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9월06일(08:02)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코로나19 비대면 업무시대] 사무실 버리고 디지털로 이사하는 기업들
기업들이 일터를 물리적인 사무실에서 '디지털 공간'으로 옮기고 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근무가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기업과 직원들은 각종 온라인 도구를 최적화하고, 원격 근무에 불편함을 초래하는 인사·보안 규정을 뜯어고치는 등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기업의 업무 공간이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회사원들의 일하는 방식과 조직의 모습도 변하고 있다. 기업들이 온라인 '임직원 경험'을 급속도로 향상시키면서 원격 근무의 효율성을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제조업·공기업 등에서도 조직내 의사소통 방식이 바뀌고 상명하복 문화가 희석되기도 한다.

화상도구·온라인 협업툴에 적응하는 아재들
5일 전략·정보기술(IT) 컨설팅 업계에 따르면 최근 전통기업 수 십곳이 디지털 오피스 도입에 나섰거나 구축을 완료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현대차 그룹과 두산 그룹이 협업 툴을 도입했고, LG화학과 LS그룹 등 제조업 기업들도 최근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국거래소 등 공기업도 최근 관련 용역을 발주하고 디지털 오피스 구축에 나섰다.

디지털 오피스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시스템을 도입하고 사무실 인테리어를 바꾸는 게 아니다. 기존에 있던 (화상)전화, 메신저, 이메일 등의 도구를 통합하고 최적화해 직원들이 각자 떨어진 환경에서도 머리를 맞대고 일하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시공간 동시성'을 확보하는 게 핵심이다. IT컨설팅업체 관계자는 "진정한 디지털 오피스 구축은 과거 피처폰 시절 MP3플레이어와 노트북PC 등을 따로 쓰다 아이폰이 나타나 이를 대체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디지털 오피스를 도입한 기업 직원들은 온라인 업무 환경에 급속도로 녹아들고 있다. 최근 서울 성수동 사옥으로 이전하며 디지털 오피스를 구축한 현대글로비스의 경우 타부서와 회의를 하기 위해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 것조차 번거롭다고 화상회의를 열 정도다. 정보기술(IT) 기업들은 업무 서류를 띄워놓고 대화하기 위해 1대1 대화도 전화대신 화상회의 도구를 활용한다.

편리함과 높아진 업무효율
디지털 오피스를 구축한 기업들 가운데 일부는 예전보다 높아진 업무 효율과 편리함에 놀라고 있다. IT중견기업 A사는 재택근무시 업무 비요휼을 줄이고자 전문 협업 시스템을 도입한 뒤 업무 속도가 오프라인 시절보다 빨라졌다. 출장비 정산이나 사무실 비품 하나 구입하는 것도 예전엔 일일이 품의서를 올리고 전자결제를 받았지만, 지금은 메신저로 요청하고 즉석에서 결제받는다. 업무 결제도 메신저 상에서 받을 수 있다. 팀 공식 일정은 물론 개인 스케줄도 시간 단위로 공유할 수 있어, 시간 맞는 팀원끼리 수시로 원격회의로 문제를 해결한다. 이 업체 관계자는 "회사 인트라넷과 카카오톡, 전화를 따로 쓸 때와 달리 협업 시스템을 도입한 후엔 한 곳에서 모든 일을 해결하니 일의 집중도가 높아지고 회사일과 개인 영역이 구분돼 만족도가 높다"고 설명했다.

LG화학은 생산 관련 프로젝트를 할 때 전남 여수·익산과 경남 온산 등 전국에 흩어진 사업장 순회 출장을 화상회의로 전환하자 보름이 걸리던 일을 일주일 이내에 끝낼 수 있게 됐다. 과거엔 출장에만 열흘이 걸리고, 보고서 작성에 며칠이 더 걸려 2주 이상 걸리기도 했다. 두산중공업은 협력업체가 만든 기자재 검수를 원격으로 진행한다. 온라인으로 수시로 의견 교환을 하면서 작업 품질도 대폭 향상됐다. 그룹 디지털오피스 도입을 주도한 ㈜두산 디지털이노베이션 관계자는 "디지털 도구 사용에 소극적이었던 차장급 이상 직원들도 편리함을 경험한 뒤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고 전했다.
[코로나19 비대면 업무시대] 사무실 버리고 디지털로 이사하는 기업들
'임직원 경험 혁신'
큰 효과를 얻은 기업들의 비결은 이른바 '임직원 경험'을 적극적으로 개선했다는 점이다. 미세하게 자주 불편을 초래하고, 비효율적인 절차를 반복하게 만드는 기존 업무 도구를 개선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규와 내규 등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선했다.

기업들은 기존 인트라넷 또는 그룹웨어 대신 직관적으로 만들어진 '슬랙'이나 마이크로소프트(MS) '팀즈'와 같은 전문 협업 도구의 도입도 늘었다. 이들 솔루션과 연계해 잡무를 대신해주고 번거로운 절차를 줄이는 로봇프로세스자동화(RPA)를 개발해 적용하는 등 업무 흐름이 끊기지 않게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과거 실패한 디지털 전환 시도에서 얻은 교훈을 반영해 물리적 시스템 뿐 아니라 보안규정과 인사규정 등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보고 고쳤다. 수 년전 모 기업은 디지털 오피스 구축을 위해 개방형 자율좌석제 사무실을 꾸몄으나 일주일만에 부서별로 모여 앉아 물품을 쌓아놓는 등 지정석으로 변질됐다. 과거 일부 기업은 최신 클라우드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보안을 대폭 강화한 탓에 외부에서 업무를 하기가 극도로 어려워지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10여년 전 도입한 화상회의 시스템은 먼지만 쌓이는 곳도 많았다.

바뀌는 한국적 조직문화
일터가 디지털 공간으로 바뀌면서 일부 기업에선 군대식 기업 조직문화가 바뀌는 부수적 효과도 일어나고 있다. 모 대기업 계열사는 비대면 회의 초반엔 임원이 말하면 팀원들은 듣는 식 회의가 재현됐으나, 온라인 회의가 잦아지자 직원들이 상사의 발언 도중에도 채팅으로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평소 온라인 협업 도구를 사용하면서 소통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예전엔 상사에게 보고를 올리면 이후엔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기 어려웠으나 디지털에선 업무 진행상황이 공유된다"며 "일에 대한 주인의식이 높아지고 태도도 적극적이 됐다"고 말했다.

사내 수평적 의사소통이 활성화되고 부서간 장벽이 낮아지기도 한다. 디지털 환경에선 업무 성과 측정이 전보다 쉬워지면서 회색지대 업무나 해도 빛이나지 않는 기피업무도 평가에 포함시킬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포스코 등 일부 기업은 타부서와의 협업 성과를 평가에 반영한다. 그 결과 일부 기업에선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타부서와 소통하고 협업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엔 타부서 협업이나 잡무 분배는 개인적 친분이나 회식과 음주와 같은 비공식 의사소통에 의존하는 면이 컸다.

이현일/강경민/김형규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