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뭐냐 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고민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들어본 적 있는지? 장기하 밴드의 첫 앨범 ‘장기하와 얼굴들’에 실려 있는 ‘별일 없이 산다’라는 노래다. 아마 이 밴드의 노래 가운데 하나인 ‘싸구려 커피’라는 노래는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 마리쯤 쓱 지나가도.”

마치 이야기를 하듯 읊조리는 이 무심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눅눅한 비닐 장판’이나 ‘바퀴벌레’쯤은 별것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청춘의 가난은 견딜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어느 누가 빈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으랴. 돈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나고 자란 세대, 돈이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다른 어떤 세대보다 일찍 깨달아버린 세대에게, 그것은 때로 절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혹자는 말한다. 요즘 젊은 세대의 빈곤은 이전 세대에 비하면 배부른 소리라고.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굶주림의 공포를 온몸으로 체험하지도 않았고, 독재 체제에 맞서 싸우느라 자신의 사적 이해와 성공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분연히 일어설 필요도 없었다는 것. 어떻게 보면, 생존의 위협에 노출된 적도 없으며 대의명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본 적도 없는 그들이야말로,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유일한 ‘고민 없는 세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하의 ‘별일 없이 산다’를 들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는 자신들을 바라보는 질투와 의혹의 시선들을 향해 거침없이 내뱉는다. 그래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별다른 고민도 없고, 이렇다 할 고민도 없다. 그런데 그게 문제인가.

실은 그렇게 묻고 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모르진 않는다. 별일 없이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 사회는 ‘별일 없이 사는 사람’을 먹여 살릴 만큼 여유롭지 않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는 ‘일하지 않는 자’에게 너그럽지 못하다. 장기하의 ‘별일 없이 산다’가 하나의 도전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별일 없이 살기’를 통해 ‘별일’을 강요하는 사회를 ‘깜짝 놀라게 하기’를 원한다. 이 사회의 구성원들을 눈살 찌푸리게 할지언정 ‘절대로 기쁘게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이 뒤틀린 불만 앞에서 정작 우리 사회는 할 말이 없다. 그들에게 ‘별일’을 만들어 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정규직’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19대 국회가 비정규직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것이 선거용 구색이라는 것을.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의 경우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비정규직보호법’ 때문에 비정규직이 진짜 2년짜리 시한부 일자리로 그치고 마는 아이러니를 경험한 우리다.

‘스승의 날’이라고 2년 근무한 뒤 ‘잘라버린’ 조교가 연구실로 인사를 왔다. 할 말이 없다.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니 별일 없단다. 큰 문제 없다는 투다. 또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는 선생을 그래도 선생이라고 찾아온 아이라면, 별별일 다 겪으며 이런 재미 저런 재미 맛보고 살아도 좋은 것 아닐까. 적어도 이 아이들을 ‘별일을 거부하는 세대’로 몰아붙여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할 말 없는 선생은 다만 노래 하나를 띄울 뿐이다. 그래도 화려한 이십대의 봄이 있다고.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이다.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오늘은 우리 같이 걸어요, 이 거리를/ 밤에 들려오는 자장노래 어떤 가요/ 몰랐던 그대와 단 둘이 손잡고/ 알 수 없는 이 떨림과 둘이 걸어요/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진 이 거리를/ 우우 둘이 걸어요.”

신수정 < 문학평론가, 명지대 교수 ssjjjs@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