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이공계 연구중심 대학원으로 출발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총장 신성철·사진)이 16일 개교 50주년을 맞는다. 14일 KAIST에 따르면 16일 오전 대전 본원 대강당에서 설립 유공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 기념식은 ‘한국을 빛낸 50년, 인류를 빛낼 100년’을 주제로 유튜브 채널을 통해 중계된다. 로봇·신소재 분야 신진 교수들이 발표에 나선다.
미국 성인잡지 허슬러 발행인이자 성인물 업계의 논쟁적 인물로 평가받는 래리 플린트가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플린트는 지난 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워싱턴포스트(WP) 등이 보도했다.래리 플린트는 미국 사회에서 ‘외설이냐, 표현의 자유냐’란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플린트는 노골적인 내용의 성인물을 발행해 외설죄로 여러 차례 법정에 섰다.하지만 그는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미국 수정헌법 1조의 수호자라고 스스로 주장하며 법정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 ‘래리 플린트’(1996)로 개봉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켄터키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플린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GM 공장에서 일하다가 1968년 동생과 함께 오하이오주에서 ‘허슬러클럽’을 열면서 성인물 업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성인 클럽을 홍보하기 위해 소식지를 발간했고, 이후 이 소식지를 성인 잡지 ‘허슬러’로 탈바꿈시켰다. 플린트는 발행 부수 300만 부에 달할 정도로 인기를 구가했던 허슬러를 발판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며 성인물 왕국의 제왕으로 군림했다.하지만 그의 공격적인 성인물 사업은 보수 진영과 복음주의 기독교 단체의 큰 반발을 초래했다. 1975년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나체로 일광욕을 즐기는 사진을 몰래 찍어 허슬러에 실었고, 표지 사진에 대중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충격적인 외설 사진을 게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특히 그는 1988년 ‘허슬러 대 폴웰’ 소송사건에서 승소하면서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플린트는 이 재판에서 수정헌법 제1조를 무기로 허슬러 게재 내용은 공인을 비판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이자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했다. 연방대법원은 결국 그의 손을 들어줬다.플린트는 자신을 ‘걱정이 많은 외설물 행상’이라고 불렀다. 1996년 발간한 자서전 제목은 《꼴사나운 남자: 외설물 제작자, 전문가, 추방자로서의 나의 삶》이었다.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
미국의 인기 데이트 앱 ‘범블’을 창업한 31세 여성 사업가가 1조원대 부자 대열에 최연소 나이로 합류했다. 범블 창업자 휘트니 울프 허드(사진)는 뉴욕증시에 회사를 상장하면서 억만장자가 됐다고 지난 12일 미 경제 전문지 포브스 등이 보도했다.범블은 11일 상장 첫날 70.31달러로 거래를 마쳤고, 2154만 주를 보유한 허드의 주식 평가액은 15억1000만달러(1조6700억원)를 기록했다. 거래 이틀째인 12일엔 75.46달러에 장을 마감해 허드의 재산은 16억2000만달러(1조7900억원)로 불어났다. 포브스는 울프 허드가 재산을 물려받지 않고 자수성가한 억만장자 가운데 최연소이고, 기업공개(IPO)를 한 미국의 여성 최고경영자(CEO)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리다고 전했다.허드가 7년 전 창업한 범블은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권한을 여성 회원에게만 부여해 인기를 끌고 있다. 여성 회원이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앱 환경을 조성해 차별성과 경쟁력을 구축한 것이다. 그는 범블의 경쟁업체인 틴더의 공동창업자이기도 하다. 틴더 마케팅 부사장이던 그는 사내 성희롱과 차별문화를 지적하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뒤 퇴사했다.블룸버그 통신은 “틴더에서 울프 허드가 겪은 성희롱 사건이 여성에게 우선권을 주는 데이트앱 범블의 탄생을 촉진했다”고 전했다.틴더와 결별한 그는 2014년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여성 우선의 소셜네트워크 플랫폼을 지향하는 범블을 창업했고, 이용자 수 1억 명이 넘는 데이트 앱 회사로 키워냈다. 허드는 향후 회사 전망과 관련해 로이터통신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데이트앱 인기에 더욱 불을 붙였다고 밝혔다. 그는 “사람들은 디지털 방식으로 먼저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한 뒤 물리적 관계로 진전하고 있으며, 이것은 정말 경이로운 변화”라고 말했다.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
한국계인 영 김 연방하원의원(한국명 김영옥·사진)이 미국 정계에서 위안부 역사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중심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연방하원에 당선된 김 의원은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로 규정하는 논문을 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를 향해 최근 트위터로 “역겹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램지어 교수의 주장은 진실이 아니고, 사실을 오도하는 내용이라고 일축하면서 “나는 위안부 문제를 오랫동안 다뤄왔다”고 소개했다.김 의원은 위안부 문제에 14년 이상 천착했다는 것이 13일(현지시간) 한인 사회의 전언이다. 김 의원은 2007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는 결의안(H. R. 121)이 하원 본회의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숨은 공로자로 꼽힌다. 당시 김 의원은 하원 외교위원회의 거물이었던 에드 로이스 전 의원의 보좌관이었다.김 의원은 보좌관으로서 로이스 전 의원을 도와 위안부 결의안이 초당적인 지지를 받는 데 힘을 보탰다.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