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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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건강보험 재정에 예산을 직접 투입하면서도 보험 지출 규모와 용처엔 개입할 수 없는 현행 건강보험 국고지원 제도에 대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매우 특이하다"는 지적을 한국 정부에 공식 전달한 것으로 12일 확인됐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의료보험 제도가 국가의 재정건전성을 과도하게 훼손하지 않도록 정부나 국회가 지출 규모를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견제 장치를 마련했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건강보험 재정을 국민연금과 마찬가지로 '기금화'해서 정부·국회의 견제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국내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국제기구의 진단이어서 향후 기금화 논의가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한국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2월 9~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보건분야 예산회의'를 개최한 OECD는 하루 전인 8일 한국 기획재정부와 별도로 양자회의를 갖고 이 같은 의견을 전달했다. 이날 양자회의엔 한국 측 대표로 기획재정부 공무원 1명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소속 연구위원 2명이 참석했고, OECD 측에선 보건분과 사무국 직원 2명과 예산·공공관리분과 사무국 직원 1명이 배석했다.

OECD는 직접 작성한 양자회의 요약 보고서를 통해 "정부가 보험 지출을 전혀 모니터링할 수 없고 지출 증가율도 결정할 수단이 없는데도 정부가 자동적으로 건보 재정에 예산을 투입하는 현재 한국의 상황은 '매우 특이하다(highly unique)'"고 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OECD 회원국들은 아무리 의료보험 기금이 독립적이라 하더라도 정부의 심의, 국회의 심의·동의 절차를 거쳐 의료 지출을 정하도록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2007년 이후 당해 건보 수입의 20%를 국고에서 지원하도록 규정한 국고지원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올해 국고지원 예산은 11조원이다.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지만 건강보험 재정이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결정하는 작업에 정부와 국회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보건 분야 지출은 의학 전문성이 우선 고려돼야 한다는 이유로 의약업계가 주도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가 건보 수입 및 지출을 스스로 정하기 때문이다.

OECD, 사실상 건보 기금화 요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한국의 건강보험 국고지원 제도에 대해 “매우 특이하다”는 지적을 내놓은 이유는 건보 지출 규모가 정부의 통제 없이 빠른 속도로 불어나면 재정건전성을 악화시킬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민의 건강보험료와 정부의 국고 지원으로 마련된 건보 재정의 총 지출액은 2001년 14조1000억원에서 2011년 37조4000억원, 2021년 77조7000억원으로 급격한 속도로 불어났다. 고령화가 본격적으로 닥치기도 전에 이처럼 건보 지출이 빠르게 늘어난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건보 재정이 정부와 국회의 견제를 받지 않는 점을 꼽는다.
2020년 작성된 2020~2060 건강보험 장기재정전망 내용.  /감사원 제공
2020년 작성된 2020~2060 건강보험 장기재정전망 내용. /감사원 제공
정부도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건보의 기금화를 추진하고 있다. 건보가 기금화되면 현재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일반회계로 관리되는 건보 재정이 정부의 예산 일부로 편입되기 때문에 예산 당국과 국회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건보의 지출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득을 보는 의료업계의 기득권에 막혀 건보 기금화 논의가 좌초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OECD는 지난달 8일 한국 정부와 양자회의를 열고 사실상 기금화에 준하는 건보 지출 통제가 바람직하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OECD가 작성한 양자회의 요약 보고서에 따르면 OECD는 “보건 지출의 책임성(accountability)을 달성하는 동시에 지출 증가율을 모니터링함으로써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면서 “건강보험 재정을 국가 예산 아래에 포함시키는 방법이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OECD는 의료보험 기금을 정부와 국회 통제 아래에 둔 다른 OECD 회원국의 사례까지 한국에 소개했다. 구체적으로 “프랑스는 1990년대 이후 의료보험 기금의 예산을 반드시 국회의 검토와 승인을 얻도록 했고, 벨기에는 정부가 의료 지출 규모의 실질 증가율을 결정한다”고 OECD는 설명했다.

한국도 8대 사회보험 가운데 6개 사회보험(국민연금·공무원연금·군인연금·사학연금·고용보험·산재보험)은 모두 기금으로 운영돼 정부와 국회의 통제를 받는다. 회계도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된다. 반면 의료와 관련된 건강보험과 노인장기요양보험 등 두 사회보험만 기금화돼있지 않아 정부와 국회의 통제를 사실상 받지 않고 회계와 지출 결정 과정이 불투명하다.

OECD는 한국 정부를 향해 “의료보험만 다른 사회보험과 다르게 취급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OECD가 ‘기금화’라는 단어를 직접 쓰진 않았지만, 사실상 한국 정부에 건보 기금화를 요구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의료업계는 기금화에 '반대'

문제는 의약업계가 기금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보가 기금화되면 건보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의약업계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지난 1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건강보험 정부 지원 항구적 법제화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건보 재정에 대한 정부의 항구적인 국고 지원을 촉구하고 있다. 이처럼 의료업계는 건강보험 기금화엔 반대하며 정부의 국고 지원이 보다 안정적으로 확대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진=뉴스1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지난 1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건강보험 정부 지원 항구적 법제화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건보 재정에 대한 정부의 항구적인 국고 지원을 촉구하고 있다. 이처럼 의료업계는 건강보험 기금화엔 반대하며 정부의 국고 지원이 보다 안정적으로 확대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진=뉴스1
현행 법령에 따르면 보건복지부 산하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가 국민이 내는 건강보험의 보험료율, 의료기관에 지급되는 건보의 요양급여 비용 등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사실상 건보의 살림살이를 결정하는 권력을 건정심이 갖고 있는 셈인데, 건정심 위원 25명 중 의약계 대표가 8명으로 영향력이 막대하다. 정부 측 위원은 위원장을 포함해 3명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 위원들도 노동조합 등 소속으로 전문성이 낮아 건정심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작다.

한 경제부처 고위 관료는 “현재 병원 수입의 절반 정도가 건보 급여인데, 병원이 자신의 수익원인 건보 지출 규모를 스스로 정하는 구조여서 이해상충 여지가 크다”고 말했다.

보건 분야 주무부처인 복지부 역시 기금화에 공식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작년 12월 기자간담회에서 “건보 지출을 효율화하고 운영 투명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취지엔 공감하지만 기금화가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라며 “국회에 자주 보고하고 재정전망을 포함해 주요 사안을 국민에게 주기적으로 알리는 것도 투명성을 제고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기금화 논의가 공전하고 있는 사이 건보 재정은 빠른 속도로 악화하고 있다. 복지부와 기재부에 따르면 건보의 연간 수입에서 지출액을 뺀 당기수지는 작년 흑자를 냈지만 올해 1조4000억원 적자로 돌아설 것으로 전망된다. 적자 전환된 건보 재정은 향후 급격한 속도로 악화돼 현재와 같은 건보 지출 구조가 그대로 이어지면 건보 누적적자가 2070년까지 70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정부는 전망하고 있다.

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건보 회계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정부와 국회의 적절한 견제가 이뤄지기 위해선 건보 재정을 기금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의진/도병욱 기자 just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