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싱가포르와 밤새워 경쟁하는데…규제 없는 해외로 인력 옮길 것"
외국계 투자은행(IB)과 회계법인은 연장·휴일 근무가 일상화돼 있어 주 52시간 근로제의 영향이 큰 업종이다. 이들은 실무 인력을 해외로 옮기거나 재량근로제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법 위반을 피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양질의 인력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기업의 감사·자문 수수료가 치솟는 등 사회적 비용이 커지고 있다는 평가다.

외국계 IB들은 6년차 이하 실무 인력을 아시아태평양 본부가 있는 홍콩으로 내보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동안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 대상에서 제외돼 있었지만 내년부터 직원 수 50명이 넘으면 주 52시간 근로제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50명이 안 되는 중소형 IB도 2021년 7월부터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 대상에 포함된다.

외국계 IB들이 인력의 해외 파견을 택한 것은 정상적으로 법을 준수하기 어려운 업무 방식 때문이다. 외국계 IB의 과장(애널리스트)과 부장(어소시에이트) 등 입사 6년차 이하 ‘주니어’들은 기업 실사와 문서 작업을 담당하는 실무진이다. 인수합병(M&A)과 자금조달 등 고객 기업의 빡빡한 일정에 맞추기 위해 ‘눈의 실핏줄이 터질 때까지 일한다’는 시기다. 주 52시간만 일해서는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IB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한 외국계 IB 대표는 “비싼 현지 주거비와 한국 출장비 등 비용 부담이 만만찮지만 형사처벌을 받을 수는 없지 않으냐”고 했다. 또 다른 외국계 IB 대표는 “아시아 금융허브 경쟁국들이 초봉 1억원이 넘는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외국계 IB를 서로 유치하려고 경쟁하는 판국에 한국은 있는 일자리도 해외로 내몰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무소의 인력이 줄면 좋은 M&A 기회가 한국까지 오지 않는 ‘코리안 패싱’도 우려된다. 그만큼 ‘아시아 금융허브’의 꿈도 멀어질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회계법인들은 재량근로제와 탄력근로제를 도입하면서 외견상 ‘잡음’ 없이 주 52시간 근로제에 대응하고 있다. 삼일회계법인과 삼정KPMG는 출퇴근 시간에 제약 없이 근로자가 자율적으로 업무시간을 조정하는 재량근로제를 도입하기 위한 노사 합의를 마쳤다. 노사가 사전에 합의한 시간만큼 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대신 근로시간보다 더 일하면 초과수당 또는 의무휴가를 주기로 했다. 대형 회계법인 관계자는 “재량근로제를 도입하면 근무시간 초과에 따른 법 위반을 피할 수 있지만 근무 태만을 관리하기 어려워진다는 맹점도 있다”고 했다.

EY한영은 탄력근로제 시행 쪽으로 가닥을 잡고 사원대표 선출 작업을 하고 있다. 일이 많은 시기엔 초과근무를 하고, 일이 적은 시기엔 업무를 줄이는 방식으로 평균 근로시간을 주 52시간 이내로 맞추는 제도다.

회계법인에 주 52시간 근로제가 도입돼 기업이 지급해야 할 수수료가 높아지면서 감사 현장 곳곳에서 파열음이 일기도 한다. 회계법인에 노조가 설립되는 등 직원들의 목소리가 높아져 지난 2년 새 회계사 연봉이 전체적으로 20~30% 오른 게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회계법인 6년차의 경우 보너스를 합하면 평균 연봉이 1억원에 육박한다. 감사본부는 감사비용을 2~2.5배 높이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감사비용 상승에 따른 기업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수수료 상승이 제한적인 재무자문·컨설팅 분야는 파트너들의 연봉을 줄이고 있어 내부 갈등이 불거지는 사례가 나온다는 전언이다. 회계법인 관계자는 “인건비가 비용의 대부분인 회계법인은 주 52시간 도입으로 비용은 크게 늘고 효율성은 떨어지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며 “파트너와 일반 직원 간에 내부 갈등이 커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지훈/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