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우면서도 먼 이웃 한국과 일본은 애증 관계다. 두 나라는 아시아 지역에서 경제수준이 가장 높고,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공통점도 있다. 하지만 역사 인식과 독도 영유권 등을 놓고 정치·외교적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양국에서 보수정권이 출범한 지 1년이 넘도록 정상회담조차 열리지 않고 있다.

한일 기업인들이 꼬인 양국관계 개선을 위해 나섰다. 경제협력으로 정치·외교적 난제를 풀자는 취지에서다. 양국 업계를 대표하는 한일경제협회와 일한경제협회는 제3국시장에 공동 진출키로 의견을 모았다. 2월24일부터 26일까지 미얀마에 공동 조사단을 파견하고, 현지 세미나를 열었다.

삼성, 롯데, 한화, 효성 등과 일본의 미쓰비시, 스미토모, 미쓰이, ANA 등 50여사가 참여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제3국에서 한일 기업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현지 진출 방안을 공동 논의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미얀마 조사단에 참가해 지켜본 한일 경제협력 현장을 소개한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6시간 걸려 23일 밤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 도착했다. 미얀마 프로젝트 발굴을 위한 50여명의 한일공동 조사단이 비행기에 내려 공항청사에 들어서자 삼성전자의 갤럭시 광고판이 반갑게 맞았다. 청사 내부 광고판은 삼성과 일본의 도시바 파나소닉 등 한일 IT기업들의 독차지였다.

양곤 시내를 오가는 차량들도 한국과 일본 차들이 점령했다. 비좁은 도로를 다니는 차량 대부분이 중고차다. 10대 중 8대는 오른쪽에, 2대 정도가 왼쪽에 운전석이 붙어 있다. 왼쪽 차량은 한국제, 오른쪽 차량은 일본산이다. 신한은행 등 한국계 은행 간판도 눈에 띄었다. 글로벌 기업들에 가장 늦게 문을 연 미얀마시장을 놓고 한일 기업간 시장쟁탈전이 이미 시작됐다.

◆ 제3국 경제협력으로 꼬인 정치·외교 푼다

양곤 시내 채트리움호텔에선 24일 오후 한일 기업인 50여명이 참석한 세미나와 교류회가 열렸다. ‘미얀마 프로젝트 발굴을 위한 한일 조사단’ 소속 50여개사 대표, 양국의 기업 주재원, 일본공사 등 정부측 인사들도 참여했다. 기업인들은 이날 세미나에서 국적을 떠나 경쟁사에 공개하기 어려운 사업의 깊숙한 뒷 얘기와 숨겨진 정보를 교환했다.

이날 세미나는 ▲다카하라 마사키 JETRO 양곤사무소 소장의 ‘미얀마의 투자환경과 일본 기업 진출 동향’ ▲안재용 KOTRA 양곤무역관장의 ‘미얀마 투자환경과 진출 전략’ ▲메가 히데시 양곤 일본상공회의소장의 ‘일본 기업 진출 현황’ ▲모영주 네모건홍인터내셔널 대표의 ‘미얀마에서의 한중일 전략과 한일 현력 가능성’ ▲이도 미쓰오 미쓰비시상사 양곤 대표의 ‘티라와공업단지 개발 소개’ ▲박정환 대우인터내셔널 부사장의 ‘대우인터내셔널의 미얀마 사업 내용’ ▲이사야마 히로쓰구 한국미쓰비시상사 사장의 ‘미얀마에서의 한일 연계의 의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종윤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부이사장은 “한일 기업들이 모여 미얀마에서 시장 조사와 협력 세미나를 연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사건” 이라며 “미얀마 시장에 한일 기업이 공동 진출하면 투자 리스크를 줄일 수 있고 과잉 경쟁도 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레나가 가즈오 일한산업기술협력재단 전무는 “50여명의 양국 기업인이 단체로 미얀마에 온 것 자체가 양국 경제협력사에서 역사적인 일” 이라고 평가한 뒤 “양국 관계가 어려울수록 기업인들의 협력이 더욱 필요하다”고 화답했다.

◆ 제3국 첫 공동 진출, 미얀마로 잡은 까닭

미얀마는 2010년까지 사회주의와 군부독재 시대를 거치며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 중 최악으로 경제상황이 악화됐다.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832달러에 불과하다. 라오스(1204달러), 캄보디아(852달러)보다도 낮다. 미얀마 최대 상업 중심 도시인 양곤도 중심지에서 10분 정도만 벗어인 동네에 들어가 보니 우리나라의 1950~60년대 수준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었다.

미얀마는 2011년 3월 테인 세인 대통령 취임 이후 개혁·개방과 민주화를 추진해왔다. 새 정부는 사회 인프라 개선과 경제발전을 위해 외국자본 유치에 적극적이다. 26일 서울에서 열린 ‘한·아세안 관계 조망 국제콘퍼런스’에 참석한 우 완나 마웅 르윈 미얀마 외교장관은 “미얀마 정부의 목표는 정치적 안정, 민주주의 사회로 정치적 전환, 국민의 사회·경제적 삶 향상” 이라며 “민주사회로 체제 전환을 위해 굳은 결심과 의지를 가지고 전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얀마의 인구는 6200만 명을 넘는다. 가스, 철광석, 원목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게다가 아세안과 중국, 인도 등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경제성장 잠재력이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장이 열리고 있는 미얀마로 한국과 일본 기업들이 달려가는 배경이다.

한일 양국 기업과 정부 전문가들은 미얀마 투자 유망 산업으로 자원개발, 전력 및 상하수도, 도로 건설 등 사회 인프라를 최우선으로 꼽았다. 외국 기업 진출을 겨냥한 호텔과 레지던스 건설, 싼 인건비를 활용한 봉제 및 섬유업, 프랜차이즈 외식업, 의류 및 화장품업 등도 전망이 밝다.

이시야마 한국미쓰비시 사장은 “천연자원과 인구, 노동력 등을 감안하면 봉제업이 가장 유망하다” 며 “ 투자비가 많이 드는 자원 및 에너지 개발사업에서 특히 한일기업간 협력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롯데자산개발의 김민근 상무는 “호텔과 레지던스 사업에서 한일이 협력하면 좋은 성과를 낼 것” 이라며 “일본의 금융자본과 한국의 건설기술이 합쳐지면 투자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일 대기업간 과당 경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현지에서 투자컨설팅 업무를 하고 있는 네모건홍인터내셔널의 모영주 대표는 “신규 프로젝트에서 한일 기업간 과잉 수주 경쟁으로 수주단가가 하락하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다” 며 “양국 기업들이 사전 조율하면 현지 사업에서 더 많은 성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