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사회제도로서 등장한 이래 결혼관계를 해소시키는 이혼 또한
필요악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오랜 옛날만 하더라도 궁족이나 나라에 따라 양대가 다르긴 하지만 이혼
절차가 까다롭진 않았다.

오늘날에도 일부 전통사회에서는 원시적 이혼유습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엿볼수 있다.

아랍의 회교도 남자들은 아내와 이혼을 하고 싶으면 두사람의 증인을
불러다 놓고 그의 아내에게 "나는 당신과 이혼한다"고 선언하기만 하면
된다.

에스키모의 부부들은 결혼생활에 싫증이 생기는 경우 언제든지 간단히
헤어져 살고 그것도 대부분 다른 여자 또는 남자와 동거하게 된다.

역사의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보다 문성화된 고대세계에서도 이혼
절차가 너무나 간단한 곳도 있다.

고대그리스의 경우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는 구차한 조건이나 실망 없이
쉽게 헤어질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대중국에는 이혼을 하려면 지켜야 할 까다로운 남자중심의 규칙이
있었다.

칠출삼불거, 즉 아내를 내쫓을수 있는 일곱가지 이유와 아내를 내쫓을수
없는 세가지 이유다.

효학은 불효 무자 간음 질투 유전병 다변 도둑질등이고 삼불거는 둘때
가난했다가 뒤에 부귀하게 되었거나 아내가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다.

이러한 고대중국의 유교적 이혼제도는 한반도에 들어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뿌리를 내렸다.

조선조 마지막 법전인 "형법대전"에서 1908년 오출사불거(칠거에서 무자와
질투를 삭제하고 삼불거에 자녀가 있는 경우를 추가한 것)의 규정이 폐지될
때까지 남자의 존권이혼제도가 존속되엇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비로소 처의 이혼청구소송이 법적으로 보장되기에
이르렀으나 남자 편중의 경향은 여전했다.

법률적으로 남녀평등의 이론을 구체화시킨 것은 1960년 시행의 민법이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위자료 청구만에선 여자에게 불리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개선된 것은 재산분할청구권조항이 신설된 91년의 민법개정에서
였다.

그뒤 선진국의 예에서 보듯이 한국에서도 수억원대의 위자료지급판결이
잇따라 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1963년 외국에서 950만달러를 위자료로 지불한 에르워드 허드슨 이혼소송
사건에 비해 본다면 적은 액수이지만 한국에서도 이제 고액이혼위자료시대가
개막되었음을 실감케 해주는 일이 아닐수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