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오주석님은 그림, 특히 동양화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깨우쳐 주신 분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기억나는 명 문장을 몇 개 적어본다. 아래의 문장은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약간 각색한 것이다. 바쁜 직장 생활속에서 우리의 동양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자부심을 가지는 계기를 되기를 바란다.

달마상에는 색이 없다. 먹의 선, 그것은 형태이기 이전에 하나의 정신적 흐름이기 때문에 사물의 존재적 속성의 대명사인 색깔은 껴앉을 자리가 없었다. 색이 필요하지도 않았지만, 거기에 색을 칠할 수도 없었다. 필요한 모든 것이 묵선 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 김명국의 달마도를 보고

동양 수묵화의 본질은 눈보다는 마음으로 보고, 사물의 외양보다는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는 정신이다. 그래서 현상속에 드러나는 색체 효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흑백의 수묵화를 통하여 사물이 얽매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가능하게 한다

전형적인 서양의 풍경화는 화면의 밖에 반드시 한사람의 관찰자가 있어서 주위 풍경을 측량하듯 바라보는 단조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피카소가 입체파로 사물을 보는 자유로운 시각을 이용해 복합적 화면 구성의 새 경지를 열었지만, 종종 형상을 너무 왜곡시켜서 보는 이에게 대상에 대한 객관성을 배제하고 주관속에 일그러진 인상을 보여준다. 반면, 우리의 산수화는 산수 자체를 주인공으로 하고 주인공에 대한 올려보고, 내려보고, 비껴보고, 휘둘러 봄의 관점을 통해서 산수의 다양한 실체에 접근한다.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동양화를 보려고 하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의 신체 구조상 자세히 보게되고 그냥 흘려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옛 문서들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도록 구성되어 있다.

동양화의 여백은 그 자체가 하나의 그림이다. 그곳에 무엇을 그리거나 색을 칠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하나의 편견이다. 서양화의 파란 하늘도 가치가 있지만, 동양화의 비어있는 하늘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의 여백을 제공한다. 그점이 동양화의 멋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