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산업단지에 위치한 자동차부품업체인 ㈜월산.

한창 바빠야 할 오후 시간임에도 '놀고 있는' 프레스기와 가공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체 매출의 20%가량을 차지하는 일본 수출길이 막히면서 가동률이 60%대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회사 김회춘 차장은 "2004년만 해도 10억원 수준이던 일본 수출이 원·엔 환율 하락 여파로 점차 줄더니 올 들어선 단 한건도 수주하지 못했다"며 울상을 지었다.

그나마 ㈜월산은 국내 판매 비중이 높기 때문에 버티고 있지만,수출 비중이 높은 업체들은 이미 한계에 부딪힌 상태다.

실제 금형업계 중상위권 업체인 신우가 올초 원·엔 환율 하락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으며,'OO업체도 폐업 대열에 합류할 것'이란 소문이 왜관산업단지 내에 파다하다.

'원고·엔저' 현상으로 신음하는 것은 비단 제조업뿐이 아니다.

일본에 수출하는 기업이라면 업종을 막론하고 '죽느냐,사느냐'의 기로에 몰려 있다.

파프리카를 일본에 수출하는 충북 청주의 미래무역은 2004년에는 1㎏에 5000원을 받았지만 지금은 3500원도 채 못 쥔다.

박정훈 과장은 "일단 계약이 끝나는 7월까지는 손해를 감수하면서 수출할 수밖에 없다"며 "계약만 아니라면 당장 수출을 접고 싶다"고 푸념했다.

부산에서 굴을 수출하는 해진물산 역시 원고·엔저 탓에 한때 100억원에 달하던 연 매출 규모가 60억원 수준으로 추락했다.

일본 시장을 놓고 중국 베트남 기업들과 경쟁하는 업종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치열한 가격경쟁 탓에 판매 단가마저 떨어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라미네이팅 필름(코팅지)을 만드는 라미에이스의 경우 100마이크로미터 두께의 A4 용지 크기 제품 수출가를 2004년 장당 5엔에서 최근 4.5엔으로 낮췄다.

정일 사장은 "가격을 내릴 여건이 아니었지만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며 "팔면 팔수록 손해지만 고정비를 감안하면 그래도 가동하는 게 덜 손해라 공장을 돌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에 자전거용 타이어를 수출하던 정상화성은 환율 부담에 중국 업체의 추격까지 겹치자 올초 아예 업종을 자동차 부품용 고무로 전환했다.

하지만 원·엔 환율 하락이 계속되며 이마저도 적자를 보고 있다.

'원고·엔저' 현상은 대일 수출기업의 투자 여력마저 앗아간다는 점에서 앞으로 더욱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란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 컬러TV 부품업체인 B사는 엔화 환율 하락에 따른 채산성 악화로 지난 2년여간 투자를 못한 탓에 현재 '한물 간' 구형 부품으로 대만 및 중국산 신제품에 대항하고 있다.

B사 관계자는 "올 들어 경쟁업체들이 잇달아 신제품을 내면서 시장 트렌드가 완전히 바뀌고 있는 상황"이라며 "구형 제품으로 버텨내기가 힘에 부친다"고 말했다.

반면 엔저로 가격 경쟁력을 되찾은 일본 기업들은 미국 유럽 등 세계 무대에서도 한국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자동차와 디지털TV가 대표적인 예.도요타는 엔저를 무기로 현대·기아자동차보다 더 저렴한 자동차를 선보이며 총공세에 나선 상태다.

소니 샤프 등 일본 전자업체 역시 파격적인 가격에 제품을 출시하며 삼성전자와 LG전자에 빼앗긴 왕좌를 되찾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대구 소재 금형 제조업체인 화신테크의 박희권 영업팀장은 "원고·엔저 여파로 섀시금형의 경우 유럽 시장에서 일본 제품(22만유로)이 한국제품(25만유로)보다 더 저렴한 '가격역전 현상'이 벌어진 상태"라고 말했다.

송태정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도 "선진국 시장에서 자동차와 IT(정보기술) 제품을 중심으로 한국산보다 싼 일본 제품이 확대되는 추세"라며 "일본의 기술력을 뛰어넘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가격 역전현상은 우려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신현수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은 시장 규모도 크지만 '일본에서 통하면 어디서든 통한다'는 테스트 마켓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한국 기업 입장에선 놓쳐선 안 되는 시장"이라며 "우리 기업들이 가격경쟁에서 기술경쟁으로 전환해 환율 파고를 넘을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