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기회가 평등한 나라?
2차 대전 배경의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에는 소련 저격수와 그를 전쟁영웅으로 키운 엘리트 정훈장교가 등장한다. 둘 다 미녀 저격수를 사랑하나 그를 공평하게 나눌 수는 없다. 목동 출신인 저격수가 그의 사랑을 차지하자, 철저한 사회주의자인 장교는 소련 체제에서도 재물뿐 아니라 사랑마저 평등이 이뤄질 수 없다는 점을 절감하며 죽음의 길을 택한다. 평등은 달성돼야 할 가치인지, 달성될 수 있는지 등의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하는 장면이다.

사람들은 능력, 용모 등에서 차이가 나고, 욕구도 다르다. 어떻게 대하는 것이 평등인지 따지기 어렵다. 한 면에서 평등은 다른 면에서 불평등이 될 수 있고, 한 집단에 평등한 기회는 다른 집단엔 기회 박탈이 되기도 한다. 평등은 자유, 공정성이라는 가치와 충돌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프랑스혁명 이래 평등은 문명사회의 중요한 가치가 돼왔다.

사회주의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한다. 결승점에 동시에 도달하게 하는 달리기 경주와 같다. 당연히 개인은 창의력을 발휘하고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를 갖지 못한다. 사회주의가 몰락한 근본적인 이유다. 그러다 보니 현대 문명국가에서 강조되는 것은 ‘기회의 평등’이다.

현 정부도 ‘기회가 평등한 사회’를 외친다. 그러나 기회는 정부가 평등하게 나눠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 선천적인 능력과 노력을 통해 갖춘 능력에 기반해 획득하는 것이다. 기회 평등을 내세운 정책은 대개 실제로는 결과의 평등을 강제하거나 경제활동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것들이다.

고교 정책을 보자. 평준화는 학업능력과 관계없이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게 한다. 기계적인 평등은 달성되지만 우수 학생이 합당한 수월성 교육을 받을 기회는 사라진다. 평등으로 포장된 획일화는 사교육시장 번창의 원인이기도 하다. 보완책으로 나온 것이 자사고와 특목고지만, 정부는 이를 모두 폐지하기로 했다.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에 5년간 1조원 넘는 세금이 들어간다고도 한다. 기계적 평등을 위해 실질적 기회 평등을 해치는 데 엄청난 세금을 쓰는 것은 전혀 합당하지 않다.

출신지, 가족관계 등 차별 요인의 지원서 기재를 금지해 ‘실력’만 보고 사람을 뽑게 한다는 블라인드 채용을 보자. 이 제도는 1000개가 넘는 공기업과 공공기관에 시행이 강제됐고 일부 대기업도 시행하게끔 행정지도가 되고 있다. 어느 기업인들 실력이 좋은 사람을 뽑고 싶지 않을까? 문제는 지원자의 실력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원자가 좋은 학력과 성적, 자격증 등을 갖추려 노력하는 것은 그로써 실력이 좋다는 신호(signal)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블라인드 채용은 학력 등 인적자본 양을 나타내는 지표도 볼 수 없게 한다. ‘어떤 지위에 오로지 합당한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기회의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정책은 평등원칙에 어긋난다.

비정규직 제로(0)라는 비현실적인 구호 아래 공기업과 공공기관 등에 정규직화를 강제한 정책은 또 어떤가. 이 정책은 신규 구직자에게 문을 닫고 기존 직원에게만 정규직이 될 기회를 줬다. 다수 기관에서는 기존 노조원들이 채용 기준이 느슨한 비정규직으로 친인척을 채용한 다음 정규직화하기도 했다. 노조 등 ‘우리 편’에게는 기회의 평등이지만 외부자에게는 명백한 기회의 박탈이다. 과정의 공정성도 침해됐다.

평등 지향 정책의 이런 문제들보다 더 큰 문제는 아마도 이들이 경제적 기회 자체를 사라지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결과의 평등과 지향이 비슷한 ‘사회적 격차 해소’ 기치하에 시행되는 대기업 규제,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주 52시간제의 강제 등은 경제활동의 자유, 경제적 기회를 심각하게 제약한다. 당연히 경제는 위축되고 수많은 일자리가 파괴됐다. 특히 취약계층의 경제적인 지위 향상 기회가 사라졌고, 소득 5분위 배율 등의 지표로 보는 소득 불평등은 오히려 커졌다. 밀턴 프리드먼의 ‘평등이 자유보다 우선인 사회는 평등과 자유 둘 다 못 얻는다. 자유가 평등보다 우선인 사회는 둘 다 얻는다’는 명언을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