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시스티나 성당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시스티나 성당
로마 바티칸 시국의 시스티나 성당.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장엄하고 위대한 명작들의 아우라에 압도됩니다. 머리 위엔 세계 최대 규모의 천장화 '천지창조'가, 제단 뒤엔 거대한 벽화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죠.

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만 700명이 넘습니다. '천지창조'에 340명, '최후의 심판'에 391명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엄청난 대작 속 인물들을 하나씩 살펴보다 보면 그 생생한 역동성에 감탄하게 됩니다.

'천지창조'를 감상하다가 가장 익숙한 '아담의 창조'를 발견하면 반가운 마음도 듭니다. 하느님과 아담의 닿을 듯 말 듯한 손끝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E.T'를 비롯해 다양한 영화와 광고에서 패러디 되기도 했죠. 또 지옥·연옥·천국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최후의 심판' 앞에선 절로 경건해집니다.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있는 시스티나 성당. AP통신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있는 시스티나 성당. AP통신
두 작품은 모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가 그린 것입니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산치오와 함께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3대 천재 화가로 꼽힙니다.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를 4년, '최후의 심판'을 8년에 걸쳐 완성했는데요. 둘 다 대부분 혼자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 초인적이고 담대한 여정을 떠났던 미켈란젤로의 삶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습니다. 치안판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생활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6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유모 손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유모의 남편이 석공이었던 덕분에 조각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고독한, 그러나 담대한 거장 미켈란젤로[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아버지는 아들이 공부를 하길 원했지만 그의 마음은 예술로 가득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게 됐고, 피렌체의 통치자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눈에 띄어 메디치 가문의 후원까지 받게 됐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회화보다 조각을 더 좋아해, 화가가 아닌 조각가로 불리길 원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피에타' '다비드' 상을 그가 만들었죠.

성모 마리아가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23살에 완성했는데요. 많은 피에타 조각상 중에서도 그의 작품이 가장 유명하고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29살에 완성한 '다비드'는 5m가 넘는 대리석에 조각을 한 것입니다. 이 거대한 돌덩이는 한 서투른 조각가에 의해 망가져 40년 넘게 방치돼 있었는데요. 미켈란젤로는 이로부터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균형감을 가진 조각상을 탄생시켰습니다.
'피에타', 산피에트로대성당
'피에타', 산피에트로대성당
돌조각은 작업하기 굉장히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돌이키기 어렵고, 거대하고 딱딱한 만큼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 작업을 즐겼습니다. 조각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 자체가 남달랐던 덕분인 것 같습니다. "조각 작품은 내가 작업을 하기 전에 이미 그 대리석 안에 만들어져 있다. 나는 다만 그 주변의 돌을 제거할 뿐이다." 돌 안에 잠재적인 형상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조각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그 형상을 발견하고 끄집어 내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죠.

그는 금지돼 있던 해부학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요. 이에 대한 관심은 '천지창조'에도 담겨 있습니다.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를 다시 살펴볼까요. 하느님을 둘러싸고 있는 둥근 붉은 천이 보이시나요.

이 모양은 마치 인간의 뇌를 절반으로 자른 것과 같습니다. 훗날 많은 전문가들이 이를 발견하고 놀라워했습니다. "예술가의 능력은 손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온다"라고 했던 그의 얘기와도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다비드',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다비드',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20대에 '피에타'와 '다비드' 상을 만든 미켈란젤로는 유럽 전체에 널리 명성을 알리게 됐습니다. 그 이후의 미켈란젤로의 행보는 미술사에서도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이전에 예술가라는 직업은 천시 받았으며, 권력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벗어나 스스로의 선택과 의지대로 작업을 하는 독립적인 예술가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장에게도 타의에 의해 작업을 해야만 하는 일들이 때로 생겨났습니다. 미켈란젤로에 의해 재능을 시기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그를 곤란하게 하려고 만든 일이 발단이 됐죠.

브라만테는 교황 율리오 2세에게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천지창조'인데요. 미켈란젤로는 자신은 화가가 아니라며 수차례 거절을 했지만, 앞선 영묘 작업 계약 등과 복잡하게 얽혀 어쩔 수 없이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시작은 타의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진심을 다했습니다. 물론 천장화 작업은 쉽지 않았습니다. 높은 천장에 그림을 그려야 해서 극심한 목·허리 통증을 겪었습니다. 물감이 자꾸 눈에 떨어져 시력에도 문제가 생겼죠.

하지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홀로 '천지창조'를 완성했습니다. 작업복을 벗지 않고 장화도 신은 채 잠든 날이 많았습니다.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59세의 나이에 '최후의 심판'을 맡게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작품을 그린 8년이란 세월동안 잠도 잘 자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성당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성당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후의 심판'은 많은 논란에 시달렸습니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나체였기 때문이죠.

작업 중이던 작품을 본 비아지오다 체세나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성한 예배당에 이런 나체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목욕탕에나 어울리는 그림이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보복을 하듯 추기경의 얼굴을 지옥의 수문장 '미노스'의 얼굴로 그려 넣었습니다.

이후에도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결국 이 작품은 수정됐습니다. 교황청은 그의 제자였던 다니엘라 다 볼테라에게 인물들의 주요 부위에 천을 그려넣게 했죠. 그러자 사람들은 볼테라에게 '브라게토네(기저귀를 채우는 사람)'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합니다.

현재 성당에 있는 '최후의 심판'은 복원된 것인데요. 일부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그대로를 되살렸지만, 일부는 가리개를 남겨 뒀습니다. 전부를 복원하지 않은 것은 그 가리개 또한 하나의 역사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많은 예술가들 중에서도 고독한 삶을 살았던 인물로 손꼽힙니다. 라파엘로가 인기 만점이었던 것과 달리, 그는 주로 혼자 있었죠.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결혼을 재촉하면 "나에겐 끊임없이 나를 들볶는 예술이라는 부인이 있소. 또 내가 남긴 작품들이 곧 나의 자식들이오"라고 말했습니다.

89세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작업을 하고 있었던 미켈란젤로. 평생을 경주마처럼 달렸던 그가 87세에 천장화 하나를 완성한 후 스케치 한 켠에 남겨둔 문구는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