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1969년 여름, 서울 거리는 고함과 최루탄 연기로 가득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3선 연임 개헌을 반대하는 대학생과 고교생들이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경찰은 최루탄을 쏘고 곤봉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섰다.

당시 열 살이던 한 소년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은 ‘3선 개헌 반대’ 같은 시위 구호가 아니었다. 월요일인 7월21일 오전, 소년이 집 거실에서 숨죽이며 지켜본 것은 흑백 TV를 통해 실황 중계된 미국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모습이었다.

“(한국) 정부가 그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해 온 가족이 거실에 둘러앉아 TV를 봤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때 처음 미국항공우주국(NASA)이라는 곳을 알게 됐습니다. ‘NASA에서 일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길래 저렇게 먼 달까지 우주선을 보낼 수 있을까. 어떤 곳인지 모르겠지만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죠.”

48년이 지나 중년이 된 소년이 말했다. 그의 이름은 신재원. 동양인 최초의 NASA 항공연구 부문 국장보(associate administrator)다. NASA 최고 책임자인 국장, 부국장과 사업영역별 국장보 등으로 구성된 NASA 최고위층 20여 명 가운데 한 명이다. 최근 한국을 찾은 신 국장보는 “자기주장이 강한 미국에서 상대방 말을 귀 기울여 들은 것이 성공의 토대가 됐다”고 했다.

미국 유학 가 NASA 입사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자신이 NASA에 들어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했다. “어릴 적 꿈은 의사였어요. 그러다 고교 3학년 때 공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화학과 생물보다 물리와 수학 쪽에 훨씬 더 흥미를 느꼈고, 그때는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중공업이 한창 주목받고 발전하던 때라 이런 산업에 꼭 필요한 기계공학을 공부해보자는 생각이었죠.”

신 국장보는 1978년 연세대 기계공학과에 들어갔다. 1학년 때 지도교수가 박영필 교수였다. “미국 텍사스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분이었어요.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NASA 존슨스페이스센터를 방문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는데, 잊고 지내던 아폴로 11호 달 착륙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그때부터 NASA가 제 목표였습니다. 교수님이 ‘졸업하고 뭐 할래’ 하고 물으면 ‘NASA 갈 거예요’라고 대답하곤 했어요.”

2학년 여름방학 때 받은 신체검사에서 시력이 나빠 병역 면제를 받으면서 남들보다 빨리 유학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연세대 졸업 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롱비치캠퍼스에서 석사, 버지니아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89년 클리블랜드에 있는 NASA 글렌연구센터에 들어갔다. 비행기 날개에 맺히는 얼음이 항공기 공기 역학에 미치는 내용을 분석한 논문이 높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었다. 비행기가 구름을 지날 때 미세한 물방울이 날개 가장 앞부분에 부딪히면서 결빙되는데, 이는 비행기의 양력을 떨어뜨려 추락 위험을 높인다. 그는 “꿈꿔오던 곳에 들어가 정말 좋았다”며 “너무 좋아서 토요일 오전이든 오후든 자발적으로 회사에 나가 일을 더 했다”고 했다.

NASA가 국가기관이다 보니 월급이 많은 곳은 아니다. 지금도 실리콘밸리에 있는 구글과 비교하면 NASA 초봉은 구글의 3분의 1에서 4분의 1에 불과하다. 하지만 민간 기업에선 경험할 수 없는 경이로운 프로젝트가 많아 보수와 상관없이 우수한 인재가 몰려든다. 신 국장보는 “NASA 직원들은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이 대단하다”며 “예산이 부족해 우수한 인재를 다 뽑지 못할 때가 많지, 인재를 유치하지 못해 어려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 전역에 열 개 센터를 운영하는 NASA의 1년 예산은 약 190억달러, 정직원은 약 1만8000명이다.

1994년 비행기 추락 사고 원인 밝혀내

[人사이드 人터뷰] '미국항공우주국 동양인 최고위직' 오른 신재원 NASA 항공부문 국장보
NASA는 우주 탐험 말고도 여러 일을 한다. 그가 일하는 항공연구 부문은 민간 항공기, 전투기, 헬리콥터, 초음속 여객기 등에 쓰이는 기술을 다룬다. 1994년 시카고에서 일어난 비행기 추락 사고는 NASA에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1994년 10월31일 시카고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공중에서 대기 중이던 아메리칸이글항공 소속 4184편이 추락해 탑승객 68명이 전원 사망한 사고였다.

당시 일선 연구원이던 그는 미국 정부 합동조사단 일원으로 선발돼 현장으로 갔다. 그의 눈에 띈 것은 4184편과 함께 공중에서 대기하다 무사히 착륙한 비행기들의 날개였다. 비행기 날개마다 결빙이 생긴 상태였다. 어떤 비행기 날개에선 2㎝ 두께의 결빙도 발견됐다. “마치 범죄 수사관이 사건 수사를 하는 것처럼 모든 정황과 자료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원인을 추론하고 이를 증명해나가야 했습니다. 제가 가진 항공과 항공 결빙에 대한 지식 및 경험을 총동원해야 했죠.” 조사단은 날개의 결빙이 원인이라는 그의 조사 결과를 사고 원인으로 공식 채택하고, 이후 미국 내 모든 항공기에 결빙 방지 조처가 내려졌다. 이후 비슷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입사 6년 만에 연구직에서 관리직으로 승진했다. 밑에 연구원을 거느리고 개발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리더 자리였다. 그는 1998년 글렌연구센터 항공안전부장, 2001년에는 항공연구본부장에 올랐다. 관리직이 된 뒤 1년 동안은 매우 힘들었다고 했다. 실력으로 얻은 자리였지만 소수인종 우대정책으로 부당한 혜택을 받았다는 편견으로 시기와 질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저를 뽑은 상관이 이런 말을 했어요. ‘너 자신을 어항에 있는 물고기로 생각해라. 너를 시기하는 사람도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 네 실력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요. 그렇게 1년 동안을 성실하게 일하고, 상대방 처지를 생각하려 노력하니 저를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그가 2001년 NASA 임원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인 케네디스쿨에서 위탁 교육을 받을 때였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에서 일하는 고위 공직자 80여 명이 같이 수업을 듣기 위해 모였다. “각 부처에서 날고 긴다고 하는 엘리트들이 와요. 사례를 갖고 토론하는 수업인데, 다들 모이 달라는 새처럼 손을 번쩍 듭니다. 그런데 교수가 시키면 수업 주제와 상관없이 자기가 부처에서 이런 일을 했다며 자기 자랑만 해요. 교수는 난감한 표정을 짓죠. 다음날 제가 손을 들고 수업 흐름에 맞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다음부터는 제가 손을 들면 교수들이 저를 시켰어요.”

상대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상대 수준에 맞춰 이야기하는 태도는 NASA에서 그가 초고속 승진하는 원동력이 됐다. 2008년 NASA 근무 19년 만에 국장보로 승진했다. 미국 사람도 보통 25년에서 30년은 일해야 올라갈까 말까 한 자리인데 그는 4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됐다. 보잉 등 민간 항공사 관계자와 만나 기술 공동 개발을 논의하고, 정부 관계자와 만난 예산을 따오는 일에서도 잘 듣는 능력이 진가를 발휘한다고 했다. “엔지니어가 범하기 쉬운 실수가 자기 눈높이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의회 보좌관들도 자존심이 세서 NASA 엔지니어 앞에선 말을 다 알아듣는 듯하지만, 결국 자기가 이해 못 한 내용은 자기 보스에게 보고하지 않아요. 아마 오늘 NASA 누구누구와 만났다는 얘기도 안 할 거예요. 저는 영어를 본토 사람만큼 유창하게는 못 하지만 쉽고 간결하게 말하려 노력했습니다.”

혁신은 올바른 질문에서 나와

국장보는 대통령 추천과 상원 인준 없이 올라갈 수 있는 NASA 최고위직이다. NASA의 실무적인 일을 모두 책임진다. 그의 요즘 화두는 NASA가 앞으로 50년, 100년 동안 계속 기술 발전을 선도할 수 있도록 NASA에 혁신 DNA를 불어넣는 일이다. 그는 “혁신을 일으키려면 먼저 올바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했다.

“옛날엔 엘리베이터 통로 위에 기계실이 있어 맨 꼭대기 층을 쓸 수 없었습니다. 이때 유나이티드테크놀로지연구소(UTRC) 경영진은 ‘기계실을 없애라’는 과제를 줬습니다. 엔지니어는 위에 기계실이 없다는 전제하에 엘리베이터를 다시 설계했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소형 모터와 납작한 케이블로 이뤄진 지금의 전기식 엘리베이터입니다. 경영진이 더 좋은 엘리베이터를 제작하라고 했으면 케이블 강도 10% 높이고, 무게 20% 줄이는 식의 개선밖에 이뤄지지 않았을 겁니다.”

신 국장보는 4차 산업혁명을 다룬 《이노베이션코리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지난 5월 펴내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는 혁신을 일으킬 인재와 기술이 모두 있다”며 “중요한 것은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 NASA 항공연구 부문은

美항공 기초 닦아…조용한 초음속 여객기·비행택시 등 연구

조용한 초음속여객기 상상도. NASA 제공
조용한 초음속여객기 상상도. NASA 제공
1915년 3월3일 미국 정부기구로 국가항공자문위원회(NACA)가 신설됐다.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플라이어1호’로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했지만,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초기인 1914년까지 항공 분야에 이렇다 할 투자를 하지 않아 유럽에 비해 항공 분야 기술이 크게 뒤처진 상태였다. 이런 위기감 속에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위원회로 설치한 것이 NACA였다.

NACA는 혁신적인 기술을 잇달아 개발하며 미국 항공산업 경쟁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초기 NACA는 풍동 실험과 비행 실험을 통해 비행 역학을 연구, 비행 속도와 거리를 향상시켰다. 1940년대에는 공기 저항을 많이 감소시킨 비행기 날개를 개발했다. 이는 ‘P-51 머스탱’을 비롯해 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미국 전투기에 적용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미 공군 및 보잉사와 협력해 최초의 초음속 비행기인 ‘X-1’을 개발했다.

1957년 소련(소비에트연방)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려 우주 시대를 열자 미국은 그야말로 패닉에 빠졌다. 1958년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침에 따라 NACA는 우주 사업까지 포함하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으로 확대 개편됐다. NASA는 1969년 아폴로 11호를 쏘아 올려 닐 암스트롱을 달에 내려놓는 등 우주 탐험으로 유명하지만 여전히 항공 분야는 NASA의 큰 축 가운데 하나다.

NASA는 항공연구, 유인 탐사 및 운영, 과학, 우주기술 등 크게 네 부문으로 나뉘어 있다. NASA 항공연구 부문에서 개발된 기술은 지금도 미국 전투기와 여객기 곳곳에 적용돼 있다. 항공산업을 바꿀 기술도 NASA 항공연구 부문에서 개발되고 있다. 조용한 초음속 여객기, 하늘을 나는 택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인 친환경 항공기, 인공위성을 기반으로 한 차세대 항공교통 통제시스템 등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