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스기 겐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김용길 외교부 동북아국장과 강제징용 배상 문제 등 양국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14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가나스기 겐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김용길 외교부 동북아국장과 강제징용 배상 문제 등 양국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14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가나스기 겐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은 우리 정부엔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한 한·일 협상을 담당하고 있는 데다 일본의 대북 정책도 그의 손에서 나온다.

가나스기 국장의 또 다른 직책은 북핵수석대표다. 이런 그가 14일 외교부를 찾았다. 일본이 2008년 이후 처음으로 유엔인권이사회의 북한인권결의안 발의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온 지 하루 만의 방한이어서 의도와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외교부가 밝힌 가나스기 국장의 방한 목적은 징용자 배상 문제와 관련한 ‘외교적 협의’ 요구다. 일본은 지난해 10월 30일 우리 사법부의 신닛테쓰스미킨(新日鐵住金) 자산 압류 결정에 대응해 올 1월 9일 정부 차원의 양자 협의를 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한·일 청구권협정에 규정된 분쟁 해결 절차를 지키라는 얘기였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 외무상이 참석하기로 한 1월 23일 다보스포럼이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양국 군사당국 간 ‘초계기 갈등’이 불거지면서 외교적 협의는 결국 불발됐다.

이날 가나스기 국장과 면담한 김용길 외교부 동북아국장은 “외교당국 간 나올 수 있는 솔직한 얘기는 다 한 것 같다”며 “강제징용 문제로 더 이상 한·일 관계가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하자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고 말했다. 이번 국장급 협의에 앞서 일본 정부는 ‘경제 보복’을 언급하기도 했다. 지난 12일 교도통신 보도에 따르면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은 “관세에 한정하지 않고 송금 정지, 비자 발급 정지라든지 여러 보복 조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일본의 경제 보복이 실제 현실화되기는 어려운 데다 최근 동북아 정세를 감안하면 협상용 ‘밑밥’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이날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240억달러에 달한다”며 “징용 판결에 분노하지만 비즈니스에 미치는 영향은 피하고 싶다는 게 일본 기업들의 본심”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이 또 다른 협상용 카드로 북핵 문제를 활용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가나스기 국장은 15일 우리 측 북핵수석대표인 이도훈 한반도본부장을 만날 예정이다. 가나스기 국장은 외교부가 2차 미·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극비리에 준비한 1월의 스톡홀름 남·북·미 실무협상 때도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의 면담을 명분으로 급파된 바 있다. 당시 외교가에선 한국이 중재하는 미·북의 ‘스몰딜’을 막기 위해 일본이 막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설(說)들이 파다했다.

‘패싱’을 우려하던 일본은 ‘2·28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과의 대화 채널을 만드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한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일본 언론들은 하노이 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일본인 납치 문제를 거론했고,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고 보도했다. 북한인권결의안 발의에 불참한 건 북·일 정상회담이 임박했다는 신호로도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일본이 새로운 북핵 협상 틀을 만들어 주도권을 쥐려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미·북이 ‘완전한 비핵화’와 ‘단계적 비핵화’로 확연히 갈려 있는 상황에서 다자회담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도 지난 12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중국이나 일본 쪽에서 (교착 상태를 풀기 위한) 실마리가 나올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주말 중국을 방문한 데 이어 이 본부장이 오는 18일 러시아로 출국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박동휘/김채연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