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운용본부장 1년째 공석에 직무대리도 사의 '초유의 사태'
4일 서울 소공동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회의. 지난해 기금운용 성과를 평가하는 자리였다. 기금운용위원장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의 지난해 기금운용 수익률은 최근 5년 새 가장 높은 7.28%였다”며 “최고투자책임자(CIO) 공석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높은 성과를 달성한 직원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성과를 이끈 주인공은 회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난해 7월 강면욱 전 기금운용본부장이 사퇴한 이후 1년간 본부장 직무대리를 맡아온 조인식 해외증권실장은 이날 돌연 사의를 밝혔다. 국민연금 최고투자책임자인 기금운용본부장이 1년간 공석인 가운데 직무대리 자리마저 비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면서 635조원의 국민 노후자금 운용에 파행이 불가피해졌다.
기금운용본부장 1년째 공석에 직무대리도 사의 '초유의 사태'
국민연금 적폐청산이 부른 참사

조 실장의 사퇴는 내부 고발에서 비롯됐다. 그가 지난해 말 회식 자리에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검찰 수사에 협조한 직원 일부를 훈계하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게 발단이었다. 검찰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조직 내부에 갈등이 불거지자 기강을 다잡기 위한 조치였다는 전언이다. 이에 해당 직원은 ‘인사에서도 불이익을 받았다’며 불만을 공식 제기했다. 국민연금은 내부 감사를 벌여 조 실장에게 ‘경고’ 조치를 내렸다. 이 사실이 외부로 새나오면서 조 실장은 사의를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조 실장은 기금운용본부 내에서 소신과 강단이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찬반을 결정하는 투자위원회에서 이윤표 당시 운용전략실장(현 트러스톤자산운용 공동대표) 등과 함께 사실상 반대인 ‘기권(주총 불참)’ 표를 던지기도 했다. 2016년 주식운용실장으로 재직할 때는 ‘국민연금이 중소형주를 죽인다’는 시장 비난을 무릅쓰고 투자 다변화와 장기 투자 원칙에 맞게 위탁운용사 선정 기준을 바꾸기도 했다.

원칙주의자인 조 실장도 이른바 ‘적폐청산’의 후폭풍은 비켜가지 못했다. 2015년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기금운용본부 실무자들에 대한 검찰 수사와 내부 감사가 이어지면서 조직이 흔들리자 조 실장이 분위기를 다잡으려고 했지만, 조직갈등이 부메랑이 됐다는 평가다.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금운용 조직

조 실장의 사퇴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1999년 출범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기금운용본부 내 9개의 주요 간부 자리 중 수장인 기금운용본부장을 비롯해 주식운용실장, 해외증권실장, 해외대체실장 등 네 자리가 공석이 됐다.

국민연금은 2015년 삼성물산 합병 당시 적정가치 산출 보고서 작성 책임자였던 채준규 주식운용실장을 내부 감사 끝에 해임했다. 삼성물산 합병 관련 최종 판결이 나기도 전에 국민연금이 선제적으로 실무자를 해임하자 정권 코드에 맞춰 ‘적폐청산 실적 쌓기’에 나선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국민연금은 지난 2월부터 실시한 기금운용본부장 공모에서 적임자를 뽑지 못해 4일 기금이사추천위원회를 다시 구성하고 재공모 절차에 들어갔다. 1차 공모에서 사실상 기금운용본부장에 내정됐던 곽태선 전 베어링자산운용 대표는 이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공모에 참여했고, 내정된 뒤 김성주 이사장과 업무 협의까지 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탈락했다”고 말했다. 기금운용본부장 인선에 청와대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발언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이달 말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가의 주주권 행사 지침) 도입 등을 앞둔 중요한 상황인 만큼 기금운용본부의 ‘리더십 진공 상태’ 부작용이 더욱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날 기금운용위원회에서는 논란이 된 기금운용본부장 선임 과정과 스튜어드십코드 도입과 관련해 단 한 명의 위원도 발언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기금운용위원회는 복지부 장관과 각계 대표로 이뤄진 국민연금 최고의사결정 기구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