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광주지역의 중견 공작기계 업체인 N사의 전 관리인
K씨.

그는 지난달 공동관리인과의 알력을 견디다 못해 관리인직을 박차고 나왔다.

그러나 직원들에게는 아직도 그가 관리인으로 통하고 있다.

매일 회사 사정이 소상히 보고 되고 있고 집무실 또한 그대로 보존돼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자신의 사임이후 직원들은 한달넘게 업무를 거부해 회사는 파산지경에
이르렀지만 권한이 사라진 그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전 기획조정실장인 그가 관리인으로 부임한 것은 지난 2월.

옛 사주와 직원,협력업체 관계자들이 전국 실업계 고등학교의 실습용
선반의 80%를 따낸 그의 경영수완을 인정해 "구원투수"의 역할을 맡겼다.

그러나 그의 부임에 맞춰 법원은 의외의 인물을 공동관리인으로 지명했다.

전직 대사 출신의 J씨.

평생 외교관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 기업 업무 경험이란 한국경총의 3개월
짜리 법정관리인 양성과정을 이수한 것이 전부다.

두 사람의 마찰은 부임 첫날부터 시작됐다.

회사의 임금삭감 방침에 따라 관리인 급여도 줄이자는 K씨와 종전 금액을
그대로 받아야 한다는 J씨가 맞서 결국 법원의 중재까지 받아야 했다.

부도사태로 정화조 청소를 못해 구청으로부터 벌과금이 부과되자 정화조를
퍼내 운동장에 뿌리라는 J관리인의 지시는 더 어처구니 없는 예.

결국 이 일로 이 회사 직원들은 J관리인에게 완전히 등을 돌려 버렸다.

K씨는 이런 와중에서도 대기업체로부터 수주를 올리고 새로운 수출선을
개척하는 등 회사 정상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어음에 대한 기본개념조차 없으면서 전직 고위관료의 권위만을
내세우는 J씨와 공동관리인직을 수행하는데는 한계가 분명했다.

"법정관리는 갱생 가능성이 있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있는 것 아닙니까.
구사주에게 부실경영의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기업경영에
무지한 사람을 관리인에 앉힐 수 있는 겁니까. 자신의 결정을 좀처럼 번복
하지 않으려는 법원의 권위주의 앞에서 그저 답답할 뿐입니다"(K 전관리인)

K씨의 관리인 사임후 이 회사는 사실상 마비상태에 빠졌다.

직원들은 "관리인을 교체해 주든지 아니면 파산처분을 내려달라"며 대법원
에까지 탄원서를 제출했다.

J씨의 경영능력을 믿지 못하는 채권단도 이에 동조해 법원에 진정서를 냈다.

협력업체들도 물론 납품을 끊어 버렸다.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

최근 우리 경제계에 대원칙으로 자리잡은 이 말속에도 함정은 있다.

"부실=부도덕"이라는 등식 속에서 무조건 새로운 인물만 선호하다 보니
"프로 경영인"들이 회사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기회까지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식으로 부도의 책임을 묻는데만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산업연구원(KIET) 고동수 연구원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법정관리인을 선임할 때 첫번째로 고려해야할 사항은 (관리인직을) 누구
에게 맡겼을 때 동기부여 효과가 가장 큰가 하는 것입니다. 미국처럼 기존
대주주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거나 아니면 회사의 사업내용및 부실화된
근본 이유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기존 경영진에게 맡기는 것도 바람직
하다고 봅니다"

그는 특히 파산신청 후에도 기존 경영진이 해당기업을 계속 경영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 미국의 ''DIP(Debtor in Possession) 제도''를 참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 연구원의 말이 우리사회의 공론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 윤성민 기자 smyo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