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26) 2006년 부동산 광풍
영동지구(강남) 개발 기공식에 참석해 착공 버튼을 누르는 정일권 국무총리(앞줄 왼쪽)와 양택식 서울시장.  /국가기록원 제공

영동지구(강남) 개발 기공식에 참석해 착공 버튼을 누르는 정일권 국무총리(앞줄 왼쪽)와 양택식 서울시장. /국가기록원 제공

“내집 마련이 쉬워지고 있습니다.”

국민의 80%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믿었던 1996년. 미디어에선 현재 관점에선 꽤 낯선 주택시장의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근로자 소득은 늘고 집값은 제자리걸음을 거듭해 ‘가계의 주택 구입 부담이 해마다 낮아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그해 전용면적 59㎡(옛 25평) 아파트 전국 평균 가격은 1억3000만원대였다. 도시 근로자 가구가 소득을 안 쓰고 5년 동안 모으면 살 수 있었다. 연 소득 대비 집값을 나타내는 PIR(가구소득 대비 주택가격 배율)은 1990년에 집계 이래 가장 높은 아홉 배(9년)에 달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짧아졌다.

청년과 신혼부부의 희망을 절망으로 바꾼 변화는 2001년 느닷없이 찾아왔다. 수많은 가계가 마치 약속한 것처럼 부동산시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격이 치솟으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빚을 내 따라 붙었다. 서울 아파트 값은 2006년까지 6년에 걸쳐 130%나 급등했다.

외환위기의 고통이 새로운 천년의 희망으로 옮겨가던 시기, 무엇이 가계를 이토록 절박하게 만들었던 걸까.

주거빈곤의 설움

‘판자촌 큰 불, 20여 명 소사(燒死).’

매서운 겨울 바람에 문풍지 우는 소리가 요란하던 1966년 1월 19일 새벽. 대규모 화재 소식을 알리는 호외가 서울 거리에 뿌려졌다. 밤사이 서울 남산동에서 치솟은 불길은 판자와 천막으로 지은 300여 채의 주택과 21명의 목숨을 집어삼켰다. 그중 19명은 부모가 날품을 팔러 나간 사이 잠들어 있던 어린이였다.

주택보급률이 사상 최저인 50%까지 떨어졌던 그해 서울은 불과 36만 채의 주택으로 72만 가구 380만 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많은 가구가 마당을 에워싼 한옥의 단칸방을 빌려 생활했다. 방 하나(17㎡)는 평균 세 명이 썼고, 부엌과 화장실을 공유했다. 방을 구하지 못한 가구는 ‘무허가 정착촌’에 모여 살았다. 1966년 처음 전수조사로 드러난 이런 불량주택은 14만 채로 전체의 3분의 1에 가까웠다. 겨울이면 난방을 위해 피운 불로 화재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정원 초과’ 서울은 혁신적인 주택 공급이 절실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2년 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를 발족하고 같은 해 도화동에서 낯선 주거 형태를 시험한다. 훗날 한국 주거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잡는 단지형 아파트 1호 ‘마포아파트’(1962년 입주) 건설이었다.

곧이어 서울 하늘 곳곳에서 우렁찬 해머 소리가 울려퍼졌다. 처참했던 주거빈곤으로부터 ‘위대한 탈출’의 시작을 알리는 포성이었다.
압축성장이 낳은 아파트 不敗신화…'시한폭탄' 가계빚 폭증 부르다

새로운 경험과 착시

아파트 공급 확대는 한국의 주거 환경을 빠르게 바꿔나갔다. 절대가격은 꾸준히 올랐지만, 소득 증가와 건축기술 발달로 실질 주거비 부담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재산 증식’이라는 짜릿한 경험도 선물했다. 아파트는 산업화의 자금 공급을 뒷받침하려는 정부의 인위적인 저금리 정책으로 저축보다 대체로 나은 성과를 냈다. 이런 성과는 종종 실제보다 과장되게 받아들여졌다. 한국 경제의 압축성장과 ‘이촌동 한강맨션’(1969년)에서 출발한 고급 아파트의 증가가 평균 가격을 무섭게 밀어올렸기 때문이다. 마포아파트 33㎡형(공급면적)의 1966년 시세는 90만원에 불과했다. 30년 뒤 재건축 1호로 다시 태어난 ‘마포삼성아파트’(1994년) 90㎡형은 1억9000만원으로 무려 200배 치솟았다. 같은 기간 ㎡당 가치 상승(130배)이 소득 증가(150배)에 미치지 못했지만, 밑지는 장사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집 없는 설움을 겪은 베이비붐 세대의 ‘집착’과 가격폭등의 ‘착시’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부동산에 대한 믿음을 낳았다. ‘인기 지역 아파트 값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나는 신념이었다. 이런 맹신은 1970년대 ‘불패(不敗) 신화’를 쓰는 새로운 지역의 등장으로 증폭 효과를 경험한다.

가자! 강남으로

“영동지역을 개발하겠습니다.”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 개통 무렵인 1970년 11월 4일. 양택식 서울시장은 서울 발전 사상 최대 토목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말죽거리 일대(양재)를 포함하는 영동 제1지구(반포·서초·잠원 등)와 2지구(압구정·대치·개포·도곡 등)를 한강 이남의 중심지로 바꾼다는 구상이었다.

논밭과 야산뿐인 벌판으로 인구를 끌고 들어올 뾰족한 수를 고민하던 정부는 명문고 이전을 함께 추진했다. 강북의 교통체증 해소를 명목으로 1976년 종로구 화동에 있던 경기고를 강남 삼성동으로 옮겼다. 뒤이어 휘문고·서울고·숙명여고·중동고가 신설 8학군 안으로 들어왔다.

‘맹모(孟母)의 땅’으로 변신한 강남 아파트 값은 1970년대 말 중동 건설 특수가 부른 호황과 더불어 극적인 상승기에 진입한다. 1980년대 ‘오일쇼크’ 여파로 잠시 주춤하더니 ‘3저(低) 호황’에 힘입어 다시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중대형 위주 압구정 현대아파트(1976년)는 1989년 3.3㎡당 1000만원을 돌파해 부동산 대장주 자리를 꿰찼다. 공룡 단지 ‘반포주공’(1972년)과 ‘잠실주공’(1978년)도 질세라 뒤를 쫓았다.

근로자 가구 소득 대비 서울 아파트 값 은 1990년 전후 20배를 뛰어넘었다.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집 없는 서민의 좌절과 분노가 들끓었다. 1988년 출범한 노태우 정부와 집권 민주정의당은 그해 총선(4·26)에서 헌정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위기에 몰렸다.
1991년 9월부터 입주가 시작된 분당신도시 전경.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991년 9월부터 입주가 시작된 분당신도시 전경.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신도시 개발과 집값 안정

‘분당·일산 등에 200만가구 공급.’

궁지에 몰린 노태우 정부는 1988년 투기 억제를 위한 ‘8·10 종합대책’을 내놓고 ‘물량 폭탄’을 앞세운 전면전을 선포했다.

정부의 강한 의지와 국민적 열망은 1988~1992년 분당·일산·산본·중동·평촌 등 신도시를 중심으로 무려 270만 가구의 주택 공급으로 이어졌다. 전국 기존 주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새 주택이 등장하는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물량 공세였다. 불로소득을 몰수하는 ‘토지공(公)개념 3법’(1989년)과 도시 빈곤층을 위한 영구임대주택(1989년)도 이때 탄생했다. 부동산시장은 이후 1990년대 말까지 전례없는 안정기에 들어갔다.

반전의 징후는 1997년 닥친 외환위기 충격 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집권 당해 서울 아파트 값이 15%나 미끄러지자 시장을 옭아맸던 각종 규제를 완화했다. 다른 한쪽에선 은행들이 기업의 빈자리를 대신할 가계 대출 확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대기업 줄도산과 제일은행·서울은행의 파산이 남긴 ‘트라우마’의 반작용이었다. 세간의 관심이 1990년대 말 수십 배씩 오른 인터넷 주식에 쏠려 있던 때, 극심한 공급 가뭄에 처한 부동산시장은 점차 화약고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2000년 ‘닷컴버블’이 붕괴했다.

대세 상승

“그렇게 단순할 수가 없었다!”

주식시장에서 천당과 지옥을 경험한 투자자들은 ‘부동산만 한 자산이 없다’고 굳게 믿기 시작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2000년대 초 미국의 주택 구매자를 대상으로 설문을 벌여 서로 다른 두 시장의 놀랍도록 단순한 연결고리를 밝혀냈다.

서울의 아파트 가격은 2001년 19.3% 뛰면서 대세 상승의 서막을 알렸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강북 ‘뉴타운’ 사업을 구체화한 2002년에는 30.8%나 상승했다. 한국은행은 닷컴버블 붕괴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준금리를 연달아 낮추며 기름을 퍼부었다.

빈 땅에 울타리만 쳐도 청약 수요가 몰리자 건설업계는 잔칫집으로 변했다. 건설사들은 2000년 ‘래미안’(삼성물산)을 시작으로 ‘자이’(LG건설) ‘푸르지오’(대우건설) 등 브랜드를 출시하면서 없던 가치까지 만들어 팔았다. 주가도 연일 치솟았다. LG건설(현 GS건설)은 2000년 3000원대에서 7년 뒤 19만원까지 상승했다.

1980년대 말 폭등을 기억하는 가계들은 일생일대의 빚을 내며 달리는 말에 올라탔다. 2003년 ‘도곡렉슬’ 청약에는 사상 최대인 9만7000여 명이 몰렸다. 1999년 미분양 망신을 샀던 주상복합 ‘타워팰리스’는 2006년 전용 244㎡가 53억원에 팔렸다. 근로자 가구 연 소득의 130배였다. ‘강남 3구(서초·강남·송파)’에서 출발한 광풍은 목동·분당·평촌·용인 등 이른바 ‘버블 세븐’으로 번져나갔다. 노무현 정부가 2005년 판교신도시 공급 카드를 내놨지만 시장은 이미 통제 불능 상태였다.

이성을 잃은 부동산시장의 불길은 주택시장을 거쳐 오피스빌딩시장으로 옮겨 붙었다. 곳곳에서 초고층 랜드마크빌딩 계획이 잇따랐다. 2008년까지 새로 등장한 100층 이상 마천루 건설 계획만 전국 10여 곳에 달했다. 세계에 존재하는 초고층빌딩을 능가하는 규모였다.

잔치의 부산물

‘용산 철거민 진압 참사 6명 사망.’

2008년 말 글로벌 금융위기가 확산하면서 대규모 개발사업이 줄줄이 좌초 위기에 빠졌던 2009년 1월 20일. 단군 이래 최대인 30조원 규모 개발사업을 추진하던 용산 역세권 인근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무모한 개발사업과 철거민의 충돌이 빚은 이 참사는 한반도를 휩쓴 부동산 광풍이 마침내 종지부에 다다랐음을 시사했다.

앞만 보고 달리던 건설사와 가계가 정신을 차리고 돌아봤을 때, 장부에는 광란의 파티가 남긴 산더미 같은 빚이 남아 있었다. 2013년까지 100대 건설사의 절반을 파산으로 내모는 100조원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그리고 훗날 한국 경제의 최대 시한폭탄으로 떠오른 700조원대 가계부채(가계신용)였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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