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권의 호모글로벌리스 (28)] 브렉시트와 영어의 지위
유럽연합(EU)은 지난 60여 년간 정치적, 경제적 통합을 꾸준히 진전시켜 왔다. 국가 주권 포기를 수반하는 통합운동이 수많은 장애와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나아가고 있는 것은 라틴어, 기독교, 로마법 등 유럽 공통의 문화적 유산에 기인한 바 크다.

그러나 유럽은 다양성의 대륙이다. 회원국은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고, 심지어 일부 나라에서는 인종 및 언어의 다양성이 지나쳐 갈등이나 독립운동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영국의 스코틀랜드, 스페인의 카탈루냐, 프랑스의 코르시카, 이탈리아의 베네토와 남티롤, 벨기에의 플랑드르, 덴마크의 파로에, 독일의 바이에른 등이 그 예다.

유럽의 다양성에 관한 유머 하나를 보자. 천국에서 요리사는 프랑스인이고, 경찰은 영국인이고, 연인은 이탈리아인이고, 기계공은 독일인이며 전 지역을 스위스인이 통치한다. 지옥에서 요리사는 영국인이고, 경찰은 독일인이고, 연인은 스위스인이고, 기계공은 프랑스인이며 전 지역을 이탈리아인이 통치한다. 유럽 각국의 문화적 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풍자다.

[박희권의 호모글로벌리스 (28)] 브렉시트와 영어의 지위
EU 회원국 28개, 공용어는 24개

무엇보다도 EU의 언어정책은 회원국의 문화적 다양성을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보여준다. EU는 현재 24개 언어를 EU 기관의 공용어로 사용한다. 193개 회원국으로 이뤄진 유엔의 공용어가 6개인 데 비해 28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EU의 공용어는 24개나 되니 상대적으로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EU 규정 및 관보는 모든 공용어로 작성돼야 하며, EU 시민이 EU 기관에 문서를 송부하거나 회신할 때 공용어 중 하나를 선택해 사용할 수 있다. 공용어의 통·번역에 소요되는 막대한 시간과 예산에도 불구하고 각 회원국이 희망하는 언어 한 개를 공용어로 지정할 수 있게 한 것은 언어 다양성 존중이 EU 통합에 핵심 요소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공용어가 매일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상시업무가 이뤄지는 EU 기관 내 업무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다. 1958년 EU가 6개국으로 출범할 당시에는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의 4개 언어가 공용어였다. 당시 영어는 공용어가 아니었다. 1973년 영국이 가입하자 비로소 공용어가 됐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가장 많이 사용된 업무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영어가 EU 언어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영어가 많이 쓰이는 북유럽, 동유럽 국가가 대거 가입했기 때문이다.

2016년 영국이 EU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하자 이후 EU 내 영어의 지위가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해 관심이 커지고 있다. 영국이 탈퇴하면 EU법상 영어는 공용어의 지위를 잃는다. 영어 사용국인 아일랜드와 몰타가 가입할 때 영어 대신 자국 고유어인 켈트어(Irish)와 몰타어(Maltese)를 EU 공용어로 지정해서다. 영어가 공용어 지위를 잃을 경우 이들 중 어느 나라가 영어를 공용어로 재지정할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일부 회원국은 브렉시트 이후 영어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하고 프랑스어를 EU의 주도적 언어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당수 전문가는 브렉시트 이후 EU가 독일과 프랑스 주도로 재편될 것이며, 이들 두 나라가 자국어 사용 확대를 정책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으로 예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어가 EU 내 주요 언어로서의 영향력을 단기간에 상실할 것 같지는 않다. 영어는 이미 가장 중요한 업무언어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EU집행위원회 문서의 80% 이상이 영어로 작성된 뒤 나머지 23개 공용어로 번역된다. 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EU 공무원, 로비스트, 언론인 간에 영어가 주로 사용된다.

"영어를 단일 업무언어로" 주장도

최근 회원국 내 영어 사용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제1 언어 사용 인구로만 보면 독일어(18%), 영어(13%), 이탈리아어(13%), 프랑스어(12%), 스페인어(8%) 순이다. 제2 언어를 포함하면 영어 사용 인구는 50%가 넘는다. EU 회원국 내 13세 학생들의 97%가 영어를 공부하며, 대학 내 영어 강좌는 2002년 725개에서 2019년 8000개 이상으로 증가했다. 유럽의 주요 언론사들은 유럽 문제에 대한 공론에 참여하기 위해 온라인 영문판을 발행하고 있으며 국경을 넘는 정치적 활동과 토론도 영어로 행해진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 일부 전문가는 브렉시트 이후 영어를 단일 업무언어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일랜드와 몰타는 4억5000만 EU 인구의 1%에 불과한 소국이므로 영어가 독일어와 프랑스어의 경쟁에서 벗어나 중립 언어로 사용될 수 있고, 이는 EU의 통합 노력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시대에 따라 성장하기도, 쇠퇴하기도 한다. 글로벌 시대 국제어로서 확고한 지위를 갖는 영어가 영국이 떠난 EU에서는 위상이 어떻게 변할지 주목된다.

박희권 < 글로벌리스트·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