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안에서 17일 80대 남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해 11월 김명수 대법원장의 자동차에 화염병이 날아든 지 두 달 만에 최고 재판소에서 벌어진 불상사다. 자살과 화염병 투척 사건 모두 재판 결과에 대한 불신이 배경이다. 법조계에서는 사법 신뢰가 크게 떨어져 비슷한 사건이 재발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실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불거진 2017년 이후 재판 결과에 대한 진정과 청원 건수가 급증하고 있다.

줄잇는 최고 재판소 ‘불상사’

서울 서초경찰서에 따르면 최모씨(81)가 이날 오전 7시15분쯤 대법원 청사 서관 비상계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최씨는 전날 오후 2시30분쯤 출입증을 받아 법원도서관 열람실을 이용했으나 업무시간이 끝나고도 청사를 나오지 않았다.

심각한 사법불신…재판 진정건수 '사상 최고'
최씨는 자신을 치매라고 진단한 의사를 상대로 2013년 1700여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 최씨는 간이정신상태검사(MMSE) 점수가 높게 나와 정상 수준인데도 의사가 치매라고 판정해 약값을 손해봤고 정신적 피해도 당했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치매는 MMSE뿐만 아니라 다른 증상을 종합해 판단하기 때문에 진료 과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최씨는 대법원에 재심까지 청구하며 4년간 소송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1월엔 민사소송에서 졌다는 이유로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민원인이 김 대법원장의 출근 차량에 화염병을 던지기도 했다. ‘화염병 테러’의 피의자는 이날 법정에서 “대법원에서 정당한 재판을 해 줄 것으로 믿고 상고했으나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며 “합법적 수단으로는 소송 행위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5월에는 KTX 해고 승무원들이 대법원 앞에서 항의 기자회견을 하다 대법정에 기습적으로 진입하기도 했다.

악다구니로 갈등 해결 우려

재판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고 호소하는 목소리는 최근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법원 재판 결과에 대한 진정과 청원 건수는 지난해(1~10월) 3875건으로 사상 최대치에 달했다. 지난해 전체는 4000건을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2016년에는 1476건이었으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불거진 2017년 3644건으로 폭증한 이후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법조계에서는 갈등을 법원 밖에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은 지난 11일 취임식에서 “재판에 승복하지 않고 사법제도를 불신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면 사회적 갈등을 폭력이나 악다구니 등으로 해결하려 들 것”이라며 “(법원은) 공동체 존립을 위협하는 문제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에 근무했던 한 변호사는 “사태가 이렇게까지 온 것에 대한 책임은 결국 법원에 있다”며 “국민이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재판 청탁 의혹’ 등을 보면서 법원 판결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자기만 바보라고 생각할 것 아니냐”고 꼬집기도 했다.

김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은 “대법원 자살 사건에 대해 사법부에 직접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며 “사법부가 오만한 법관을 징계하는 것부터 시작해 상고심 시스템을 개선하고, 독립적인 재판이 가능하도록 전폭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종서/이인혁/이수빈 기자 cosm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