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축적의 시간' 넘어 '축적의 길'로
국내에서 가장 긴 인천대교(18.38㎞)의 설계는 외국 회사가 하고 한국 업체는 시공만 했다. 영종대교(4.42㎞)도 그렇다. 두 교량 설계에 참여한 일본 기업 조다이(長大)에는 경력 50년 이상의 기술자들이 많다. 지난해 이 회사를 방문한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는 작업복 차림의 ‘할아버지 기술자’들에게 당시 설계 과정의 고충을 물었다. 이들은 “설계기간을 포함한 공기 단축 요구였다”고 답했다. 반세기 경험의 베테랑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한국식 ‘빨리빨리’였다.

국내 최고층 롯데월드타워 설계도 선진국 몫이었다. 이 교수는 이를 “우리 개념설계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개념설계란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을 그려내는 것, 백지 위에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2년 전 동료 교수들과 공저한 《축적의 시간》에서 단순 모방 대신 창조적 축적을 강조했던 그는 각국 사례를 분석하며 축적의 방법을 찾아나섰다. 그 결과가 후속작 《축적의 길》에 담겨 있다.

‘축적’의 화두는 산업 분야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융합적 기술혁신, 글로벌 경제 공동체와 맞물린 우리 사회 전체에 필요한 것이다. 책에 나온 다섯 가지 전략과 네 가지 열쇠가 흥미롭다. 우선 경험 많은 고수를 양성하고, 이들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스케일업(scale up)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서울대 공대 교수팀이 창안한 데이터베이스 플랫폼 ‘HANA’를 인수해 6년간의 스케일업으로 연 매출 1조원을 올리는 글로벌 소프트회사 SAP가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개념설계와 시행착오를 뒷받침할 제조현장을 키우고, 사회적 축적 시스템을 확충하는 것도 중요하다. 독일의 금속활자 개발이 포도압착기와 금속가공 노하우, 질 좋은 종이 공급 덕분에 가능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내수시장을 적극 활용한 중국의 경쟁력에 주목하라는 조언도 있다. 고속철 후발 주자인 중국이 세계 시장의 절반을 잠식한 비결이 개념설계 역량을 지렛대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고수’ ‘스케일업’ ‘위험 공유’ ‘축적지향 리더십’의 네 개 열쇠를 사회적으로 확산하면 일류국가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조급증에 시달리곤 한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국가대계는 눈앞의 작은 이해가 아니라 큰 그림에서 시작해야 한다. 속 시원한 ‘사이다 발언’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부작용도 크다. 오랜 경륜의 고수를 존중하면서 작은 아이디어를 함께 키우고 전임자의 시행착오 위에 새 아이디어를 쌓아가는 축적의 지혜, 축적지향의 리더십이 절실한 시점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