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인사
전윤호

그 바닷가에서 당신은
버스를 탔겠지
싸우다 지친 여름이 푸르스름한 새벽
내가 잠든 사이
분홍 가방 끌고

동해와 설악산 사이
외줄기 길은 길기도 해
다시는 만날 수 없었네

자고 나면 귀에서 모래가 나오고
버스만 타면 멀미를 했지
아무리 토해도 멈추지 않고
정신없이 끌려가던 날들

가는 사람은 가는 사정이 있고
남는 사람은 남는 형편이 있네
더 이상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 나이

잘 가 엄마
아지랑이 하늘하늘 오르는 봄
이제야 미움 없이
인사를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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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모 장명화 씨에게 보내는 전윤호(윤종) 시인의 ‘늦은 인사’ [고두현의 아침 시편]
‘잘 가 엄마’라는 대목에서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짜고 붉은 눈물이 아니라 맑고 투명한 눈물이었습니다. ‘이제야 미움 없이/ 인사를 보내’라는 마지막 구절 덕분이었지요. 서운함이나 원망 같은 감정의 앙금을 말갛게 헹궈낸 관조와 해원, 화해와 성찰의 꽃이 그곳에서 피어납니다.

이 시에는 전윤호 시인의 아픈 개인사가 투영돼 있습니다. 첫머리의 ‘그 바닷가’는 동해안 최북단에 있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입니다. 시인의 고향 정선에서 차로 두 시간 가야 닿는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는 소규모 병원을 운영하셨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어느 날 ‘싸우다 지친 여름’ 새벽, 버스를 타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길을 떠나버렸습니다. 어린 그가 ‘잠든 사이’에 말이지요.

그때 그의 나이는 4~5세. 아이는 ‘동해와 설악산 사이/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난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자고 나면 귀에서 모래가 나오고/ 버스만 타면 멀미를 했’으며 ‘아무리 토해도 멈추지 않고 정신없이 끌려가던 날들’을 견디며 자랐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만 50세에 얻은 늦둥이였습니다. 어머니가 보따리를 쌌을 때 아버지는 50대 중반이었지요. 얼마 뒤 새어머니가 빈자리에 들어왔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자마자 유산을 통째로 챙겨 도망가 버렸습니다. 졸지에 가난한 자갈밭에 내동댕이쳐진 외톨이 소년. 그때의 궁핍은 평생 그를 얽어맨 굴레가 됐습니다.

철이 들고 가정을 꾸린 뒤 그는 생모를 찾아 나섰습니다. 어머니 이름 ‘장명화’와 비슷한 나이대를 전국에 수소문해서 100여 명의 연락처를 확보했습니다. 일일이 전화를 돌리며 “제 어릴 때 이름은 ‘전윤종’이고 지금 엄마를 찾는 중입니다”라고 했지만 다들 “모른다”고 했지요.

그중 한 사람, 포항에 사는 분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왜 꼭 찾으려고 하나요? 이미 다른 사람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잘살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 말을 듣고 그는 전화 돌리는 일을 멈췄습니다. “그래, 여태까지 나를 한 번도 찾지 않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분이 진짜 엄마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동안 쌓였던 원망과 미움이 한꺼번에 녹아내렸습니다. ‘가는 사람은 가는 사정이 있고/ 남는 사람은 남는 형편이 있네’라는 깨달음과 함께 어머니와 진정으로 화해하는 순간이 찾아왔지요. 이렇게 해서 지천명의 나이가 되어 어머니를 위해 쓴 시가 바로 ‘늦은 인사’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 나이’가 된 중년, 숱한 삶의 고비를 지나고 세월의 높낮이까지 완숙하게 궁굴리는 중견 반열에 오른 때였지요. 계절로 치면 혹서나 혹한 다 보낸 뒤의 ‘아지랑이 하늘하늘 오르는 봄’ 어느 날, ‘이제야 미움 없이’ 보내는 ‘늦은 인사’는 담담한 어조를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하는 고백처럼 낮은 목소리의 행간에는 오래 견뎌온 눈물의 물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잘 가 엄마’라는 짧은 문구가 영혼의 밑바닥을 건드리는 순간 우리는 뛰어난 절제의 미학과 ‘눈물의 정화’ 과정을 동시에 체감하게 됩니다.

이 시를 표제작으로 삼은 시집이 2013년(실천문학사)에 출간됐고, 2021년(백조)에 복간됐습니다. 거기에 실린 ‘그곳’을 비롯해 여러 편의 시에도 어머니 얘기가 나옵니다.

‘그곳에 가고 싶었다/ 떠나는 모습을 기억도 못하는/ 어린 나를 두고 사라진/ 어머니가 보고 싶어 보채면/ 사람들은 도원에 마실 간 거라고/ 실컷 놀고 나면 내가 생각나/ 쪽배 타고 돌아올 거라고// 우리 동네에서/ 무덤도 없이 사라진 사람은/ 도원으로 놀러간 거라고 했다// 괜히 울적한 저녁이면/ 강변으로 뛰어가/ 산 너머로 사그라지는 노을을 보면서/ 어머니가 돌아오기 전에/ 그곳에 가고 싶었다’(시 ‘그곳’ 부분)

그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도원(桃源)은 어디일까요. 그곳은 어머니를 잃어버린 상실의 공간이자 어머니를 찾아가는 길 위의 여정, 아니면 궁극에 가 닿을 이상 세계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모성의 원천이자 삶의 근원을 뜻하는 곳일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인지 그는 어릴 때의 기억이 서린 곳을 실낙원(失樂園)에 빗대곤 했습니다. “그곳은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공간, 실제와는 상관없이 내 안에 있는 도원경(桃源境)이 아닐까……”

시인이 최근 펴낸 우화집 『애완용 고독』(달아실)에도 상실과 이별, 회한의 생채기가 얼룩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울보였다. 걸핏하면 울었다. 집안에서도 아예 건드리질 않았다. 어느 날 생모가 사라진 아픔을 울음으로 표현한 듯한데 도가 지나쳤다. 형이 그러는 것이었다. “너 한 번만 더 울면 맞아 죽을 줄 알아!” 뒤통수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징징 돼지’ 부분)

그 뒤로 그는 울지 않았습니다. 울지 않게 된 이후로 독해졌고 시 쓰는 일에 목숨을 걸기로 했습니다. 그런 시인이 어딘가에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며 밤새워 쓰고 퇴고를 거듭한 것이 ‘늦은 인사’입니다. 시를 쓰는 고통과 시를 읽는 기쁨, 시가 주는 울림과 감동을 동시에 선사하는 수작이지요. 봄 햇살 부드러운 5월 가정의 달에 특히 긴 여운을 남기는 시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를 쓴 전윤호 시인은 1964년 강원 정선 태생으로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집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순수의 시대』, 『연애소설』, 『늦은 인사』, 『천사들의 나라』, 『봄날의 서재』, 『세상의 모든 연애』, 『정선』 등을 냈으며 편운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등을 받았습니다.

올해 회갑을 맞은 시인의 ‘늦은 인사’를 행여 어머니가 읽게 된다면, 그리하여 평생 묻어둔 가슴속 회한을 말갛게 씻을 수 있다면, 그동안 다하지 못한 심중의 뜨거운 얘기를 비로소 평온한 표정과 눈빛으로 주고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뭉클한 일일까요.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