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디플레보다 '저성장 고착화'에 유의해야
한국 경제의 디플레이션 가능성에 관한 소식들은 디플레이션과 더불어 장기 침체를 겪었던 일본 경제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며 공포감을 조성한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8월과 9월 전년 동기 대비 각각 -0.04%, -0.43%로 사상 처음 마이너스를 기록한 이후 10월 0%, 11월 0.2%로 여전히 0%대에 머물고 있다. GDP 디플레이터(물가수준을 보여주는 지표) 상승률은 작년 4분기 이후 지속적으로 전년 동기 대비 -0.1%, -0.5%, -0.7% 등 마이너스를 기록해 이미 디플레이션이 진행 중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GDP 디플레이터의 구성요소 중 수출만 마이너스 상승률을 보이고 있을 뿐 국내 지출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소비, 투자, 정부지출, 수입 등은 아직 플러스 상승률을 유지하고 있다. 소비자물가지수의 구성요소 중 교통, 통신, 교육 등 정부가 관리하거나 기술 발전과 관련된 부문이 주로 마이너스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

디플레이션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경기침체가 일어날 것인지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 기술 발전, 원자재가 하락 등 공급 측 요인이 개선되면서 디플레이션이 나타나면 경제가 안 좋아지는 사인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총수요가 하락하면서 디플레이션이 나타난다면 경기침체가 동반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경제는 공급 측 요인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나 점차 수요 부진 요인이 커지고 있고 향후 수요 부진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론적으로 디플레이션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여러 견해가 있다. 명목임금이 경직적이면 실질임금을 상승시켜 경제에 부담을 주고, 명목이자율이 변하지 않는 동안 실질이자율이 높아져 소비와 투자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부채의 실질가치를 증가시켜 총수요를 줄이고 파산 위험을 높이며, 이는 다시 디플레이션을 심화하는 등 ‘부채-디플레이션 악순환’에 관한 이론도 있다. 반대로 디플레이션은 실질임금과 실질자산가치를 증가시키고 수출재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이론도 있다.

최근 국제결제은행(BIS)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38개국에서 140년 동안 발생했던 디플레이션 사례 중 디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발견된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한다. 디플레이션이 경제에 큰 문제가 된다는 인식은 미국의 대공황과 1980년대 일본 사례가 사람들에게 각인됐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전반적인 물가 하락과 더불어 부동산, 주식 등 자산가격 하락이 발생하면 경기침체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고, 특히 민간 부채 수준이 높으면 자산 가격 하락의 악영향이 더욱 크다고 한다. 한국도 민간 부채 관리와 자산 가격 안정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직 기대 인플레이션율은 1% 후반대를 나타내고 있지만, 작년부터 지속적으로 떨어져 이제는 한국은행의 인플레이션율 목표치인 2% 아래로 내려갔다. 향후 더욱 하락할 것이 예상된다는 문제가 있다.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낮은 인플레이션율이 지속되면 한국은행은 인플레이션율을 목표치 수준에 맞추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인플레이션율 타기팅(물가안정목표제)하에서 인플레이션율을 안정화할 수 있는 주요 경로 중 하나는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율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투명하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민간 경제 주체의 기대인플레이션율을 안정화하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인플레이션율 목표치를 맞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기대인플레이션율이 낮아지고 불안정해짐에 따라 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율을 컨트롤하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

한국 경제에 심각한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지 않고,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더라도 일본 경제와 같은 장기 침체가 일어나진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심각한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대로 대비하기 위한 체계적이고 근거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 디플레이션 발생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 경제의 성장률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어 저성장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매우 큰 상황이다. 따라서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디플레이션의 발생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