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페블비치골프링크스에서 열린 AT&T페블비치프로암 4라운드 18번홀. ‘쇼트게임의 황제’ 필 미켈슨(46·미국)이 굴린 공이 1.6m 거리에 있는 홀컵으로 곧장 향했다. 바람에 바짓단이 심하게 나부꼈지만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6피트(약 2m) 이내의 쇼트 퍼팅 성공률 100%를 자랑하던 그다. 공이 들어가면 연장전을 치러야 할 상황이었다.

공은 그러나 홀컵을 스친 뒤 튕겨나오고 말았다. 지친 노병처럼 허리를 굽힌 미켈슨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3년 만에 미국프로골프(PGA) 우승을 고대했던 노장의 분전이 무위로 끝난 순간, 그린 옆에선 한 사내가 아내와 아들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잊혀진 챔프’ 본 테일러(40·미국)였다. 17언더파 단독 선두로 먼저 경기를 끝낸 그는 이날 6타 차 열세를 뒤집는 역전 드라마를 연출했다. 2005년 8월 리노타호오픈 우승 이후 10년8개월 만의 챔프 복귀였다.
본 테일러가 14일 열린 AT&T페블비치프로암 4라운드 첫 번째 홀에서 티샷을 날리고 있다. 2014년 보트 전복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한 이후 그는 대회 출전을 포기하려던 마음을 버렸다고 했다. 테일러는 대회마다 ‘패밀리’란 글자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다닌다. AFP연합뉴스
본 테일러가 14일 열린 AT&T페블비치프로암 4라운드 첫 번째 홀에서 티샷을 날리고 있다. 2014년 보트 전복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한 이후 그는 대회 출전을 포기하려던 마음을 버렸다고 했다. 테일러는 대회마다 ‘패밀리’란 글자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다닌다. AFP연합뉴스
◆‘잊혀진 챔프’의 부활

“열심히 연습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어요. 포기하지 말라며 뒤를 지켜준 아내가 없었다면 벌써 다른 직업을 알아봤을 겁니다.”

테일러는 2004, 2005년 리노타호오픈을 연속 제패한 ‘멀티 챔프’다. 하지만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당시 대회가 세계적인 골프 이벤트 ‘월드골프챔피언십(WGC)’에 대항해 급조된 B급 PGA 대회였던 탓이다. 이후 A급 대회 우승이 없자 그 역시 B급 선수로 전락해갔다. 챔피언에게 주는 출전 특혜가 끊겼고, 월요 예선을 봐야 했다. 2부투어에서 번 돈으로 1부투어 출전 비용과 생활비를 충당했다. 세계랭킹은 447위로 곤두박질쳤고 늘 생활비가 모자랐다. ‘조건부 시드’로 3년간 출전한 PGA투어 17개 대회에서 번 돈은 16만5000달러(약 1억9920만원)에 불과했다. 그는 “항공화물료를 아끼기 위해 대회 출전 때 짐가방을 하나만 들고 다닌다”고 했다.

행운도 따라줬다. 애초 그는 이번 대회 출전자 리스트에 없었다. 막판에 칼 페터슨이 출전을 포기한 덕에 대타로 경기에 나섰다. 15번홀에서 친 두 번째 샷은 ‘운수 대통’의 압권이었다. 그린 밖으로 튀어나갈 법한 공이 동반 플레이어인 맷 존스의 공을 맞고 홀컵 옆 50㎝에 붙은 것이다. 손쉽게 버디를 잡아낸 그는 존스에게 꾸벅 인사했다. 16번홀 8m짜리 버디 퍼팅도 원래는 실수였다. 그는 “왼쪽 브레이크를 너무 많이 본 퍼팅이었는데 경사를 타고 홀컵 쪽으로 빨려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후반 13번에서 16번홀까지 네 홀 연속 버디를 낚아챘다.

우승상금 126만달러(약 15억2200만원)를 받은 그는 내년부터 2년간 PGA투어 풀 시드는 물론 올 시즌 마스터스, PGA챔피언십 등 메이저대회 출전도 보장받았다.

◆부담이 컸을까…무너진 강성훈

강성훈
강성훈
선두 미켈슨을 3타 차로 추격하던 강성훈(29)은 4라운드에서만 5오버파를 치며 8언더파 공동 17위로 무너졌다. 1라운드 이븐파, 2라운드 11언더파, 3라운드 2언더파를 치며 샷감을 끌어올렸던 터라 아쉬움은 더 컸다. 버디는 2개밖에 잡지 못했고, 보기를 7개나 내줬다. 후반으로 갈수록 드라이버샷과 아이언, 퍼팅이 모두 흔들렸다. 17번, 18번홀에선 연속 보기를 범하면서 5년 만의 10위권 진입 기대도 물거품이 됐다.

이번 대회에서 세계랭킹 1위 조던 스피스(7언더파)와 3위 제이슨 데이(9언더파)에 뒤지지 않는 잠재력을 확인한 것은 수확이다. 강성훈은 “경험 많은 캐디의 조언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며 “다시 우승에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