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 빚 시한폭탄] 금융당국, 늘어나는 가계 빚 방치 … 통화정책 운용 '자승자박'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억제하려면 정책금리를 인상하고 유동성을 회수해야 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런 간단한 정책을 정부는 쉽사리 실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지금도 늘어나고 있는 가계부채가 또 다른 시한폭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 당국도 가계부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경기부터 살리자'며 작년 한 해 동안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시간만 보냈다. 더욱이 작년 8월29일 주택담보대출 규제인 총부채상환비율(DTI)을 완화할 때는 '한시적 인하'카드를 썼다. 부동산 시장이 안정되면 '원위치'시키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시장에는 '3월까지 주택담보대출을 다 받으라'는 신호로 인식됐다.

전문가들은 금융 당국이 적어도 1년 전부터 가계대출의 변동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금융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손질해뒀다면 이런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가계대출 얼마나 심각하기에

[가계 빚 시한폭탄] 금융당국, 늘어나는 가계 빚 방치 … 통화정책 운용 '자승자박'
한국은행에 따르면 1,2금융권을 통틀어 가계대출 잔액은 2008년 말 516조원에서 2009년 말 551조원,작년 10월에는 584조원으로 증가했다. 11~12월 주택담보대출만 8조원 이상 증가(금융감독원)한 점을 고려할 때 12월 말 가계대출 잔액은 600조원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계부채 위험 수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43%다. 일본(135%)이나 미국(128%),독일(98%)보다 높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평균(130%)을 크게 웃돈다.

장민 금융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다른 나라들은 줄어드는 추세인 데 비해 한국은 이 비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금융위기를 겪은 국가들의 경우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50~180%였다"며 "이 수치가 150% 안팎에 이르면 금리 인상이 가계에 큰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다"고 설명했다.

변동금리 대출 비중이 93%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선 정부의 기준금리 인상은 가계에 '직격탄'이 될 수밖에 없다. 고정금리제로의 전환을 적극 유도하지 못한 금융당국의 책임론이 제기되는 이유다.

◆뒷북치는 금융당국

금융당국은 가계부채의 증가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제기되자 작년 말 발표한 '올해 업무보고'에 가계부채 문제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구체적으로는 △주택담보대출비율(LTV)과 예대율 규제를 지속하고 △장기 · 고정금리 대출을 확대하며 △대출 거치기간 연장을 제한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그러나 이런 제도적 변화가 실제 효과를 내려면 올해 하반기나 내년 초는 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이창선 LG경제연구원 금융연구실장은 "이미 늘어난 가계부채를 다시 줄이기는 쉽지 않다"며 "추가적인 대출을 억제하는 정도인데,그 효과는 상당히 지난 후에 나타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금융감독 당국 관계자는 이와 관련,"작년에 경기가 덜 풀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출구전략을 고민하던 정부는 가계대출 문제에 적극 대응하기를 꺼렸다"며 "제도적인 준비를 미리 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

◆가계소득 · 주택가격 안정 필수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금융감독 당국과 기획재정부 한은 등이 가계부채에 대응할 수 있는 종합 대책을 서둘러 내놔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은미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장기적으로 가계부채 문제를 연착륙하게 만들려면 우선 가계소득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주택가격을 적절히 관리해 급락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센티브를 확실히 제공해 고정금리로의 전환을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대출 이자만을 갚는 현재 관행에서 벗어나 원금까지 갚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저소득층의 가계부채도 심각한 수준인 만큼 이들의 소득을 늘릴 방법도 함께 강구해야 근본적 처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은/안대규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