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회 입법이 가로막히자 시행령 개정을 통해 기업 규제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달 5일 국회에서 열린 공정경제 하위법령 개정방안 당정협의 모습. 왼쪽부터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조정식 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한경DB
정부가 국회 입법이 가로막히자 시행령 개정을 통해 기업 규제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달 5일 국회에서 열린 공정경제 하위법령 개정방안 당정협의 모습. 왼쪽부터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조정식 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한경DB
정부가 국회를 건너뛰고 기업 규제 강화를 추진해 논란이 일고 있다. 야당의 반대로 규제 관련법 개정이 어려워지자 정부가 시행령만 바꿔 기업 활동을 옥죄려는 ‘편법 시도’에 나서면서 기업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15일 더불어민주당에 따르면 한국경영자총협회와 한국상장회사협의회는 정부의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에 반대하는 내용의 건의서를 금융위원회와 국회에 16일 제출하기로 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연기금의 ‘주식 5% 대량 보유 보고(5%룰)’ 제도를 완화하는 것이다. 국민연금이 기업에 지배구조 개선을 이유로 정관 변경을 요구하더라도 경영 참여로 보지 않도록 했다. 시행령이 개정되면 국민연금은 주식 매입 사실을 5일 이내에 공시해야 하는 투자상 제약을 피할 수 있고, 정관 변경을 통해 집중투표제 노동이사제 등을 기업에 관철시킬 수 있게 된다. 시행령 개정안은 16일까지 입법예고하고 연말께 시행할 예정이다.

[단독] 정부 '국회 견제' 피하려 시행령 고쳐 기업 규제
경제계와 야당은 ‘꼬리’(시행령)가 ‘몸통’(상위법)을 흔드는 격이라며 헌법소원까지 검토하고 있다. 정부의 시행령 개정안이 상위법인 자본시장법은 물론 헌법에 위배된다는 지적이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자본시장법(147조 1항)에 정관 변경은 경영권 영향 사항이라고 못 박고 있다”며 “시행령에서 예외를 두는 건 경영권 침해이자 상위법 위반”이라고 설명했다.

경제계는 상법을 개정해야 가능한 집중투표제 도입도 정부가 자본시장법 시행령을 고쳐 시행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음달 시행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시행령 개정안을 통해선 위법 행위를 한 대주주의 경영 참여를 금지하는 등 경영권 박탈에 가까운 규제를 가할 수 있다. 전 교수는 “정부가 시행령만 바꿔 기업 활동을 간섭하는 것은 민간기업 경영을 국가기관이 통제할 수 없도록 한 헌법 126조도 위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경가法' 통과 어렵자 시행령 슬쩍 바꿔
기업인 경영 복귀 차단


여야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마지막으로 상법을 논의한 것은 1년11개월 전인 2017년 11월 20일이다. 이후 법사위 전체회의와 법안소위에서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상법을 논의한 적이 없었다. 대형 복합쇼핑몰 입점을 규제하는 유통산업발전법 등 다른 경제민주화 법안들도 진도가 안 나가긴 마찬가지였다. ‘조국 사태’로 국회 파행이 길어진 점도 원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국회 입법에 매달리던 정책 기조를 180도 바꿔 시행령 개정으로 비슷한 효과를 내겠다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시행령 개정을 통하더라도 얼마든지 입법 효과를 낼 수 있다”며 “20대 국회가 끝나는 내년 4월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전했다.
[단독] 정부 '국회 견제' 피하려 시행령 고쳐 기업 규제
시행령으로 ‘기업 옥죄기’ 나서나

15일 정부 부처와 경제계에 따르면 정부가 시행령 개정을 통해 ‘기업 옥죄기’에 나선 사례는 적지 않다. 지난 4월 국무회의를 통과하고 다음달 8일 시행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시행령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특경가법 14조는 5억원 이상 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유죄가 확정되면 범죄행위로 이익을 준 기업체에 대한 취업을 금지하는 법안이다. 경쟁 기업에 이익을 주고, 이직하는 걸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개정된 시행령에선 배임·횡령죄로 기업에 손해를 끼친 임직원은 해당 기업에 복귀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새롭게 추가됐다. 범죄를 저지른 재벌 총수일가가 회사에 남아선 안 된다는 시민단체의 건의가 반영됐다. 이로 인해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유죄가 확정되면 경영 일선에 복귀할 수 없게 된다.

경제계는 시행령 개정으로 취업을 제한하는 건 상위법 위반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상장협의회 관계자는 “당초 법 취지는 자신이 속한 회사가 아니라 다른 회사로 취업하는 걸 막기 위한 규정”이라며 “취업 제한이 아니라 사실상 경영권 박탈과 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에 하위법이 새롭게 규정할 수 없다”고 했다.

법학자들도 개인의 직업 선택 자유를 침해한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상위법에 없는, 자신이 속한 기업 복귀를 금지하는 건 명백한 헌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대기업의 한 법무담당 임원은 “시행령 개정이라 지금은 주목을 덜 받고 있지만, 형사처벌을 받은 총수의 경영권 박탈로 이어질 수 있어 기업 경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의 편법 규제에 ‘위헌 소지’ 비판

정부의 ‘연기금의 5% 룰 완화 방안’도 위법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는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정관 변경을 요구해도 경영권 행사가 아니라고 규정한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을 지난달 5일 발표했다. 입법 예고가 끝나면 연말께 시행할 예정이다. 그러나 경제계는 “자본시장법 147조 1항에 정관 변경은 ‘경영권 영향’ 사항이라고 규정하고 있어 상위법에서 정한 사항을 시행령에서 예외적으로 제외할 순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정부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지침)를 도입한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에 투자상 혜택을 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경영 참여 목적으로 분류되면 주식 변동 사항을 5일 안에 보고하고, 단기 매매 차익을 실현(10% 룰)한 경우 이를 기업에 반환해야 한다. 사실상 단기 매매가 불가피한 기관투자가로서 활동할 수 없는 조치여서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재계 관계자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위해 기업들의 경영권이 왜 침해돼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정관 변경을 통해 집중투표제나 노동이사제 등 무리한 요구를 할 텐데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 한 회사에 6년 이상, 계열사에 합산 9년 이상 재직하는 것을 금지한 상법 시행령 개정안도 다음달 시행된다.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무조건 연임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은 헌법상 직업 선택의 자유(15조)를 침해한다는 지적이다. 더불어민주당이 국토교통부 훈령을 고쳐 복합쇼핑몰의 월 2회 의무 휴업을 강제하는 규제를 추진하는 것도 법 위반 소지가 있다.

정부가 법이 아닌 시행령과 시행규칙 개정을 통한 ‘기업 옥죄기’에 나서면서 경제계는 초긴장 상태다. 법 개정은 국회에서의 공론화 과정을 거치고 야당의 반대를 뛰어넘어야 하지만 시행령 개정은 정부 의지만으로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우섭/성상훈/고은이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