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 오락채널 tvN의 '롤러코스터'(토요일 오후 11시) 중 '남녀탐구생활'코너의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다. 7월부터 시작된 이 코너는 남자와 여자의 행동 패턴 차이를 코믹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대역 남녀의 심리를 대변하는 성우 서혜정씨(47)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신드롬을 만들어내는 기폭제다. '이런 된장''우라질레이션' 등 변형 비속어뿐 아니라 '…해요'로 끝나는 말투가 유행하고 있다. 또한 10여개 방송광고뿐 아니라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콘서트 현장,각종 인터넷 UCC,모바일 음원에서 다수의 패러디물도 쏟아지고 있다. 최근 모회사 송년회에서는 이 프로의 오프닝 멘트인 '남자,여자 몰라요'를 패러디한 '고객,직원 몰라요''직원,고객몰라요'란 동영상도 등장했다. '롤러코스터' 시청률도 지상파로 치면 30%대에 비견되는 4.7%로 솟구쳤다. 서씨를 서울 남산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만났다.

"출연 제안을 받고 처음에는 망설였어요. 'X파일'의 스컬리 역으로 만들어진 지적인 이미지를 망가뜨릴까봐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수락하지 않았더라면 크게 후회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 외부에서 '성우 서혜정입니다'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이 웃거든요. 마치 코미디언이 된 듯 싶어요. 사람들과 거리감이 없어진 게 너무 좋아요. "

그녀가 수락한 결정적 계기는 "이순재 선생도 시트콤에 나온다"는 연출자 김성덕 PD의 멘트.김 PD는 시트콤 '세 남자 세 여자'등 히트작을 많이 낸 스타 PD다.

"특이한 제작 방식도 맘에 들었어요. 성우들은 촬영 화면을 보면서 적절한 감정을 실은 목소리로 녹음하는 게 일반적이죠.이 프로는 제 목소리를 먼저 녹음한 뒤 거기에 맞춰 대역배우들이 연기합니다. 제가 주연이고 배우들이 조연인 셈이죠."

그런데 목소리는 운율없이 일정한 톤으로 기계음처럼 내라는 주문이었다. 코믹한 화면 위에 무미건조한 내레이션을 곁들이면 그 언밸런스에서 웃음이 터질 것이란 계산이었다.

"운율을 배제하니 목이 금세 쉬더군요. 통상 A4용지 20장을 읽는 것은 일도 아닌데,10장만 읽어도 목이 쉬는 거예요. 빠른 속도로 호흡을 제대로 조절할 수 없으니까요. 이 코너의 8편까지는 톤이 불안정하다 9편쯤부터 자리를 잡았어요. "

비속어를 변형한 내레이션은 젊은이들간에 유행어로 떠올랐다. '우라질레이션''이런 된장 쌈장(초)고추장''시베리안허스키'('X팔'의 변형) '오 마이갓김치'(오 마이갓) 등 인터넷에서 아이들이 잘 쓰는 말을 살짝 비튼 게 주효했다.

서씨의 목소리는 광고계에서도 블루칩이다. '남양유업''BBQ 치킨' 등 10여개 기업의 광고에서 '남녀탐구생활'의 내레이션 톤을 그대로 도입했다. 그의 수입은 연 2억~3억원. 하지만 몇몇 광고는 서씨 목소리 출연료가 비쌀까봐 '짝퉁'을 쓰기도 한다.

"목소리 출연료는 비싸지 않아요. 15초 광고당 100만원에 불과해요. 목소리는 아무나 해도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죠.1990년대 중반께는 성우 목소리에 기업들이 관심을 보였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친 이후 목소리에 투자하는 기업들이 줄었어요. 그러나 서비스 안내 목소리는 기업 이미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요. 이 프로를 계기로 성우의 영역을 확장하고 싶습니다. "

1962년 파주에서 태어나 서울예대를 수료한 서씨는 1982년 KBS 공채 17기 성우로 입사해 'X파일'의 스컬리,'위기의 주부들'의 수전 등 외화 주인공으로 이름을 얻었다. 루브르박물관,베르사유궁전,대만박물관 등의 한국말 서비스의 주인공이기도 한 서씨는 현재 애니메이션 '겨울연가'의 배용준 모친 역과 다큐멘터리 '생로병사의 비밀'의 내레이터,TBN라디오의 '음악살롱' DJ로 활약 중이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