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취임 100일 기념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넘지 말아야 하는 이른바 ‘레드라인(금지선)’의 구체적 기준을 처음 제시했다. 미국이 레드라인의 정의를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레드라인을 언급한 것에 대해 외교가에선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외교·안보 라인 내에서 사전에 충분히 조율되지 않은 가운데 문 대통령의 레드라인 발언이 나오자 관련 부처들은 ‘멘붕’에 빠졌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이 ‘대통령이 생각하는 레드라인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완성하고 거기에 핵탄두를 탑재해 무기화하게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점점 레드라인의 임계치에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이 같은 발언은 북핵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걸 강조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하지만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결과적으로 문 대통령이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힐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일단 레드라인을 공개하면 우리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 범위가 줄어들 수 있어서다. 이런 이유로 지난달 4일 북한이 ICBM급 미사일인 ‘화성-14’를 처음 시험 발사했을 때 우리 정부는 레드라인의 구체적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당시 이덕행 통일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레드라인으로 정해놓은 게 있는가’라는 질문에 “원래 레드라인은 공개하면 레드라인이 아니지 않냐”며 “특별한 레드라인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답했다. 이 대변인은 지난달 18일 청와대 국가안보실 산하 통일정책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지난달 31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우리 정부의 레드라인 설정에 대해 “(우리가) 레드라인 기준을 설정한 것은 아니고, 외교적 수사로서 미국 대통령이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레드라인이 공개되면서 우리의 선택지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 그간 레드라인을 언급하지 않았던 미국과의 불협화음도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의 레드라인 언급 후 외교·안보 관련 정부부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부 당국자는 “레드라인이란 건 외교적으로 명시하지 않는 게 원칙인데 대통령이 저렇게 구체적으로 얘기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미국은 레드라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있어 솔직히 앞으로 걱정되는 건 사실”이라고 우려했다. 또 다른 당국자는 “레드라인 발언이 알려진 뒤 북핵 관련 담당자들끼리 긴급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며 “청와대와 사전에 조율된 내용이 아니어서 현재로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야권도 문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김유정 국민의당 대변인은 논평에서 “레드라인과 같은 민감한 문제는 외교적 레토릭으로 접근하는 게 상식”이라며 “문 대통령이 기준선을 단정해서 결국 외교적 미숙함만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북한이 ICBM에 핵탄두를 장착하는 것까지 우리가 지켜보고 있어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바른정당 소속 김영우 국회 국방위원장은 “북한에 ICBM 핵무기를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잘못된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인설/이미아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