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규제, 거래절벽 등으로 입주 중인 서울 아파트에서 잔금 미납자가 늘어나고 있다. 잔금 미납자에게 계약 해지 계획을 통보한 강남구 래미안 루체하임.  /한경DB
대출 규제, 거래절벽 등으로 입주 중인 서울 아파트에서 잔금 미납자가 늘어나고 있다. 잔금 미납자에게 계약 해지 계획을 통보한 강남구 래미안 루체하임. /한경DB
지난 1월 새 아파트에 입주할 계획이던 정모씨(45)는 입주기간이 다 끝나감에도 입주하지 못하고 있다. 기존 집을 팔고 매각 대금으로 잔금을 납부하려 했지만 집을 사겠다는 매수자가 나서지 않고 있다. 정씨는 “시세보다 저렴하게 내놨지만 3개월 동안 집보러 온 사람이 거의 없었다”며 “새학기를 앞두고 아이들도 미리 전학했고, 이사 계획까지 다 세웠는데 대출은 막혀 있고, 연체이자도 부담스러워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하소연했다.

입주가 진행 중인 서울의 새 아파트 단지에서 잔금 미납자가 속출하고 있다. 대출 규제와 거래절벽의 부작용으로 제때 잔금을 마련하지 못한 수분양자가 증가하고 있어서다. 일부 단지는 잔금 미납자를 대상으로 계약 해지를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입주 보름 남은 헬리오시티18% 미납

작년 11월 입주를 시작해 올 1월 14일 입주기간이 종료된 서울 강남구 일원동 래미안 루체하임(일원현대 재건축)은 850가구 중 잔금을 미납한 8가구를 대상으로 계약 해지 추진 계획을 통보했다. 잔금을 미납한 수분양자의 주택 소유권을 조합이 환수하겠다는 것이다. 계약 해지는 입주기간 종료 후 3개월이 지난 4월 14일 이후 이뤄질 예정이다.

대출 막히고, 살던 집은 거래절벽…새 아파트 잔금 미납자 속출
총 9510가구의 초대형 단지인 헬리오시티(가락시영 재건축)도 4월 1일 입주기간 종료를 앞두고 잔금 미납률이 18.8%(지난 14일 기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임대가구를 제외한 일반분양 및 조합원분(8109가구) 중 1524가구가 잔금을 내지 못한 상황이다. 헬리오시티 조합은 입주기간 종료 후에도 상당수 가구가 잔금을 납입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난 1월 입주기간이 종료된 동작구 흑석동 아크로리버하임(흑석7구역 재개발)과 롯데캐슬 에듀포레(흑석8구역 재개발)도 각각 44가구, 12가구의 잔금 미납자가 남아 있다. 흑석8구역 조합은 입주기간을 1개월 연장해 지난달 28일까지 입주를 진행했지만 잔금 미납상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서대문구 대우파크푸르지오(연희1구역 재건축)와 홍제 센트럴아이파크도 지난달 입주기간이 종료됐지만 잔금 미납자가 수십 가구 남아 있다.

담보대출 규제에 타격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새 아파트로 갈아타기를 하려는 1주택자의 대출이 막히고, 거래 순환이 안 되면서 잔금 미납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9·13 부동산대책’ 이후 투기과열지구인 서울에서는 담보인정비율(LTV)은 60%로 줄고, 2주택 이상 다주택자는 주택담보대출이 가구당 1건으로 제한됐다. 유주택자가 주택담보대출을 새로 받아 잔금을 내기 위해서는 기존 주택을 처분해 대출을 상환해야 한다.

하지만 거래절벽 속 기존 주택 처분이 쉽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주택담보대출을 받는 것도 막히다 보니 잔금 마련이 어려워졌다. 잔금 마련을 못한 계약자들은 급하게 아파트를 처분하거나 전세를 싸게 내놓으며 유동성 확보에 나섰지만 매수 희망자나 세입자가 쉽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고준석 동국대 겸임교수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세·매매 거래가 막혀 순환이 안 되다 보니 생긴 문제”라며 “지난해 9·13 부동산대책 이후 담보대출 규제가 꽉 막히면서 의도치 않은 피해자가 생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분양 잔금이 연체되면서 조합 운영에도 부담이 가고 있다. 입주와 동시에 잔금으로 공사대금, 은행 중도금대출 원리금, 각종 비용 등을 지급해야 하는데 잔금이 막혀 자금 운용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잔금 미납자는 입주기간 종료일 이후 중도금 대출 및 미납 잔금에 대한 연체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시중은행 이자율보다 높은 6%대의 연체이자율이 적용된다.

지방 ‘미입주대란’ 심각

새 아파트 미입주 문제는 이미 지방에선 심각한 상태다. 주택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1월 입주 기간이 만료된 전국 아파트 단지의 입주율은 72.1%다. 주택산업연구원이 관련 집계를 시작한 2017년 7월 이후 최저 수준이다. 1월 대형 단지 입주가 적었던 서울은 86.7%로 양호한 수준이었지만, 인천·경기 등 수도권부터 대전·광주·대구·부산 등 광역시까지 모두 큰 폭으로 입주율이 하락했다. 특히 강원도가 72%에서 61%로 광주·전라가 77%에서 69.5%로 급락했다.

수분양자의 가장 큰 미입주 사유는 기존 주택의 매각 지연(37%)이 꼽혔다. 이어 세입자 미확보(24.7%), 잔금대출 미확보(23.3%), 분양권 매도 지연(6.8%) 등 순으로 나타났다. 분양 사업주체 측은 입주지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홍보 마케팅을 강화하고 대출을 지원하거나 이사비 등 현금 지원, 현물 지원 등을 시행 중이다.

양지영 양지영R&C연구소장은 “입주자를 위한 유동성 확보는 사업주체 측에도 부담이 큰 대책”이라며 “미입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시적인 대출 완화, 집주인 역전세난 대출 등 대출 규제 완화가 필요하지만 현 정부가 관련 대책을 시행할 가능성은 낮다”고 설명했다.

윤아영 기자 youngmon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