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언 땅에 씨 뿌리며
보리는 서리 내리는 상강(霜降)에 파종한다. 벌레들이 겨울잠을 준비하는 시기다. 동토(凍土)에 뿌리내린 보리는 겨우내 언 땅에서 제 몸을 데워 싹을 틔운다. 낮에는 찬바람을 맞고 밤에는 된서리를 견딘다. 입춘 즈음엔 보리밟기 의례를 치른다. 땅이 얼었다 풀리는 동안 느슨해진 흙과 뿌리가 이때 제자리를 잡는다.

보리 낱알은 이렇게 혹독한 과정을 거친 뒤 천천히 이삭을 밀어 올린다. 이삭이 다 익기를 기다리며 힘겹게 ‘보릿고개’를 넘는 사람들에게 햇보리는 ‘생명의 알곡’이자 ‘희망의 결실’이다. 혹한 속에서 봄을 잉태한 보리의 겨울나기는 그래서 더 신비하고 경이롭다. 인간사도 비슷하다. 별이 어둠에서 탄생하듯 희망은 절망 속에서 더 빛난다. 시련을 극복하지 않으면 풍성한 열매를 얻기 어렵다.

나라 안팎 사정이 좋지 않다. 경제 체질은 약해졌고 각종 지표는 내리막길이다. 소비심리까지 꽁꽁 얼어붙었다. 내년 경기 전망도 암울하다. 수출·내수·투자 등 밝은 분야가 별로 없다. 경제단체 수장들은 새해 우리 경제의 불확실성이 더 커질 것이라며 우울한 신년사를 내놨다. 글로벌 보호무역주의까지 확산되고 있다.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위해 풀어야 할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경제를 살리는 일은 농사짓는 것과 닮았다. 곡식을 잘 키우려면 흙·햇빛·물의 세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흙은 살아 있어야 한다. 흙 속의 많은 미생물 덕분에 토양이 풍부해진다. 당장 수확을 늘린답시고 농약과 제초제를 남발하면 미생물이 죽어 산성토양으로 변한다. 햇빛과 물은 광합성에 필수적이다. 거름도 제때 적당한 만큼 줘야 한다.

각각의 식물에 양분이 얼마나 더 필요한지 밤낮으로 살피지 않으면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예부터 ‘곡식은 주인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했다. 나라 살림을 꾸리는 사람은 농부와 같다. 경제가 살아날 토양을 잘 가꾸고, 적절한 양의 햇빛과 물을 조절하면서 부족한 쪽은 북을 돋워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서투른 농사꾼은 이런 이치를 돌아보지 않고 논밭타령이나 연장 탓만 하다가 결국은 작물을 망치고 만다.

빅토르 위고는 ‘씨 뿌리는 계절’이라는 시에서 해 질 녘 농부가 들판을 오가며 씨 뿌리는 모습을 “미래의 수확을 한줌 가득 뿌리며/ 별나라에 이르는 것처럼 장엄하다”고 묘사했다.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이 저물고 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봄은 가까워진다. 새봄엔 또 새로운 씨앗들이 싹을 틔울 것이다. 이를 위해 농부들은 언 땅을 갈 쟁기를 손질하고 보습 날을 다듬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세밑의 들판에 희망의 씨를 다시 뿌린다. 씨앗을 풍성하게 키워줄 땅에 허리를 굽히며 가장 순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미래를 파종한다. 무엇보다 ‘뿌린 것이 있어야 거둘 것이 있다’는 천고의 진리를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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