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은행의 프라이빗뱅커(PB)가 마스크를 착용한 채 고객에게 금융상품을 설명해주고 있다. 하나은행은 2010년 금융권 최초로 유언대용신탁을 출시한 바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하나은행의 프라이빗뱅커(PB)가 마스크를 착용한 채 고객에게 금융상품을 설명해주고 있다. 하나은행은 2010년 금융권 최초로 유언대용신탁을 출시한 바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사망 시점 1년 이전에 금융회사가 운용하는 유언대용신탁에 맡긴 신탁자산은 유류분(遺留分)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법원 판결이 처음으로 나왔다. 유류분은 고인(피상속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상속인이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유산 비율을 뜻한다. 이번 판결로 피상속인의 유언에 따라 재산을 상속할 길이 열린 셈이어서 상속 관행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민사3부(부장판사 김수경)는 최근 고인의 첫째 며느리와 그 자녀들이 고인의 둘째 딸을 상대로 11억여원을 돌려달라며 제기한 유류분 반환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며느리는 고인인 시어머니가 둘째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사망 3년 전 가입한 유언대용신탁 자산에 대해 유류분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민법에서는 유류분의 범위를 상속이 이뤄지는 시점에 고인이 소유한 재산, 생전에 상속인에게 증여한 재산, 사망하기 1년 이내에 제3자에게 증여한 재산으로 본다. 재판부는 “고인이 유언대용신탁으로 맡긴 재산의 소유권은 고인이 아니라 신탁을 받은 금융회사가 가진다”며 “신탁계약 또한 3년여 전에 맺어져 유류분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신탁재산은 수탁자 명의로 소유권 이전등기가 되면 수탁자 소유가 된다.

피고를 대리한 김상훈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신탁제도로 유류분 적용을 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 제시한 판결”이라며 “이 법리가 정착되면 고인의 의지대로 유산을 처분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원고는 1심에 승복하지 않고 항소했다.
유언과 무관하게 분배되는 유류분…법원, 40년 만에 사실상 무력화
"유언대용신탁에 맡긴 재산은 유류분 반환대상 아니다"
[단독] 신탁에 유산 맡기면 몰아주기 상속 가능
국내 상속제도의 근간은 민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상속분’과 ‘유류분’이다. 민법 1009조에서는 피상속인 사망 시 유가족(상속인)이 받을 수 있는 상속재산의 비율인 상속분을 ‘배우자 1.5, 자녀 각 1’로 정하고 있다. 피상속인이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더라도 피상속인의 자녀와 배우자는 해당 법정상속분의 2분의 1을 무조건 유류분으로 받을 수 있다.

사법부가 최근 유언대용신탁 상품에 맡긴 재산은 유류분 반환 대상이 아니라는 첫 판례를 내놓음으로써 1979년 처음 도입된 유류분 제도가 40여 년 만에 사실상 무력화됐다. 향후 국내 상속 관행에 적잖은 변화가 일 것으로 예상된다.

사망 1년 전에 가입했다면 유류분 제외

유언대용신탁 상품과 관련한 소송은 2017년 11월 박모씨의 별세 후 직계가족 간 유산 다툼에서 비롯됐다. 박씨는 2014년 둘째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하나은행의 ‘하나 리빙 트러스트 신탁재산’에 가입했다. 신탁 대상은 현금 3억원과 수도권 부동산 세 건이었다. 박씨의 사망으로 둘째 딸이 신탁재산을 상속하게 되자 첫째 며느리 윤모씨(윤씨의 남편은 사망)는 자녀 2명과 함께 신탁재산에 대한 유류분 11억여원을 달라며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윤씨의 유류분 반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언대용 신탁상품은 유류분 대상 재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민법(1113·1114조)과 대법원 판례를 종합하면 유류분은 상속이 시작될 시점에 고인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적극재산)과 생전에 상속인 혹은 제3자에게 증여가 완료된 재산(증여재산)을 기반으로 계산한다. 생전에 상속인에게 증여한 재산은 시기와 상관없이 유류분 대상이 되지만 은행처럼 제3자에게 증여한 재산은 상속개시 전 1년간 이뤄진 것만 포함된다. 이때 제3자가 해당 재산을 받음으로써 특정 상속인에게 손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이 역시 시기와 상관없이 유류분 대상에 포함된다.

재판부는 유언대용신탁이 이뤄지면 재산의 소유권은 하나은행으로 넘어가므로 고인 소유의 재산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나은행이 신탁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재산의 주인은 시어머니가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대법원은 신탁법상 신탁에 대해 수탁자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판례를 꾸준히 유지해왔다.

이 사건 재산은 유류분 반환 대상인 증여재산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피고를 대리해 승소를 이끈 김상훈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는 “신탁상품을 통해 하나은행으로 무상 이전된 증여 행위(2014년)는 상속개시 시점보다 1년 이상 앞서 유류분이 될 수 없다”며 “원고는 시어머니와 하나은행이 짜고 며느리에게 손해를 끼치기 위해 은행에 재산을 넘겼다는 점도 증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재산을 자식에게 안 물려줄 수도

유언의 효력을 인정받는 유언대용신탁 상품이 유류분의 대상인지는 2012년 상품 출시 당시부터 논란이 됐다. 유언대용신탁 재산은 신탁상품 특성상 적극재산과 증여재산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조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유언대용신탁이 유류분 대상에서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해왔다.

이번 판결의 법리가 대법원에까지 가서 확정되면 상속 관행에 큰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누구나 유언대용신탁에 가입한 지 1년이 지나면 자신의 뜻대로 유산을 처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속재산을 특정인에게 몰아주거나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 전액 사회단체에 기부할 수도 있다.

1심 기준 유류분 반환소송은 2015년 907건에서 2019년 1511건으로 증가하며 4년 새 66%가량 늘어났다. 김 변호사는 “앞으로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하는 자산가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유류분 제도의 위헌 여부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관련 소송도 증가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유류분 제도

상속자들이 일정 비율의 유산을 받을 수 있도록 의무화한 제도. 유언만으로 상속이 이뤄지면 특정인에게 유산이 몰려 나머지 가족의 생계가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에서 1979년 도입됐다. 유류(遺留)는 후세에 물려준다는 뜻이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