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 칼럼] 타는 목마름으로 저항에 저항할 책무
혁명은 ‘반항’이자 ‘부정’이다. 잔혹했던 문화대혁명의 구호는 조반유리(造反有理)였다. ‘모든 반항은 옳다’는 뜻이다. 마르크스 역시 “존재하는 모든 질서를 부정하라”고 했다. 반항과 부정이 선이기에 자식이 부모를, 제자가 스승을 고발하고 단죄하는 패륜이 쏟아졌다.

문재인 정부 5년도 혁명 시기에나 볼 법한 부정과 반항으로 점철됐다. ‘촛불’이라는 의사(疑似)혁명에 무임승차한 정권의 예정된 궤도 이탈이었다. 수백년 축적의 산물인 선험적 지식과 가치를 앞장서서 뒤집은 이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임기 초부터 “일자리는 민간과 시장이 만드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라”는 신박한 이론을 제창했다. 그러고는 ‘공공 알바’에 재정을 퍼붓는 유치한 정책으로 5년 내내 고용통계를 분식했다. 오랜 국가채무 비율 마지노선 40%도 “설정 근거가 뭐냐”며 ‘홍백기’를 쏘아보는 것으로 단박에 무너뜨렸다.

문명국 최후의 보루인 사법 시스템마저 부정됐다. 대법원이 만장일치로 유죄 판결한 ‘한명숙 사건’을 법무부 장관이 나서서 흔들었다. 조국 일가의 파렴치한 사모펀드·사학 범죄와 기상천외의 입시비리 판결에는 판사탄핵 운동까지 벌였다. ‘표창장 한 장에 온가족을 도륙하느냐’는 물타기는 지금도 끝이 없다.

전복적 사고는 외교·안보도 망가뜨렸다. 문 전 대통령은 혼밥을 먹어가며 “중국몽이 전 인류가 함께 꾸는 꿈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폭압적인 중국 공산당의 세계 제패 야망을 응원한 한국에 돌아온 것은 자유진영의 왕따였다. ‘북은 핵 폐기를 원하고 있고, 북핵은 한국을 겨냥한 게 아니다’는 뇌피셜도 득세했다. 결과적으로 문 정부는 북한 ‘핵무기 세트’ 완성의 특급 도우미가 됐다.

파괴 의지로 똘똘 뭉친 선동가들의 준동을 막지 못해 주저앉은 한때의 선진국이 부지기수다. 대충 꼽아도 그리스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필리핀 등 전 대륙에 걸쳐 있다. 다행히 한국은 지난 대선에서 ‘질서 파괴자’들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겼다. 위선과 선동을 제어해낼 수 있는 헤게모니가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을 재확인시켰다.

하지만 의사혁명 세력은 자제는커녕 저항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범죄 ‘셀프 면죄부’나 다름없는 ‘검수완박’ 폭주는 제왕적 입법을 경고한 대선 민의에 대한 명백한 불복이다. 대선에서 패한 이재명 전 경기지사도 ‘지금 많은 국민은 TV조차 못 켜고 있다’며 새 집권세력을 상종 못할 적으로 의제했다. 배제와 파괴의 정서가 흥건한 살벌한 정치관이다.

거대 야당은 대통령 취임사에 통합과 소통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며 맹비난 중이다. 머릿수를 앞세워 민의를 짓밟더니 이제서야 통합을 말하는 건 자가당착이자 후안무치다. ‘통합’ ‘공존’ ‘모두의 대통령’을 강조한 문 전 대통령이야말로 갈라치기 정치의 화신이었다.

‘통합 메시지’ 누락이 억지 주장으로 굴복을 강요하는 후진정치와의 단절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면 외려 환영할 일이다. 통합은 아무하고나 하는 것이 아니다. 기적과도 같은 성공 스토리를 써온 역사의 주류들이 대상이어야 한다. 그래야 야당도 기회주의 세력과 결별하고 ‘정통 민주당’으로 복귀할 수 있다.

한줌의 대깨문과 개딸 그룹이 지난 5년간 진보를 참칭했다. 이들은 이권과 인기만 좇는 껍데기 진보라는 증거가 차고 넘친다. 강정마을 주민회장까지 살뜰히 챙긴 문 전 대통령과 SNS 중독이라는 이재명 전 지사가 김지하 시인의 영전에 침묵한 것도 분명한 증좌다.

윤석열 대통령은 시인의 양심적 삶의 태도와 남다른 용기에 뭉클한 헌사를 바쳤다. 타는 목마름으로 시인이 갈구한 민주·생명의 바다로 나아갈 책무와 권한도 윤 대통령의 몫이다. 관건은 실력과 무력의 확보다. ‘새 문화를 창조하려는 자, 반드시 무력을 준비해야 한다’(공자)고 했다. 저항에 저항할 수 있는 내공, 엄정한 법 집행이라는 제도의 힘을 갖출 때 ‘다시 대한민국’의 꿈도 가능해진다. 파괴냐, 번영이냐를 ‘선택할 자유’가 우리 앞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