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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 고두현 기자
    고두현 기자 편집국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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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검의 날은 단련 없이 서지 않는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희망가                 문병란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 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말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 여기 드라마틱한 삶이 있습니다. 노숙자에서 억만장자가 된 남자 이야기입니다. 그는 1954년 미국 시카고 인근의 밀워키에서 태어났습니다. 4남매 중 막내였는데, 날마다 의붓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여덟 살 때부터는 남의 집에 입양돼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지요. 그나마 용기를 북돋워 주는 어머니와 삼촌들 덕분에 학업은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군에 입대했다가 제대한 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정을 꾸린 그는 의료기 세일즈맨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지요. 하지만 의료기 영업은 부진했고, 빈곤 속에서 아내와의 관계도 삐거덕거렸습니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우연히 만난 주식

    2024.02.22 17:18
  • “바람과 파도는 언제나 유능한 뱃사람 편” [고두현의 인생명언]

    “바람과 파도는 언제나 유능한 뱃사람의 편이다.”<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의 명언이다. “거친 파도가 유능한 뱃사람을 만든다”는 영국 속담과도 닮았다.기번은 독신 생활을 하며 26년간 로마사를 연구한 끝에 필생의 대작을 완성했다. 그가 찾은 로마제국의 강성 비결은 거센 바다의 폭풍우 같은 역경을 이겨낸 응전과 도전의 힘이었다. 로마가 멸망한 것은 이 같은 역경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돛에 의지했던 범선(帆船) 시절, 뱃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한 건 무풍지대였다. 맞바람이라도 불면 역풍을 활용해 나아갈 수 있지만 바람이 안 불면 오도 가도 못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적도 부근이나 북위·남위 25~35도는 ‘죽음의 바다’였다. 이곳에 갇히면 소설과 영화에 나오듯 선원들이 다 죽고 배는 유령선이 된다.동력으로 항해하는 기선(汽船) 시대에는 무풍 대신 폭풍과 파도가 가장 큰 적이 됐다. 세계기상기구(WMO)에 기록된 파도의 최고 높이는 29.1m로, 아파트 10층 규모였다. 영국 해양조사선이 2000년 2월 8일 밤 스코틀랜드 서쪽 250㎞ 해상에서 관측했다.파도는 해수면의 강한 바람에서 생긴다. 그래서 풍파(風波)라고 한다. 파도의 가장 높은 곳은 ‘마루’, 가장 낮은 곳은 ‘골’, 마루와 골 사이의 수직 높이는 ‘파고(波高)’다. ‘파장(波長)’은 앞 파도 마루와 뒤 파도 마루 사이, 골과 골 사이의 수평 거리를 뜻한다. 뱃사람들은 파고와 파장을 눈으로 재면서 파도가 얼마나 세게 밀려올지 판단한다.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배가 부서지고 목숨을 잃는다. 서양인들이 “전쟁에 나가게 되면 한 번 기도하고,

    2024.02.19 17:09
  • 오랑캐 땅에 간 그녀…봄이 와도 봄 같지 않네 [고두현의 아침 시편]

    소군원(昭君怨)                              동방규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어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저절로 옷 허리띠 느슨해진 건몸매를 가꾸기 위함이 아니라네.* 동방규(東方) : 중국 당나라 때 시인.‘소군원(昭君怨)’은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가 쓴 시입니다. 그의 생몰 연대는 정확하지 않고, 측천무후 때 좌사(左史, 사관)를 지낸 사실만 전해옵니다. 그러나 이 시 덕분에 후세에 길이 남는 시인이 됐지요.시의 주인공은 기원전 30년 무렵 한(漢) 원제의 궁녀였던 왕소군(王昭君)입니다. 양갓집 딸로 꽃다운 나이에 궁녀가 된 그녀는 절세미인이었죠. 훗날 서시(西施), 양귀비(楊貴妃), 초선(貂蟬)과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불렸습니다.절세미인을 추녀로 그린 화가 때문에원제는 이미 3000여 명의 여인을 거느리고 있었죠. 그래서 궁중 화가에게 새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서 그걸 보고 간택했습니다. 궁녀들이 궁중 화가에게 뇌물을 주며 잘 그려달라고 부탁했는데, 뇌물 액수에 따라 미색이 달라졌다고 합니다.그러나 왕소군은 그러지 않았죠. 결과는 뻔했습니다. 그녀의 초상화는 실물보다 못했죠. 얼굴에는 보기 싫은 점까지 찍혀 있었습니다.어느 날 북방 흉노족장이 한나라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청했습니다. 화친이 필요한 원제는 승낙했죠. 그때 낙점된 궁녀가 왕소군입니다. 그런데 작별 인사하러 온 왕소군을 본 원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림과 달리 천하절색이었기 때문이죠. ‘초상화 비리’를 알게 된 원제는 그 자리에서 화가의 목을 날려버렸지만 흉노족장과의 약속은 지켜야 했습니다.‘낙안(落雁)’과 ‘

    2024.02.19 10:00
  • 자벌레가 몸을 구부리는 까닭은 [고두현의 아침 시편]

    자벌레야이색자벌레야 너는 왜 구부리느냐.심하게 구부리면 네 뼈가 꺾어지고자벌레야 너는 왜 펴느냐.심하게 펴면 네 몸이 욕을 보느니잠시 폈다 또 잠시 구부려일생 동안 거스름이 없구나.이런 까닭에 옛사람 학문은먼저 사람에게 격물을 가르쳤는데어찌하여 지금 사람들은한결같이 요로만 추구하는가.학문 강습은 쉬지 않는 게 귀하고공을 펼침에는 법칙이 있다네.더구나 조관(朝官)의 반열에서야자용(自用)하면 남이 꼭 진노하리라.이것으로 인해 밝은 덕을 얻으면상제가 밝게 굽어 임할 것이니기거 동작에 두 마음이 없어지면끝내 자벌레 시를 지을 것도 없으리.-----------------------------고려 시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지은 시입니다. 시인은 미세하기 짝이 없는 자벌레의 움직임을 자세하게 관찰하면서 그 속에 담긴 삶의 깊은 이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 잇속을 챙기려고 굽신거리는 세인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기도 하지요.이 시에 나오는 ‘자용(自用)’은 제멋대로 하는 걸 의미합니다. 공자가 “어리석으면서도 자용(自用,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만 하는 것)하기를 좋아하고, 지위가 낮으면서도 자전(自專,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여 처리하는 것)하기를 좋아하고, 지금 세상에 나서 옛 도를 행하려 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재앙이 그 몸에 미칠 것”이라고 한 데서 온 말이지요.자벌레는 길이를 재는 자처럼 생겼습니다. 한자로는 자 척(尺), 자벌레 확(蠖)을 써서 척확(尺蠖)이라고 하지요. 자나방과의 애벌레를 가리키는데, 나뭇가지나 큰 잎 위를 자

    2024.02.15 17:10
  • ‘나이를 먹는다’와 ‘나이가 든다’는 것 [고두현의 아침 시편]

    어머니와 설날김종해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밤새도록 자지 않고눈 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어머니 곁에서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빨간 화롯불 가에서내 꿈은 달아오르고밖에는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어머니의 나라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섣달 그믐날 어머니의 도마 위에산은 내려와서 산나물로 엎드리고바다는 올라와서 비늘을 털었다어머니가 밤새 빚어놓은새해 아침 하늘 위에내가 날린 방패연이 날아오르고어머니는 햇살로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셨다---------------------------설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김종해 시인은 밤새 자지 않고 식구들을 위해 떡을 빚으며 도마를 두드리는 ‘어머니의 나라’를 통해 설날 풍경을 되살려냈군요. 그 곁에서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오르는 아이의 꿈, 새해 아침 하늘 위로 날린 방패연, 그 연실을 팽팽하게 끌어올려 주는 ‘어머니의 햇살’이 정겹고 아름답습니다.오늘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나이가 든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예부터 나이는 떡국으로 먹는다고 했던가요? “쪼끄만 게… 야, 너 떡국 몇 그릇 먹었어?” “여덟 그릇 먹었다. 왜? 어쩔래!”어릴 적 아이들과 말싸움할 때 흔히 주고받던 소리죠. 저마다 떡국 먹은 햇수로 나이를 따지며 어른들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왜 나이를 ‘먹는다’고 말할까요? 세상에 ‘나서’ 살아온 햇수를 계산하는 방법에 그 답이 있습니다.‘나이’의 단위 ‘살’은 ‘설’에서 유래했다고

    2024.02.08 16:42
  • "내가 살아난다면 1초도 허비하지 않을 텐데!" [고두현의 문화살롱]

    1849년 겨울, 칼바람이 몰아치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묘놉스키 연병장. 수천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반체제 지식인들이 끌려 나왔다. 한 장교가 “죄인들을 반역죄로 다스려 모두 총살한다”고 선고했다. 무장한 병사들이 머리에 두건을 씌웠다. 곧이어 사격 대열을 갖췄다. 일제히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 병사들….일촉즉발의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멈추시오!” 황제의 시종무관이 특사령을 갖고 황급히 달려왔다. 숨을 죽였던 사형수들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졌다. 이날 두 번째 줄에 서 있던 사형수 중 한 명은 28세 청년 작가 도스토옙스키(1821~1881). 죽음 직전에 회생한 그는 강제 노동형으로 감형돼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4년간 유형 생활을 한다. 인생이 장엄하고 비옥하려면그는 당시 죽다 살아난 체험과 심리 변화를 장편소설 <백치>에 이렇게 묘사했다. “만일 내가 죽지 않는다면 어떨까, 만일 생명을 되찾게 된다면 어떨까, 그것은 얼마나 무한한 것이 될까, 그리고 그 무한한 시간이 완전히 내 것이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는 1분의 1초를 100년으로 연장시켜 어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1분의 1초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한순간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그의 내면이 너무도 생생하다. 그는 <죄와 벌>에서도 죽음 직전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 평생, 1천 년 동안, 아니 영원히 1아르신(0.7㎡)밖에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

    2024.02.06 18:01
  • 청년 릴케가 루 살로메에게 바친 사랑시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내 귀를 막아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내 팔을 부러뜨려주소서, 나는 손으로 하듯내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을 것입니다,내 심장을 막아주소서, 그러면 나의 뇌가 고동칠 것입니다,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프라하 출신의 오스트리아 시인.시인 릴케가 22세 때인 1897년 5월 12일. 독일 뮌헨의 한 소설가 집에서 다과회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릴케는 14세 연상의 여인 루 살로메(1861~1937)에게 흠뻑 빠졌습니다. 그녀는 당대 최고 지식인이자 예술가들을 매료시킨 ‘세기의 여인’이었지요. 철학자 니체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도 그녀에게 반했습니다.무명 시인이던 릴케는 제대로 말도 붙여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속 깊이 솟아오르는 격정을 애써 누르기만 했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과 내가 보낸 어제의 그 황혼의 시간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달콤한 편지였지요.모성 결핍 시인과 미모·지성 겸비한 뮤즈처음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는 1년 전 그녀의 에세이집 <유대인 예수>를 읽고 감명 받아 익명으로 몇 편의 시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책을 통해 이미 깊은 교감이 있었다는 얘기죠. 그는 과감하게 “그 황혼의 시간에 나는 당신과 단둘이서만 있었습니다”라는 밀

    2024.02.05 10:00
  • 그가 끝까지 말하지 않은 비밀 [고두현의 아침 시편]

       우리 동네 느티나무들                     신경림산비알에 돌밭에 저절로 나서저희들끼리 자라면서재재발거리고 떠들어쌓고밀고 당기고 간지럼질도 시키고시새우고 토라지고 다투고시든 잎 생기면 서로 떼어 주고아픈 곳은 만져도 주고끌어안기도 하고 기대기도 하고이렇게 저희들끼리 자라서는늙으면 동무나무 썩은 가질랑슬쩍 잘라 주기도 하고세월에 곪고 터진 상처는긴 혀로 핥아 주기도 하다가열매보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을머리와 어깨와 다리에가지와 줄기에주렁주렁 달았다가는별 많은 밤을 골라 그것들을하나하나 떼어 온 고을에 뿌리는우리 동네 늙은 느티나무들------------------------느티나무에겐 비밀이 많습니다. 겨울눈을 감추고 봄을 기다리는 모습부터 뭔가 내밀한 사연을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추위가 꺾이고 바람결이 부드러워지면 연한 햇가지를 슬며시 내밀지요. 봄이 제대로 왔는지 조심스레 살피는 햇가지들의 움직임은 느리고 은밀합니다.꽃을 피울 때도 그렇습니다. 4~5월이 되면 가지의 잎겨드랑이에서 연녹색 꽃을 살살 밀어내지요. 놀랍게도 수꽃과 암꽃을 한 몸에 피웁니다. 수꽃은 햇가지 아래쪽에 여러 송이로 돋는데, 자세히 보면 수술이 4~6개 있습니다. 암꽃은 햇가지 끝에 한 송이만 피지요. 암술 한 개에 퇴화된 헛수술을 거느리기도 합니다.느티나무 꽃은 여느 나무와 달리 녹색입니다. 꽃잎이 없어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드물지요. 벌과 나비를 유인하는 향기도 없습니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에 꽃을 감추는 나무도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지요.하지만 이 볼품없는 꽃은 느

    2024.02.01 11:21
  • 거기서 내가 사랑에 빠질 줄은…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내가 라이오네스로 떠났을 때토머스 하디백 마일 밖 라이오네스로내가 떠났을 때나뭇가지 위에 서리는 내리고별빛이 외로운 나를 비췄지.백 마일 밖 라이오네스로내가 떠났을 때.라이오네스에 내가 머물 때거기서 무슨 일이 생길지어떤 예언자도 감히 말 못 하고가장 현명한 마법사도 짐작 못 했지.라이오네스에 내가 머물 때거기서 무슨 일이 생길지.내가 라이오네스에서 돌아왔을 때눈에 마법을 띠고 돌아왔을 때모두 말 없는 예감으로 눈여겨보았지.나의 드물고 깊이 모를 광채를내가 라이오네스에서 돌아왔을 때눈에 마법을 띠고 돌아왔을 때!* 토머스 하디(1840~1928): 소설 <테스>로 유명한 영국 작가이자 뛰어난 시인, 극작가.토머스 하디가 남긴 연애시입니다. 그는 영국 남부에 있는 도체스터에서 태어났습니다. 철도도 들어오지 않는 외진 곳이었지요. 아버지는 석공이었고, 어머니는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어린 시절의 하디는 내성적이고 몸이 약했습니다. 그가 학교에서 받은 교육은 약 8년뿐이었죠. 16세 때 건축사무소 수습공으로 들어간 뒤, 건축 업무와 소설·시 쓰기를 병행했습니다.건축기사와 귀족 딸의 은밀한 만남그의 시 중 가장 달콤한 것으로 꼽히는 ‘내가 라이오네스로 떠났을 때’는 서른 살 때의 사랑을 그린 것입니다. 그때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그해 봄 하디는 교회 건물을 수리하기 위해 콘월주에 있는 세인트줄리엇으로 파견됐습니다. 그곳 목사관에 에마 기퍼드라는 처녀가 있었죠. 성격이 활발하고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아가씨였습니다.그녀는 하디의 창작에 아주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둘은 곧 사랑에 빠졌지요. 그녀는 귀족 변호사

    2024.01.29 10:00
  •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꿈을 꾸라 [고두현의 아침 시편]

       고래의 꿈                       송찬호나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언젠가 고래를 만나면 그에게 줄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다깊은 밤 나는 심해의 고래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그들이 동료를 부르거나 먹이를 찾을 때 노래하는길고 아름다운 허밍에 귀 기울이곤 한다맑은 날이면 아득히 망원경 코끝까지 걸어가수평선 너머 고래의 항로를 지켜보기도 한다누군가는 이런 말을 한다 고래는 사라져버렸어그런 커다란 꿈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아하지만 나는 바다의 목로에 앉아 여전히 고래의 이야길 한다해마들이 진주의 계곡을 발견했대농게 가족이 새 뻘집으로 이사를 한다더군봐, 화분에서 분수가 벌써 이만큼 자랐는걸……내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 내일은 5마력의 동력을배에 더 얹어야겠다 깨진 파도의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겠다저 아래 물밑을 쏜살같이 흐르는 어뢰의 아이들 손을 잡고 해협을 달려봐야겠다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오랜 꿈이 있다하얗게 물을 뿜어 올리는 화분 하나 등에 얹고어린 고래로 돌아오는 꿈---------------------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꿈을 꾸라고 했죠? 시인은 작은 화분 하나를 키우며 심해의 고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래는 대양의 커다란 꿈, 즉 희망을 가리키지요. 사람들이 고래는 사라져 버렸다고 말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희망의 이야기에 주파수를 맞춥니다.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고래의 이야기를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는 밤마다 자신의 꿈이 이뤄지길 소망하며 길고 아름다운 고래의 허밍에 귀를 기울이지요. 그러면서 희망을 위해 5마력의 동력을

    2024.01.25 17:33
  • '불행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행복론 [고두현의 문화살롱]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오랫동안 아웃사이더였다. 63세 때까지 ‘무명’이었다. 학계에서 따돌림당했고 대중적인 인기도 없었다. 성격이 모난 데다 얼굴이 못생겼으며, 여자를 미워해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다. 32세에 베를린대 강사가 됐지만, 당대 최고 스타 헤겔에게 맞서 강좌를 개설했다가 수강생이 한 명도 없는 참패를 당했다.이후 교수직을 포기하고 고독과 좌절, 공포와 망상에 사로잡혀 지냈다.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발사에게 면도하지 못하게 하는 등 엽기 행각으로 비웃음까지 샀다. 그는 이 세상을 비참하고 음침한 곳이라고 여겼다. 유행에 뒤떨어진 옷차림으로 극도의 금욕 생활을 고집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그의 비관주의와 염세주의가 싹텄다. 고슴도치처럼 적절한 간격을30세에 철학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펴냈으나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는 당시의 ‘합리적 이성론’에 반기를 들면서 이 세계가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의지’(욕망)에 의해 움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욕망은 채우고 채워도 충족될 수 없기에 인생이 고통스럽다며 이를 넘어서는 방법은 충동과 욕구를 거스르는 철저한 금욕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없었다.그의 인생에 반전이 일어난 것은 노년기였다. 63세 때 펴낸 얇은 책 <소품과 부록>이 뜻밖의 호응을 얻었다. 이 책은 딱딱한 철학서가 아니라 청춘을 위한 에세이였다. 명쾌한 인생 격언을 문학적 재치와 유머로 풀어낸 덕분에 그는 탁월한 글쓰기와 최고급 산문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70세 생일에는 유럽 각국의 축사가 쇄도했다. 훗날 니체와 아인슈타인, 바그너

    2024.01.23 18:02
  • 여관방 벽지에 쓴 인생시 '죽편' [고두현의 아침 시편]

    죽편(竹篇)1 - 여행서정춘여기서부터, -멀다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를 타고대꽃이 피는 마을까지백 년이 걸린다.* 서정춘 : 1941년 전남 순천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죽편>, <봄, 파르티잔>, <귀>, <물방울은 즐겁다> 등 출간. 박용래문학상, 순천문학상, 최계락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인생을 대나무와 기차에 비유한 명시입니다. ‘죽편’은 가객 장사익의 노래로도 유명하지요. 서정춘 시인이 1980년대 후반, 허름한 여관방에서 누군가를 종일 기다리다 번개같이 떠오른 시구를 벽지에 휘갈겨 썼다고 합니다.“그날 혼자 여관방에서 ‘인생이란 대체 뭐길래 내가 여기까지 왔나, 왜 왔나, 여기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온갖 상념으로 7시간을 뒤척였죠.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부터, -멀다’라는 시구가 번개같이 떠오르는 거예요. 종이가 없어서 그걸 여관 벽지에다 썼지요….”이 시의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는 끝없는 인생의 여정을 닮았습니다. 시인은 ‘여기서부터,’라고 쉼표를 찍어 반박자 쉰 다음, 하이픈을 그어 또 호흡을 조절하면서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가 얼마나 먼지를 절묘하게 표현했지요. 5행 37자 압축미의 극치입니다.4년 동안 80번 이상 고치고 또 고친 시원래 초고는 25행이 넘었다고 합니다. 여관방도 등장하고 몇 시간이나 사람을 기다리던 얘기도 들어 있고, 이래저래 군더더기가 많았다는군요. 그는 이 시를 4년 동안 80번 이상 고치고 또 고쳤습니다. 그러면서 고향 순천에 많던 대나무와 대나무 막대를 가랑이에 끼고 기차놀이하던 기억, 거기에 대나무의 수직 이미지와

    2024.01.22 10:00
  • 83세에 과거 합격한 조수삼 이야기 [고두현의 아침 시편]

    사마시 합격 날 일곱 걸음에 쓴 시                                 조수삼뱃속에 든 시와 책이 몇백 짐인데올해에야 가까스로 난삼을 걸쳤네.사람들아 몇 살인지 묻지를 마소.육십 년 전에는 스물셋이었다오.태평성대에도 벼슬은 허망하지만사람들이 다 늙은이 얘기하며 웃네.성균관 진사시 이번 발표 보고온 나라가 조수삼 이름에 놀라네.司馬唱榜日口呼七步詩腹裡詩書幾百擔 今年方得一襴衫傍人莫問年多少 六十年前二十三堯舜君民妄夯擔 相逢人笑老生談成均進士今春榜 一國皆驚趙秀三---------------------------이 시는 조선 시대 중인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이 83세 때 사마시(司馬試, 진사시)에 급제하고 쓴 것입니다. 합격자 발표에서 자기 이름을 본 그의 심정이 어땠는지, 풍자와 해학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여기에서 난삼(襴衫)은 진사 합격자가 입는 예복을 말합니다.사마시는 대과(大科)가 아닌 소과(小科)로서 진사시와 생원시로 나뉩니다.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고 하급 관리가 되기도 하죠. 그가 받은 벼슬은 오위장(五衛將)이었습니다. 하지만 도성 내외를 순찰하는 무관 임무여서 그의 나이를 배려한 상징적인 벼슬이었던 것 같습니다.그는 19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리얼리즘 시인이었습니다. 4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해 8세에 시를 지었고 12세에 백일장에서 이름을 떨쳤지요. 안대회 명지대 교수는 그를 “조선 순조 연간에 제일가는 한시 작가”라고 평했습니다.그는 만능 기예인이기도 해서 그림과 의학, 거문고에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바둑의 고수였고 우스갯소리에 능한 개그맨이기도 했죠. 젊어서부터 사신단을 따라 6차

    2024.01.18 16:32
  • 오만과 편견은 사랑의 올무 [고두현의 인생명언]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하고,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영국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이 소설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에서 한 말이다. 그녀는 영국 BBC의 ‘지난 1000년간 최고 문학가’ 조사에서 셰익스피어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인기 작가. 영국 남부 햄프셔주 스티븐턴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가족과 이웃의 사랑을 받았고 15세부터 단편소설을 썼다. 편지 쓰는 것도 즐겨 평생 3000여 통을 보냈다. 첫사랑은 스물한 살 때 만난 아일랜드 청년 톰. 둘은 거의 결혼 직전까지 갔다. 그녀가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사답고 잘생기고 유쾌한 청년’이라며 ‘내일이면 청혼받을 것 같다’고 썼던 남자다. 하지만 톰 가족의 반대로 결혼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 상처를 안고 쓴 소설이 <첫인상>이다. 모든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한 이 작품은 17년 후인 1813년에야 <오만과 편견>이란 제목으로 빛을 봤다. 이 작품의 인세는 고작 110파운드였다. 저작권까지 넘겨야 했기 때문에 같은 해 2쇄를 찍었지만 더 이상 돈은 못 받았다. 2년 앞서 발표한 소설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으로는 140파운드를 받았지만 제작비를 지급해야 했다. 그렇게 평생 받은 인세는 710파운드에 불과했다. <오만과 편견> 속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아버지의 연 수입이 2000파운드, 언니 제인의 남자 빙리의 연 수입이 4000파운드인 걸 보면 초라한 액수다. 엘리자베스의 남자 다아시는 연간 1만 파운드를 벌었다고 나온다. 작품으로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경제적 자립을 이루기엔 턱없이 부족했

    2024.01.16 17:24
  • 내 인생의 주행거리는 얼마나 될까? [고두현의 아침 시편]

    인생                          유자효 늦가을 청량리할머니 둘버스를 기다리며 속삭인다"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유자효 : 1947년 부산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직>, <심장과 뼈>, <사랑하는 아들아>, <성자가 된 개>, <내 영혼은>, <떠남>, <짧은 사랑>, <꼭> 등 출간.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신설동에서 청량리까지는 시내버스로 네 정거장, 약 15분 거리입니다. 지하철로는 2구간 4분,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 거리죠. 걸어가도 30분이면 됩니다. 이 짧은 거리가 두 할머니에게는 여태까지 걸어온 인생의 주행거리입니다.이 시는 속도와 시간, 거리와 공간의 의미를 사람의 일생으로 응축해 보여줍니다. 이런 장면을 포착해서 순간 스케치처럼 보여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시인이 보여주는 풍경의 한편에는 ‘느린 속도’와 ‘멈춘 걸음’과 ‘생의 비의’가 함께 있습니다.“속도를 늦추자 세상이 넓어졌다”그 속에서 깊은 성찰의 꽃이 피어납니다. 유자효 시인은 평생 시인과 방송기자라는 두 길을 바쁘게 걸어왔습니다. 부산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진해군항제 백일장 등의 장원을 휩쓸고, 대학 시절 가정교사로 바쁜 중에도 스물한 살 때 신춘문예로 등단했습니다. 그 뒤로는 기자가 되어 KBS 파리 특파원과 SBS 정치부장, 보도제작국장, 논설위원실장 등으로 종횡무진했죠.은퇴 후 “어릴 때부터 걷고 싶었던 시인과 기자의 두 길”을 ‘한 길’에서 만나게 되면서 그는 더 내밀한 세상의 풍경을 들여다보기 시작했

    2024.01.15 10:00
  • 우리의 매력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나는 배웠다                    오마르 워싱턴나는 배웠다.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임을.사랑을 받는 일은 그 사람의 선택에 달렸으므로.나는 배웠다. 아무리 마음 깊이 배려해도어떤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것을.인생에선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보다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우리의 매력은 15분을 넘지 못하고그다음은 서로 배워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하기보다나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을.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보다그 일에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내도 거기엔 늘 양면이 있다는 것을.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사랑하는 사람에겐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놓고 떠나야 함을.더 못 가겠다고 포기한 뒤에도 훨씬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을 나는 배웠다.깊이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드러낼 줄 모르는 이가 있다는 것을.내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남을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정이 계속되듯 사랑 또한 그렇다는 것을.가끔은 절친한 친구도 나를 아프게 한다는 것을.그래도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남에게 용서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아무리 내 마음이

    2024.01.11 17:26
  • 나는 '참치형'인가 '가자미형'인가? [고두현의 문화살롱]

    벌써 열 번째 새날이다. 새해 첫날 아침의 푸른 다짐은 그새 빛이 바랬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도 맥없이 무너졌다. 지난해처럼 또 작심삼일로 끝나려나. 야무진 계획은 흐릿해지고 몸놀림이 둔해졌다. 자벌레 걸음처럼 느린 움직임에 조바심까지 난다.바다 생물 중 가장 빠르고 부지런한 것은 참치다. 참치는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린다. 태어날 때부터 끊임없이 헤엄을 쳐야만 살아남는다. 헤엄을 멈추면 질식해 죽는다. 아가미 근육이 없기에 입으로 물을 빨아들여야 숨을 쉴 수 있다. 잠을 잘 때도 뇌만 쉴 뿐 몸은 계속 움직인다. 그래서 참치에게는 넓은 대양이 필요하다.참치는 원래 다랑어류만 지칭하는 단어였지만 지금은 다랑어류와 새치류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최고 시속 112㎞를 자랑한다. 그래서 ‘바다의 치타’로 불린다. 미끈한 몸체에 날쌘 몸짓, 물의 저항력을 이기고 자유자재로 방향을 전환하는 힘까지 갖췄다. 가장 빠른 치타도 지구력은 약해반대로 가자미는 느리다. 모래 밑에 배를 깔고 있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그제야 움직인다. 평소에도 헤엄을 친다기보다는 물결에 떠다닌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다. 아무리 넓은 바다에 살아도 가자미의 바다는 작은 연못과 다름없다. 이어령 선생은 이 둘을 비교하며 삶의 유형을 ‘참치형’이냐 ‘가자미형’이냐고 묻곤 했다.그러면서 “어느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정답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운명이 가자미형에서 참치형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때 은둔의 나라로 불리던 한국은 시속 100㎞ 이상으로 오대양을 누비는 참치 어군처럼 전 세계에서

    2024.01.09 17:27
  • '닥터 지바고' 영화를 그대로 압축한 시 [고두현의 아침 시편]

    겨울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눈보라가 휘몰아쳤지.세상 끝에서 끝까지 휩쓸었지.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여름날 날벌레 떼가날개 치며 불꽃으로 달려들듯밖에서는 눈송이들이 창을 두드리며날아들고 있었네.눈보라는 유리창 위에둥근 원과 화살들을 만들었고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 비친 천장에는일그러진 그림자들엇갈린 팔과 엇갈린 다리처럼운명이 얽혔네.그리고 장화 두 짝바닥에 투둑 떨어지고촛농이 눈물 되어 촛대서옷 위로 방울져 떨어졌네.그리고 모든 것은 눈안개 속에희뿌옇게 사라져 갔고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틈새로 들어온 바람에 촛불 날리고유혹의 불꽃은천사처럼 두 날개를 추켜올렸지.십자가 형상으로.눈보라는 2월 내내 휘몰아쳤지.그리고 쉬임없이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 : 러시아 시인이자 소설가.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닥터 지바고>를 그대로 압축해놓은 듯하죠?이 시 ‘겨울밤’의 배경은 암흑 속의 러시아 혁명기입니다. ‘눈보라’는 시베리아까지 휘몰아친 혁명의 소용돌이를 상징하지요. ‘촛불’은 시대의 광풍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개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엇갈리는 ‘운명의 그림자’는 소설 주인공인 유리와 라라를 닮았습니다. 당국 압박에 노벨상도 거부해야 했던…비운의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삶도 그랬지요. 그의 본업은 소설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습니다. <닥터

    2024.01.08 10:00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풀꽃·1                 나태주자세히 보아야예쁘다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새해 첫 시로 나태주 시인의 ‘풀꽃·1’을 골랐습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작품은 5행 24자로 이뤄진 짧은 시죠. 30여 년간 ‘광화문 글판’에 실린 글귀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시가 실린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는 나태주 시인의 시집 중에서 최고 판매 부수를 기록했죠. 그의 시가 이렇게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누구에게나 쉽게 와 닿는다는 것입니다. 시가 쉽고 가깝고 작은 것 속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듯하죠. ‘풀꽃·1’은 시인이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때 아이들에게 들려준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숲속 마을의 작은 초등학교에서는 교장 선생님도 한 반씩 돌아가며 수업을 해야 했습니다. 미술 시간을 맡은 어느 날,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 풀꽃을 그리자고 졸랐어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 아픈 엄마와 함께 사는 아이, 아빠가 안 계시는 아이, 그림 그리기를 싫어하는 아이…. 저마다 사연 많은 아이들이 풀꽃 앞에 앉아 서투르게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그림 같았습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풀꽃을 그리려면 눈을 바짝 갖다 대고 관찰해야 하지요. 그렇게 아이들은 풀꽃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면서 “예쁘다”고 말했습니다. 외로운 것 같지만 함께 모여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면서 깔깔거리기도 했죠.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 그 모습을 하나씩 떠올리며 시를 써서 칠판에 적어

    2024.01.04 15:33
  • 첫날밤 자작나무 껍질로 밝힌 화촉 [고두현의 아침 시편]

    백화(白樺)백석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제목의 ‘백화(白樺)’는 껍질이 흰 자작나무를 가리킵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시베리아의 광활한 자작나무 숲이 떠오르는군요. 눈부신 설원의 은빛 장관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아쉽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강원 산간에서만 볼 수 있지요. 인제 자작나무숲은 1990년대 초부터 인공림으로 키운 것입니다.백석은 이 시에서 산골집과 장작과 박우물 등 모든 게 자작나무라고 노래했습니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어디일까요. 그가 이 시를 쓴 장소는 함경남도 함주군입니다. 남동쪽으로 동해가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 평안남도와 경계를 이루는 이곳은 산지마다 자작나무숲이 울창한 지역이지요.자작나무는 시베리아와 만주, 한반도 북부 지역의 혹한을 얇은 껍질로 견딥니다. 흰 껍질이 여러 겹이고 기름 성분이 풍부해서 나무의 속살은 얼지 않죠.윤기 나는 껍질은 종이처럼 얇게 벗겨집니다. 기름기가 많아 불을 붙이면 오래가지요. 신혼 방을 밝히는 화촉(華燭)이나 결혼식에 쓰는 화혼(華婚)이 여기서 온 말입니다. 자작나무 껍질로 호롱불을 밝히면 밤새 불타는 소리가 ‘자작자작’ 난다고 합니다. 이는 자작나무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죠.옛날엔 종이를 대신해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도 썼습니다.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된 ‘천마도&

    2023.12.28 16:43
  • "길고 난해한 시는 가라"…짧은 4행시 '바람' [고두현의 문화살롱]

    돌담 - 최동호제주 남풍 파도 타고아무리 불어도노래하던 처녀애들 치마끈 풀어야돌담에 봄바람 난다기쁨, 슬픔 - 나기철이 섬 안에네가 있는 거이따금 멀리서볼 수 있는 거금동반가사유상 - 서정춘저 다리하며 그 무릎 위에턱 괴고 앉았기로천년 시름이겠구나진즉에 그 자리가 내 자리였느니,막간 - 문태준아침 이슬이 다 마르도록 울더니밤이슬이 내릴 때 또 우네아침 귀뚜라미에게 물었더니밤 귀뚜라미가 울며 말하네‘저 다리하며 그 무릎 위에/ 턱 괴고 앉았기로/ 천년 시름이겠구나/ 진즉에 그 자리가 내 자리였느니,’ 서정춘 시인의 4행시 ‘금동반가사유상’이다. ‘죽편’ 등 짧고 강렬한 시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그는 단시(短詩)의 대가로 불린다. 요즘은 4행시에 매료돼 있다.최근 출간된 계간 <서정시학> 100호는 서정춘 시인을 비롯한 26명의 4행시를 특집으로 꾸몄다. 참여 시인들의 연령대는 80대 원로부터 40대까지 다양하다. 문장은 짧지만 빼어난 서정과 서사를 겸비한 작품이 많다. 길고 난해한 ‘해체시’, 수다스러운 ‘장거리 시’에 잠식당한 국내 시단에 ‘4행시 운동’이 새바람을 일으키는 모양새다. 1400년이 넘는 4행시의 역사나기철 시인의 ‘기쁨, 슬픔’이라는 시는 ‘이 섬 안에/ 네가 있는 거// 이따금 멀리서/ 불 수 있는 거’라는 20자짜리다. 그 속에 사랑과 아픔의 이중적 정서를 고요히 담아냈다. 문태준 시인은 ‘막간’이라는 시에서 ‘아침 이슬이 다 마르도록 울더니/ 밤이슬이 내릴 때 또 우네/ 아침 귀뚜라미에게 물었더니/ 밤 귀뚜라미가 울며 말하네’라고 노래했다. 아침저녁의 대비가 정갈하면

    2023.12.26 18:14
  • 생업(生業)이 직업(職業)보다 숭고한 이유 [고두현의 아침 시편]

    생업                                윤효종로6가 횡단보도원단두루마리를 가득 실은 오토바이들이숨을 고르고 있었다.신호총이 울렸다.장애물을 요리조리 헤치며동대문시장 안 저마다의 결승선을 향해순식간에 사라졌다.좀처럼 등위를 매길 수 없었다.모두 1등이었다.* 윤효: 1956년 충남 논산 출생.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물결> <얼음새꽃> <햇살방석> <참말> <배꼽> 등 출간. 편운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풀꽃문학상 등 수상.벌써 12월 말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 짧으면서도 강렬한 시 ‘생업’을 소개합니다.생(生)은 윤효 시인의 문학적 화두 중 하나입니다. 생이란 ‘생명’과 ‘목숨’의 비밀을 여는 열쇳말이죠. 나무로 치자면 가장 큰 가지, 풀꽃으로 치면 가장 실한 줄기가 곧 생입니다. 갑골문에서 ‘생(生)’은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날 생(生)이고, 낳을 산(産)입니다. 이 글자는 살 활(活)과 있을 존(存)의 뜻까지 아우르지요.생업(生業)은 목숨 걸고 집중하는 일이 가운데 생업(生業)은 우리가 목숨을 영위하기 위해, 먹고살기 위해 집중하는 일입니다. 각자 맡은 일을 하는 직업(職業)과 다르죠. 윤효 시인은 분초를 다투며 원단을 실어 나르는 시장통 오토바이 짐꾼들을 보면서 ‘생업’이라는 시를 썼습니다.이 시에는 ‘숨을 고르고’ 잔뜩 긴장해 있다가 ‘땅’ 하는 총소리를 듣자마자 튀어 나가는 달리기 선수들의 속도가 응축돼 있습니다. ‘장애물을 요리조리

    2023.12.25 10:00
  • ‘세한도 정신’의 유안진 시인 별명은 ‘숙맥’ [고두현의 아침시편]

      세한도 가는 길                      유안진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오십령 고개부터는추사체로 뻗친 길이다천명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닳고 터진 알발로뜨겁게 녹여가라신다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세한도(歲寒圖)’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 유배 시절에 그린 수묵화입니다. 초라한 토담집 한 채를 사이에 두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서 있는 겨울 풍경을 묘사했지요. 갈필로 거칠게 붓질한 이 작품에는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세월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정신의 품격이 새겨져 있습니다. 추사는 그림 발문에 선비의 지조와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에게 이 그림을 준다고 밝히면서 ‘논어’의 한 대목인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추위가 닥친 뒤라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를 인용했지요.  유안진 시인은 절해고도에 유배된 추사를 떠올리며 스스로 유배자가 되어 자신을 채찍질하는 마음을 시 ‘세한도 가는 길’에 담았습니다. 제목이 ‘세한도 가는 길’인 것은 시인이 가 닿고자 하는 곳이 유배의 섬(島)이고, 그 여정이 곧 길(道)이라는 의미이겠죠?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라는 표현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렇게 치열한 시를 쓰는 유안진 시인의 별명은 뜻밖에도 ‘숙맥’입니다. 콩(菽·숙)과 보리(麥·맥)도 구별 못 할 정도

    2023.12.21 14:47
  • “때론 마지막 열쇠가 자물쇠를 연다” [고두현의 인생명언]

    “절망하지 마라. 종종 열쇠 꾸러미의 마지막 열쇠가 자물쇠를 연다.”18세기 영국 정치사상가 필립 체스터필드가 아들에게 들려준 교훈이다. 옛날에는 여러 개의 열쇠를 한 꾸러미에 엮어서 다니다 하나씩 자물쇠 구멍에 맞추곤 했다. 개중에는 마지막에야 열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다.베네수엘라의 다이아몬드 채집꾼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 마른 강바닥에서 다이아몬드가 섞였을지 모르는 조약돌을 수없이 집어 들었다 내려놓던 그는 마지막 순간에 포기하려다 한 번 더 돌을 집었다. 그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난히 묵직한 그 돌은 크고 순도 높은 다이아몬드 원석이었다.최고의 보석인 다이아몬드는 탄소 원소로 구성돼 있다. 연필심에 쓰이는 흑연도 그렇다. 오랜 세월 땅속에서 높은 압력을 견디면 다이아몬드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흑연이 된다. 역경을 이겨야 보석이 되는 것이다.포기하지 않고 절망을 이긴 사람에게는 새로운 문이 열린다. <실낙원>의 작가 존 밀턴은 44세에 시력을 잃었다. 청교도 혁명을 지지했던 그는 반대파로부터 처형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눈이 먼 상태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딸들에게 원고를 구술해 <실낙원>과 <복낙원> <투사 삼손> 등의 걸작을 남겼다.올해도 모두 애썼다. 경기 침체와 정치권의 편싸움까지 겹쳐 온 나라가 힘겨웠다.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직장을 잃은 가장과 가게 문을 닫아야 했던 자영업자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입시에 실패하거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웠을까.그러나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 포기하지 말자. 어

    2023.12.18 17:28
  • 이해인 수녀가 암을 이긴 비결 [고두현의 아침 시편]

    가장 거룩한 것은장재선겨울 끝에서 봄이 일어나는 것처럼명랑 투병으로 희망을 일으킨다는당신,웃는 얼굴이 떠오릅니다.단정한 시를 쓰는 분이그렇게 말이 빠를 줄은 몰랐지요.암을 다스리는 분이그렇게 많이 웃을 줄도 몰랐지요.교도소 담장 안의 이들과편지를 나눈 이야기를 하다가세상 떠난 이들이 사무쳤던당신,끝내 눈시울을 붉혔지요.가장 거룩한 신앙은가장 인간적인 것임을 알려준당신,웃다 울다 하는 모습이예뻤어요.* 장재선: 1966년 전북 김제 출생. <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기울지 않는 길>, <시로 만난 별들> 등 출간. 서정주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등 수상.장재선 시인은 문학 담당 기자이기도 합니다. 암 투병으로 고생하던 이해인 수녀를 만나고 나서 ‘가장 거룩한 것은’이라는 시를 썼다고 해요.‘시 쓰는 수도자’ 이해인 수녀에게 암이 발병한 것은 2008년 여름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한 것과 달리, 정작 그는 ‘명랑 투병’이라는 신조어를 낳을 만큼 밝고 명랑했지요. 이 시의 첫 구절 ‘겨울 끝에서 봄이 일어나는 것처럼’ 맑은 모습 그대로였습니다.“명랑 투병? 하하. 제 이름이 명숙이에요”‘명랑 투병’이란 표현은 어떻게 나왔을까요? 이해인 수녀가 문화부 기자인 장재선 시인에게 들려준 얘기는 이렇습니다.“명랑 투병? 하하. 제 주민등록상 이름이 명숙이에요. 밝을 명, 맑을 숙. 암센터에서 진단받았을 때 의사 선생님이 수술 먼저 하겠느냐, 방사선 치료 먼저 하겠느냐고 묻더군요.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즉시 표정을 밝게 하고 답했지요. 60여 년 살았으니까 됐어요. 선생님 좋은 대로 하셔요. 이후의 결과에

    2023.12.18 10:00
  • 진정한 부자, 세상이 모두 내 집일세 [고두현의 아침 시편]

    십 년을 경영하여송순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 세 칸 지어내니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 두고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면앙정 송순(宋純,1493~1583)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시조에 뛰어났습니다. 문집으로 <기촌집> <면앙집>이 있고, ‘면앙정가(俛仰亭歌)’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지요.이 시조 ‘십 년을 경영하여’에서 그는 초가집 한 채를 지어놓고 그 속에 세상을 다 들여놓았습니다. 내가 묵을 방 한 칸, 달이 들어올 방 한 칸, 거기에 청풍이 노닐 방 한 칸. 더 이상 들여놓을 데 없는 강산까지 병풍처럼 둘러놓고 보니 남부러운 것 없는 집입니다.얼마나 여유로운가요. 덕분에 초가삼간은 천하를 품을 만큼 커다란 집, 우주(宇宙)의 집이 됐습니다.욕심과 여유는 매우 다르지요. 욕심은 ‘마이너스 에너지’여서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채워집니다. 그래서 자신과 남을 다 같이 빈곤하게 만들죠. 그러나 여유는 ‘플러스 에너지’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게 아니라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더 큰 풍요를 선사하지요.그래서 욕심 많은 부자는 남의 곳간을 탐내고, 진정한 부자는 남의 곳간이 가득한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세상엔 부자가 많지만 이처럼 마음마저 풍요로운 부자는 드물지요.척 피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집도 차도 없는 ‘가난뱅이’입니다. 시계도 몇만 원짜리를 차고 다니고 밥도 허름한 식당에서 먹습니다. 그러면서도 25년간 4조원이 넘는 돈을 남몰래 기부해왔습니다.그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 ‘숨은 억만장자’입니다. 미국과 아일랜드, 베트남, 태국, 남아공, 쿠바 등 세계 곳

    2023.12.14 14:52
  • 장욱진은 왜 까치를 많이 그렸을까 [고두현의 문화살롱]

    “뭐 하는 사람이오?” “까치 그리는 사람입니다.” 통도사 스님의 질문에 대한 화가 장욱진(1917~1990)의 답이다. 장욱진은 까치를 유난히 좋아했고 그림으로 많이 그렸다. 그가 남긴 유화 730여 점 중 440점에 까치가 등장한다. 전체의 60%가 넘는다. 초등학교 시절인 1925년부터 죽을 때까지 까치를 그렸으니 65년간이나 고락을 함께했다.초등학교 때 그는 미술책에 그려진 까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몸통을 온통 새까맣게 칠하고 눈만 하얗게 칠한 까치를 그렸다. 이 그림은 일본인 미술 교사의 배려로 ‘전일본소학생미전’에 출품됐다. 결과는 1등상이었다. 이때 부상으로 받은 유화물감으로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양정고보 4학년 때 전조선학생미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자화상'의 까치는 '우리 네 식구'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마련된 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에서도 ‘까치 화가’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며칠 전 찾은 전시장은 평일인데도 관람객들로 붐볐다. 2층 전시장 초입에 까치 그림 3점이 나란히 걸려 있다. 같은 소재를 그렸지만 느낌과 표현법이 모두 다르다.첫 번째 작품 ‘까치’(1958)는 화면을 가득 채운 둥근 형상의 나무 속에 까치가 있는 그림이다. 오른쪽에는 푸른 달이 걸려 있다. 이 그림은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고 긁어내는 과정을 통해 완성했다. 긁어내는 작업이 까치 울음소리를 연상케 해 ‘청각의 시각화’를 가장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그 옆에 걸린 작품 ‘새와 나무’(1961)는 김원룡 서울대 고고미술학과 교수가 당시 한 달 월급이었던 2만환을 봉투째 놓고 구입한

    2023.12.12 18:34
  • 그가 집착에서 벗어난 비결은? [고두현의 아침 시편]

    기심을 내려놓다(息機) 이색 이미 지나간 아주 작은 일들도 꿈속에선 선명하게 생각이 나네. 건망증 고쳐 준 사람 창 들고 쫓아냈다는 그 말도 참으로 일리가 있네. 아내를 놔두고 이사했다는 것 또한 우연히 한 말은 아닐 것이라 싶네. 몇 년간 병든 채로 지내온 지금 기심(機心)을 내려놓는 것이 약보다 낫네. *이색(李穡, 1328~1396): 고려 시인, 대학자 오늘은 고려 말기 시인이자 대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를 읽습니다. 그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고려삼은(高麗三隱)으로 추앙받은 인물이지요. 14세 때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한 수재였습니다. 원나라에서도 과거에 급제해 양국 관리를 겸할 만큼 재주가 뛰어났다고 합니다.건망증 고쳐준 사람을 쫓아내다니그런 그도 여말선초 격변의 역사 속에서 몇 차례나 유배와 추방을 당했습니다. 첫째와 둘째 아들이 살해되는 고통까지 겪었지요. 역성혁명에 협력하지 않아 한때 제자였던 정도전과 조준 등이 겨눈 칼날 앞에 서야 했습니다. 새 정권의 권유를 뿌리치고 낙향했지만, 아들들의 죽음 때문에 결국에는 깊은 병을 얻었죠. 시골집에 은거한 지 2년 만에 부인이 죽고, 그로부터 2년 뒤엔 그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시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기심을 내려놓다(息機)’의 행간은 더없이 쓸쓸하고 애잔합니다. 마지막 구절 “기심(機心)을 내려놓는 것이 약보다 낫네”에 주제가 함축돼 있지요. 기심이란 무엇일까요?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마음, 책략을 꾸미는 마음을 말합니다.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싫으니 따지는 마음을 내려놓고 정신을 쉬게 해야 비로소 온전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얘기지요. 이

    2023.12.11 10:00
  • 뒷사람의 몫을 남겨두라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난을 가꾸는 뜻 정섭 구 원(畹) 넓이 난초 가꾼 강변 텃밭 팔 원(畹)만 그리고 다 마치지 못하였네. 세상만사 만족스러운 때 언제 있었더냐 나머지 가꾸는 일은 뒤에 오는 사람의 몫. 八畹蘭 九畹蘭花江上田, 寫來八畹未成全. 世間萬事何時足, 留取栽培待後賢. ---------------------------- 시서화에 뛰어났던 청나라 시인 정섭(鄭燮, 1693~1765)의 시입니다. “대나무를 그리면서 벌과 나비가 수선 떠는 것을 피하려 꽃을 그리지 않았다”던 그의 성정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죠. 이 시에 나오는 구원(九畹)은 초나라 시인 굴원의 난초밭 넓이를 말합니다. 시인은 구원 중에서 팔원만 그리고 나머지는 뒤에 오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놓는다고 노래합니다. 완전무결한 결과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배움, 또는 덕성을 중요히 여기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누구나 무슨 일을 할 때 완결을 목표로 하지만 미완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과 지상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성과에 집착하게 되죠. 그렇다 보니 과정의 정당성과 노력의 가치보다 요령과 편법이 우대받는 현상까지 생깁니다. 많은 사람을 감동케 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떠오릅니다. 알다시피 이 영화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요. 결과 지상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에게 메달의 가능성은 없어 보였습니다. 이미 은퇴하여 아줌마가 다 된 선수들을 불러 모아 급조한 팀인데다, 국가대표 선수라고는 하지만 일당이 2만원밖에 안 되는 열악한 조건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들은 최종 결승전까지 진출했습니다.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며 혈투를 벌인

    2023.12.07 15:08
  • “과학은 최신 연구서, 문학은 오래된 책을 택하라” [고두현의 인생명언]

    “과학에서는 최신의 연구서를 읽고, 문학에서는 가장 오래된 책을 읽어라!” 장편 역사소설 을 쓴 에드워드 불워 리튼이 한 말이다. 최신 정보가 필요한 경우와 오랜 성찰의 지혜가 필요한 경우에는 읽는 책도 달라야 한다는 얘기다. 오래된 고전 명작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고전이야말로 인문정신과 과학기술의 접점에서 꽃을 피우는 ‘창의의 뿌리’다.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길잡이가 곧 고전이다. 인류 문명의 빛나는 원석들을 한군데 모아 새로운 아이디어를 번뜩이게 하는 부싯돌 역할까지 한다.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고전 다시 읽기에 나선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자. 미국 저술가 데이비드 덴비는 대학 입학 30년 만인 1991년 모교인 컬럼비아대 후배들 틈에 끼여 ‘인문학’과 ‘현대문명’ 두 강좌를 청강하며 고전을 다시 꺼내 들었다. 나이 50을 앞두고 고전의 황홀경에 빠진 그는 호메로스의 를 새로 읽은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대기에 충만한 야만적 활력, 장대한 전함, 바람과 불길, 맹렬한 전투, 겁에 질린 말들로 가득 찬 평원. 땅바닥에 엎어져 죽은 전사들, 산산조각 난 고향과 가족, 초원, 평화의 제의에 대한 염원, 이 모든 것을 거친 뒤 마침내 화해의 순간이 도래한다.” 그는 전쟁터의 참상을 끔찍하게 묘사한 야만성과 여성을 물건처럼 다루며 자존심만 앞세우는 그리스인의 모습에 경악하다가 점차 그것이 문화적 이질성에서 비롯된 시각차라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대 윤리의 현주소와 우리 자신을 거울에 되비춰보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을 읽으

    2023.12.0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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