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국 기업들이 원죄의 덫에 빠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4일(현지시간) “신흥국 기업들이 외화표시채권을 무분별하게 발행하면서 국가 경제에 부담을 주고 있다”며 이렇게 보도했다. ‘원죄’란 베리 아이켄그린 UC버클리 교수가 처음 사용한 단어로, 기축통화가 없는 국가들의 한계를 일컫는 말이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국 통화가 아닌 남의 통화로 자금을 조달하기 때문에 환율 변동이 심할 때 외환 문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금융정보업체 딜로직에 따르면 지난해 신흥국 기업과 은행이 발행한 외화표시채권 규모는 3000억달러(약 326조원)에 달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올해 발행 규모는 지난해의 두 배까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이들 국가의 통화가치가 하락하는 경우다. 달러화, 유로화, 엔화 등 외화표시채권의 발행액이 많을 경우 그만큼 갚아야 할 빚도 늘어난다. 세르지오 파즈 미국 블랙록자산운용 이코노미스트는 “환율 변동성을 헤지(위험 회피)해놓지 않은 신흥국 채권이 많다”며 “이들 국가의 통화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재무 상태가 좋은 기업이라도 부도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FT는 2008년 금융위기 때 신흥국들의 통화가치가 급락한 사실을 지적했다. 당시 멕시코 페소화, 브라질 리알화, 터키 리라화와 한국의 원화가치는 달러화 대비 20%가량 하락했다. 에스더 챈 에버딧자산운용 펀드매니저는 “당시 멕시코 페소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이 나라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었다”며 “요즘처럼 환율 변동이 심할 경우 일부 국가에서 ‘원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1990년대 달러표시채권 의존도가 높았던 동아시아 국가들도 자국 통화가치가 폭락하면서 외환위기를 겪었다. 이후 이들 국가는 외화표시채권 비중을 줄이고 외환보유액을 늘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 국가의 정부가 아닌 기업들이 원죄의 덫에 빠지기 시작했다고 FT는 분석했다.

기업 도산이 은행권 부실로 이어져 국가 경제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의 데이비드 라일리 이사는 “정부 재정이 건전한 신흥국이라도 기업이 파산하면 그 여파가 국가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세계 최대 채권투자업체 핌코의 빌 그로스 최고투자책임자(CIO)는 “국제 금융시장에 초신성이 폭발하는 것과 같은 대규모 신용 붕괴 상황이 임박했다”고 경고했다. 그는 투자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만든 글로벌 신용 거품이 시한 종료됐다”며 “투자자들은 대규모 신용 붕괴 아래에서 우주 미아 신세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