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가 무효라는 법원의 판단이 연거푸 나왔다. 이번엔 임금피크제 도입 동의 절차가 문제가 됐다. 재판부는 과반이 동의했더라도 근로자들이 의견을 모을 기회가 없었다면 집단적 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임금피크제 도입 요건을 엄격하게 보는 법원 판결이 잇따르면서 임금피크제 소송전이 더욱 뜨거워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법원 “임금총액 늘어도 근로자 불리”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 또 무효 판결
대구지방법원 제14민사부(부장판사 김정일)는 대구경북능금농업협동조합 퇴직근로자 5명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임금 청구 소송에서 최근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이 조합에 원고들이 임금피크제로 깎인 임금 약 2억7000만원을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 무효 판결은 지난 11일 KB신용평가에 이어 두 번째다.

대구경북능금농업협동조합은 2016년 정년을 만 58세에서 60세로 연장하는 대신 임금을 삭감하는 내용의 임금피크제를 시행했다.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 직원은 만 57세에 임금이 기존의 70%로 줄어드는 것을 시작으로 58세 65%, 59세 60%, 60세 55%로 깎인다. 이 기간 받는 연봉 총액은 기존 연봉의 250%로 임금피크제가 도입되지 않았을 때 만 57세부터 정년(만 58세)까지 받는 금액(기존의 200%)보다는 늘어난다.

이 조합은 2013년 고령자고용법 개정에 따라 2016년부터 근로자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정해야 하는 의무가 생기면서 이 같은 내용의 임금피크제 도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농협중앙회의 지도를 받고 노사협의회, 개별사업장별 설명회 등을 거쳐 2015년 임금피크제를 도입한다는 내용으로 취업규칙을 변경했다. 근로자 379명 중 265명의 동의를 받았다.

원고들은 이에 반발해 2021년 5월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들은 “조합의 임금피크제는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만을 이유로 일정 기간 급여를 감축해 고령자를 차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합 측은 “은퇴할 때까지 임금 수령액이 더 늘기 때문에 근로자에게 불리한 취업규칙 변경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법원은 원고 주장대로 취업규칙이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됐다고 봤다. 재판부는 “정년 연장과 상관없는 57세와 58세에도 임금이 감액되는 데다 2년간 같은 일을 더 해도 임금총액은 기존보다 50% 증가하는 데 그친다”고 판단했다.

과반 동의했어도 ‘위법’

이번 판결 과정에선 조합 측의 임금피크제 도입 절차 자체도 문제가 됐다. 재판부는 “근로자들의 동의서 대부분이 조합이 공문을 발송한 다음날 제출됐다”며 “근로자들이 모여 토론이나 의견 교환을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근로자들이 집단적 동의를 표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취업규칙을 불리하게 변경할 때 갖춰야 할 절차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원고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대구경북능금농업협동조합은 노동조합이 없기 때문에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취업규칙을 변경하려면 근로자 과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근로자들 사이의 의견 교환’을 거쳐 찬반 의사를 취합하는 방식도 허용된다.

근로자들이 종이 한 장에 개별적으로 서명하는 의사 취합방식도 문제 삼았다. 재판부는 “누가 동의하고 누가 동의하지 않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며 “상급자가 먼저 동의서에 서명했을 경우엔 근로자들의 의견 교환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사협의회를 거쳤다”는 조합 측 주장도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들이 근로자들의 의사표시를 대리할 권리를 위임받은 것은 아니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 판결로 고령자고용법 개정에 따라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들도 골머리를 앓을 전망이다. 김동욱 법무법인 세종 노동그룹장은 “근로자 과반 동의가 있었음에도 회의 방식을 거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취업규칙 변경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본 것”이라며 “법원에서 임금피크제 도입의 절차적 요건을 까다롭게 판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진성/곽용희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