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주(春晝)
한용운

따슨 빛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볍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린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요.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시인⸱승려·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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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스리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만해 한용운은 꽃과 글자로 그 비밀을 이야기합니다. 따뜻한 봄날의 여운을 만끽하며 책을 읽는 중에 꽃잎이 날아와 글자를 가리지만 굳이 꽃잎을 치우지 않는 마음! 그 여백과 직관의 순간에 유마경의 깨달음이 완성되지요.

이병철 회장이 ‘나무 닭’을 늘 곁에 둔 까닭

이 시가 말하는 것처럼 진리는 간명합니다. 여백의 사고와 직관의 힘은 그것을 부릴 줄 아는 사람에게 더 큰 선물을 가져다줍니다. 창의적인 사고도 여백의 지혜에서 나오지요. 부드러운 카리스마 또한 그렇습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응접실에 목계(木鷄·나무로 깎아 만든 닭) 그림을 걸어 놓고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목계는 『장자』의 ‘달생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유명하지요.

투계(鬪鷄⸱닭싸움)를 좋아하는 왕이 어느 날 기성자라는 조련사에게 최고의 싸움닭을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열흘 후 왕이 물었지요. “닭이 이제 싸울 수 있겠는가?”
기성자가 아뢰었습니다. “아직 안됩니다. 강하긴 하지만 교만합니다. 허세를 부리면서 제힘만 믿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서 물었습니다. “안됩니다. 교만함은 줄었지만 너무 조급해서 진중함이 없습니다. 다른 닭을 보거나 울음소리만 들어도 당장 덤벼들 것처럼 합니다.”

열흘이 지나 재차 물었습니다. “아직도 안됩니다.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이어서 최고의 투계는 아닙니다.”

또 열흘이 지나 40일째 되는 날 왕이 묻자 기성자는 “이제 된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다른 닭이 소리를 질러대고 도전해도 움직이지 않아 마치 나무로 만든 닭 같습니다. 싸움닭으로서의 덕이 갖추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어떤 닭도 감히 덤비지 못하고 도망칠 것입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경지에 이른 사람은 자신의 힘을 뽐내지 않습니다. 아무리 약한 적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지요. 스스로 여백의 힘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싸움을 걸어와도 목계처럼 초연한 마음으로 평정심을 유지합니다.

이병철 회장은 아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한 1979년, 아들을 집무실로 불러 목계 그림을 선물했습니다. 목계처럼 흔들림 없는 평정심을 지녀야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지요.

그러면서 붓으로 ‘경청(傾聽)’이라는 휘호를 써주었습니다. 언제나 상대의 말을 깊이있게 잘 들으라는 뜻이지요. 이건희 회장은 말이 어눌했습니다. 경영자로서는 단점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는 부친이 물려준 ‘목계의 가르침’ 덕분에 단점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말이 느리다고 생각의 속도까지 느린 건 아닙니다. 오히려 말이 많은 사람보다 유리합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도 유리하지요. 아랫사람을 대할 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속에서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완성됩니다.

이병철과 이건희 부자는 목계처럼 자신의 마음과 조직을 다스린 덕분에 삼성을 세계 일류 기업으로 키웠습니다. 한용운의 시처럼 글자에 함몰되지 않고 그 이면에 담긴 세상의 근본 이치를 꿰뚫은 덕이지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텍스트나 데이터에 휘둘리기 쉬운 요즘, ‘목계 정신’으로 내면의 힘을 기르는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