쥐와 참새가 즐겁고풀이 다하면 토끼와 여우가 근심한다.역사책에 남긴 가르침이 있으니후세에 부끄러움을 남기지 말 일이다.* 포증(包拯, 999~1062) : 청렴했던 송나라 재상.포청천으로 유명한 송나라 재상 포증(包拯)의 시입니다. 제목 ‘단주의 관사 벽에 쓰다(書端州郡齋壁)’에 나오는 단주(端州)는 광둥성 조경(肇慶)과 운부(雲浮)의 옛 이름이지요. ‘군재(郡齋)’는 군수가 사는 관사를 가리키니, 단주 군수로 재직할 때 관사 벽에 써놓은 시를 뜻합니다.좋은 목재가 동량이 되려면…‘맑은 마음(心)’과 ‘바른 도리(直道)’는 그가 근본으로 삼던 정치 덕목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목재도 ‘동량(용마루)’이 될 수 없다고 믿었죠. 훌륭한 인재가 부도덕한 관리로 추락하는 것은 이 덕목을 잃을 때 일어나는 비극입니다.이와 마찬가지로 ‘좋은 쇠는 갈고리가 되지 않는 법’이니, 꼼수를 부려 남을 해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곳간에서 제 배 채우기에 급급한 쥐와 참새는 탐관오리의 또 다른 상징이죠.그가 얼마나 청렴했는지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환갑이 됐을 때였죠. 그는 아들 포귀(包貴)에게 모든 선물을 사절하라고 단단히 일러뒀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제일 먼저 환갑 선물을 보내온 사람이 하필 인종 황제였지요.아들은 매우 난처했습니다. 고민 끝에 선물을 갖고 온 태감에게 “이 특별

    2024.05.13 10:00
  • 어찌하여 그대는 나를 깨우느뇨? [고두현의 아침 시편]

      오시안의 시                 제임스 맥퍼슨어찌하여 그대는 나를 깨우느뇨?봄바람이여! 그대는 유혹하면서‘나는 천상의 물방울로 적시노라’라고하누나. 허나 나 또한 여위고시들 때가 가까웠노라.내 잎사귀를 휘몰아 떨어뜨릴 비바람도이제 가까웠느니라. 그 언젠가내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던 나그네가내일 찾아오리라. 그는 들판에서내 모습을 찾겠지만 끝내 나를찾아내지는 못하리라.(‘오시안의 시’ 부분)--------------------------------- ‘오시안의 시’는 괴테의 자전적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읽어주며 격정에 사로잡힌 작품입니다. 소설 속의 시간대는 크리스마스 직전이었지요. 그가 이 작품에서 인용한 오시안은 3세기 무렵 고대 켈트족의 눈먼 시인이자 용사입니다. 1765년 제임스 맥퍼슨의 시집을 통해 이름이 널리 알려졌지요. ‘오시안의 시’는 당시 유럽의 혁명 바람을 타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괴테가 소설에 인용한 것 외에도 나폴레옹은 이 시에 나오는 핑갈의 전투를 실제 전쟁에 적용했고, 화가 앵그르는 ‘오시안의 꿈’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낭만적이고 예민한 성격의 괴테가 20대 중반에 겪은 일을 토대로 쓴 작품입니다. 약혼자 있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 그는 이룰 수 없는 비련에 고통스러워했지요. 그러다 유부녀를 사랑한 끝에 권총으로 자살한 친구의 이야기를 연결해 쓴 것이 이 작품입니다.  이 소설로 그는 스타가 됐고, 작품 속 베르테르가 즐겨 입던 노란색 조끼와 푸른색 연미복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

    2024.05.09 15:02
  • 윤동주 시집 원래 제목은 '병원'이었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병원윤동주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윤동주(1917~1945) : 북간도 명동 출생.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가 처음 준비한 시집의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이었습니다. 아픈 시대 상황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제목이었죠.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아홉 자의 긴 제목으로 바뀌었습니다.연희전문(현 연세대) 4학년 때인 1941년, 윤동주는 자선 대표작 19편을 묶어 시집을 내려고 했지요. 먼저 필사본 3부를 만들어 한 부는 자기가 갖고, 나머지는 스승인 이양하 교수(영문학, 수필가)와 가장 가까운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습니다.세상이 온통 앓는 사람들로 가득정병욱은 훗날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에서 이렇게 회고했지요.“동주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을 계획했다. ‘서시’까지 붙여서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한 다음 그 한 부를 내게 건네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서시’를 보이

    2024.05.06 10:00
  • 생모 장명화 씨에게 보내는 전윤호(윤종) 시인의 ‘늦은 인사’ [고두현의 아침 시편]

    늦은 인사                      전윤호그 바닷가에서 당신은버스를 탔겠지싸우다 지친 여름이 푸르스름한 새벽내가 잠든 사이분홍 가방 끌고동해와 설악산 사이외줄기 길은 길기도 해다시는 만날 수 없었네자고 나면 귀에서 모래가 나오고버스만 타면 멀미를 했지아무리 토해도 멈추지 않고정신없이 끌려가던 날들가는 사람은 가는 사정이 있고남는 사람은 남는 형편이 있네더 이상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 나이잘 가 엄마아지랑이 하늘하늘 오르는 봄이제야 미움 없이인사를 보내------------------------------------‘잘 가 엄마’라는 대목에서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짜고 붉은 눈물이 아니라 맑고 투명한 눈물이었습니다. ‘이제야 미움 없이/ 인사를 보내’라는 마지막 구절 덕분이었지요. 서운함이나 원망 같은 감정의 앙금을 말갛게 헹궈낸 관조와 해원, 화해와 성찰의 꽃이 그곳에서 피어납니다.이 시에는 전윤호 시인의 아픈 개인사가 투영돼 있습니다. 첫머리의 ‘그 바닷가’는 동해안 최북단에 있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입니다. 시인의 고향 정선에서 차로 두 시간 가야 닿는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는 소규모 병원을 운영하셨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어느 날 ‘싸우다 지친 여름’ 새벽, 버스를 타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길을 떠나버렸습니다. 어린 그가 ‘잠든 사이’에 말이지요.그때 그의 나이는 4~5세. 아이는 ‘동해와 설악산 사이/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난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자고 나면 귀에서 모래가 나오고/ 버스만 타면 멀미를 했’으며 ‘아무리 토해도 멈추지 않고 정신없이 끌려가

    2024.05.0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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