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쳐올 실업, 저임금, 고물가라는 견디기 힘든 IMF한파 때문에 벌써부터
온 나라가 쑥대밭이다.

실업자수 1백50만명이라는 어두운 전망속에 "네가 아니면 나다"라는 이 말
한마디가 지금의 우리 인심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우리는 왜 이처럼 벼랑 끝까지 추락해 버렸는가.

물론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수 있다.

동남아를 강타한 외환위기, 궤도를 이탈한 금융시장, 대기업들의 파행적
기업경영, 국민들의 무분별한 소비 패턴, 무책임한 정부의 경제운영 등이
이들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이들 요인은 어디까지나 파탄을 초래한 결과론적인 산물이지
근원 그 자체는 아니다.

근원은 역시 좁게는 나, 넓게는 한국만 잘 살면 된다는 극도의 배타적인
이기주의의 틀속에서 찾아야 할 듯싶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대화속에서는 외국인들을 이웃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풍토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대화속에서 외국인들을 표현할 때 비어를 써야 만이 애국자 같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대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어 버렸다.

아울러 국내 기업에서 일해야 만이 애국자이고, 외국 기업에 종사하면
마치 남좋은 일 시켜주고 있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들 모두 일종의 역사적 컴플렉스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웃을 이웃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것이다.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IMF 관리체제로 들어간 이후 한 승객이 지하철안에서
옆자리 승객을 끌어내어 폭행을 가한 사건이다.

이유인즉 IMF시대에 워크맨을 가지고 듣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팝송이나 외국어를 듣는 것이 죄가 되고, 이로 인해 폭행까지
당해야만 하는 우리 사회의 얼룩진 한 단면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하겠다.

물론 이것은 극히 예외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IMF사태 이후 외국에 대한 적대감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힘들다.

물론 무조건적인 외제 선호풍조나 사대주의적 발상도 배격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현재 우리는 외자유치를 위해 금융개혁, 정리해고제 도입, 주식-채권시장
개방, 적대적M&A 허용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법개정을 서두르고 있다.

하지만 묘한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법이 개정되면 우리경제가
거덜나고 이 땅은 제국주의의 활극장으로 전락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도
빠뜨리지 않고 소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식사도 한식만 먹고, 음료수도 커피같은 것은 마셔서 안되며, 옷도
우리 기업의, 그것도 국산상표만 입어야 한다는 풍조가 은연중에 우리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다.

맥도널드의 햄버거를 먹었다 해서 친구들에게 핀잔을 당한 한 어린이의
이야기나, 우리 의류업체의 상표가 외국어라 해서 배척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극도로 경직되어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잘 타나내주고
있다.

우리 물건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팔되 남의 물건은 절대로
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논리이다.

우리의 이러한 모습은 외국 투자가의 눈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기업의 자율적 성장을 지원하는 정도에 대한 각국의 이미지를 평가한
IMF 순위에서 한국은 말레이시아나 중국보다 낮은 35위에 그쳐다.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외국 투자가들이 한국을 아시아에서 가장
까다로운 시장으로 인식하고 있다.

국제적 매너가 좋지 않고, 시장이 폐쇄적이며 배타적이고, 신뢰할수
없다는 것이 한국에 대한 공통적 이미지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리는 경제적 우방이 없는 유아독존의 국가이다.

과연 이러한 풍토 하에서 외국인들이 이 땅에 투자를 할 것인가.

그 대답은 "No" 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그것을 운영하는 것은 사람이다.

우리 스스로가 외국자본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는 한 제도개혁은 빛
좋은 개살구에 그치고 말 것이다.

자나깨나 "인민" "국가"를 내세우는 사회주의 중국 북한에서도 외자는
환영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외자에 대해 적지 않은 거부감이 있다.

물론 외자는 약탈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체적 역량을 가지고 이를 잘만 활용하면 외자는 이 땅에서
우리의 부모형제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우리자원을 구매해주며, 수출을
늘려 외화수입도 증가시키며, 그들의 선진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구원자가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아울러 외자유치를 바라면서 국산품애용만을 외쳐대는 모순도 이제는
그만 하자.

값싸고 양질의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최고이지 비싸고 저질이라도
"Made in Korea" 면 된다는 구시대적 사고는 이제 버려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