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책 시, 송창선
책 시

송창선

좋은 책은 향기입니다
숨이 깃들어
손끝에서 피어나고
가슴을 적시는
삶의 향기입니다

좋은 책은 풀잎입니다
바람 맞으며
흙에 뿌리 내리고
몸을 푸르게 하는
삶의 노래입니다

좋은 책은 꽃입니다
어둠 속에서
별빛 모으고
눈을 맑히는
삶의 자랑입니다

오늘도
그런 책 속에서
가꾸고
꿈꿉니다

[태헌의 한역]
書冊之詩(서책지시)

好書卽香薰(호서즉향훈)
氣息久隱伏(기식구은복)
開卷手端發(개권수단발)
浥胸人生馥(읍흉인생복)

好書卽草葉(호서즉초엽)
風來不憚搖(풍래불탄요)
土中恒植根(토중항식근)
靑身人生謠(청신인생요)

好書卽花朶(호서즉화타)
暗中集星光(암중집성광)
白日開而示(백일개이시)
淸目人生揚(청목인생양)

今日亦書裏(금일역서리)
養吾夢優美(양오몽우미)

[주석]
* 書冊(서책) : 책. / 之(지) : ~의. 앞말을 관형어로 만드는 구조 조사. / 詩(시) : 시.
* 好書(호서) : 좋은 책. / 卽(즉) : 즉, 곧, 바로 ~이다. / 香薰(향훈) : 향기.
氣息(기식) :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기운, 숨. / 久(구) : 오래, 오래도록.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隱伏(은복) : 숨어 엎드리다. 원시의 “깃들어”를 시의(詩意)와 압운(押韻) 등을 고려하여 역자가 임의로 한역한 표현이다.
開卷(개권) : 책을 열다, 책을 펴다. 원시에서 생략된 것으로 여겨지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手端發(수단발) : 손끝에서 피다, 손끝에서 피어나다.
浥胸(읍흉) : 가슴을 적시다. / 人生馥(인생복) : 인생의 향기, 삶의 향기.
草葉(초엽) : 풀잎.
風來(풍래) : 바람이 오다, 바람이 불다. / 不憚搖(불탄요) : 흔들리는 것을 꺼리지 않다. ※ 이 구절은 원시의 “바람 맞으며”를 의역하여 풀어서 쓴 표현이다.
土中(토중) : 흙 속에, 흙에. / 恒(항) : 늘, 항상.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植根(식근) : 뿌리박다, 뿌리를 내리다.
靑身(청신) : 몸을 푸르게 하다. / 人生謠(인생요) : 인생의 노래, 삶의 노래.
花朶(화타) : 꽃, 꽃송이.
暗中(암중) : 어둠 속에서. / 集星光(집성광) : 별빛을 모으다.
白日(백일) : 대낮, 대낮에. / 開而示(개이시) : 열어서 <별빛을> 보여주다. ‘開’는 연다는 뜻 외에도 핀다는 뜻이 있으므로 꽃이 피어 <별빛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풀어도 무방하다. ※ 이 구절은 원시의 1연과 2연의 행문(行文)을 참고하여 역자가 임의로 추가한 구절이다.
淸目(청목) : 눈을 맑게 하다. / 人生揚(인생양) : 인생의 자랑, 삶의 자랑.
今日(금일) : 오늘. / 亦(역) : 또한 역시. / 書裏(서리) : 책 속, 책 속에서.
養吾(양오) : 나를 기르다. / 夢優美(몽우미) : 우미함을 꿈꾸다, 우미해지기를 꿈꾸다. 곧 아름다워지기를 꿈꾸다. ※ 이 구절은 원시의 “가꾸고 / 꿈꿉니다”를 옮기면서 생략된 것으로 여겨지는 말을 보충하여 한역한 것이다.

[한역의 직역]
책의 시

좋은 책은 향기입니다
숨이 오래 숨어 있다가
책을 열면 손끝에서 피어나
가슴 적시는 인생의 향기입니다

좋은 책은 풀잎입니다
바람 불면 흔들림 꺼리지 않으며
흙 속에 늘 뿌리를 내리고
몸을 푸르게 하는 인생의 노래입니다

좋은 책은 꽃입니다
어둠 속에서 별빛을 모아
대낮에 열어 보여주는
눈을 맑히는 인생의 자랑입니다

오늘도 책 속에서
나를 가꾸고 아름다워지기를 꿈꿉니다

[한역 노트]
17세기와 18세기 교체기에 활동하였던 영국의 수필가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은 “책은 대천재가 인류에게 남기는 유산”이라고 하였다. 책을 지은 이가 반드시 대천재인 것은 아니겠지만, 펼쳐두고 읽어보면 얼마든지 소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그 ‘유산’을, 역자는 바쁘다는 등의 핑계로 외면해온지가 제법 오래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책은 열지 않으면 종이뭉치에 불과하다”는 말처럼 역자의 가슴에 와 닿았던 경구(驚句)도 없었던 듯하다. 아! 역자의 나태와 무관심으로 열지 않은 책 속에 있는 글자들이 어느 시점에 역자에게 다이아몬드가 되었을지 알지도 못한 채, 역자가 고이 모시고만 살아온 그 책들은 그저 글자들의 감옥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역자는 시인의 이 시를 읽고 나서, ‘종이뭉치’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지고 말았다.

시인에 의하면 "좋은 책"은 가슴을 적시고, 사람을 푸르게 하며, 눈을 맑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런 책을 통하여 자신을 가꾸고 꿈을 키운다고 하였다. 시인이 “좋은 책”과 나쁜 책에 대한 견해를 직설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비유를 통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책의 조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얘기한 것으로 보인다.

좋은 책에 대한 시인의 조건을 역자가 거칠게 요약해 보면 대략 이러하다. 첫째로, 좋은 책은 향기로워야 한다. 그 향기는 책에 손을 대지 않으면 절대 맡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일단 책에 손을 대면 손끝에서 피어나 가슴을 적시는 삶의 향기가 되어주는 것이다. 둘째로, 좋은 책은 푸르러야 한다. 땅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는 풀잎이 사람에게 싱그러움을 주듯이 푸른 책은 사람을 생기 있게 해주어 삶의 노래가 되어주는 것이다. 셋째로, 좋은 책은 찬란해야 한다. 시인의 생각에 의하면 꽃은 찬란한 별빛을 모아두었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존재물이다. 그 찬란하게 아름다운 것이 눈을 해맑게 하며 삶의 자랑꺼리가 되어주는 것이다.

어느 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쓴 글이나 시를 엮어서 만들어낸 “좋은 책”은 바로 그 작가의 분신이자 피와 살이다. 그 피가 제대로 수혈되고 그 살이 온전히 영양소가 된다면, 그 책은 확실히 ‘나’의 마음의 양식이 된 것이다. 그러지 못한 책이라면 나에게 결코 “좋은 책”이 아니거나, 내가 아직 열지 않아 한낱 '종이뭉치'에 불과한 책일 것이다.

지금은 은행도 시장도 놀이터도 책도 핸드폰 속으로 들어가 따로 또 살림을 차린 모바일 시대이다. 거기에 더해 AI가 지은 시가 등단(登壇)까지 했다는 이웃나라 얘기가 들려오는 문명 과속의 시대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책을 얘기하는 것이 다소 웃기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책은 누군가가 쓰지 않는다면 모바일 세상에서도 만날 수 없고, AI도 결코 활용할 수 없을 것임은 분명하다. 기계가 시를 짓고 소설을 쓰며 다양한 책까지 집필하는 시기가 마침내 온다 하여도, 아니 이미 왔다 하여도, 우리 영혼의 영토를 넓혀가는 주체가 그런 기계가 아니라 숨 쉬는 인간이 만든 “좋은 책”이기를 바라는 것이 너무 낭만적인 생각인 걸까?

역자는 4연 19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4단 14구의 오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각기 5행으로 이루어진 원시의 제 1·2·3연은 각 연마다 4구의 오언고시로 한역하고, 4행으로 이루어진 원시의 제 4연은 2구의 오언고시로 한역하였다. 3단까지는 단마다 운을 달리 하며 짝수구에 압운하였으며, 4단은 매구에 압운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의 압운자는 ‘伏(복)’·‘馥(복)’, ‘搖(요)’·‘謠(요)’, ‘光(광)’·‘揚(양)’, ‘裏(리)’·‘美(미)’가 된다.

2021. 7. 6.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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