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인천항 모습. 수출을 위한 미곡이 쌓여 있다. /인천광역시 제공
1928년 인천항 모습. 수출을 위한 미곡이 쌓여 있다. /인천광역시 제공
“신랑이 쌀값을 귀신같이 맞힌다면서요?”

“그러니까 미두신(米豆神)이라잖아요!”

1921년 봄 남대문정차장(지금의 서울역). 인천발(發) 급행열차에서 쏟아져 나온 결혼식 하객들 웃음소리가 130㎡ 남짓한 역사를 가득 메웠다. 역전에는 신랑이 증기기관차와 함께 대절한 수십 대의 자동차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는 인구 30만 명 경성의 자동차를 모두 합쳐야 200대에 불과한 시절. 조선호텔(현 신세계조선호텔)에 들어서는 자동차의 긴 행렬에 행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선 최초의 선물(先物·futures) 거래소에서 떼돈을 번 21세 청년 반복창과 당시 조선 최고 미인으로 불린 김후동의 결혼식 날 풍경이었다.

가난 탓에 열두 살부터 일본인 심부름꾼으로 일한 반복창의 호화 예식은 일제강점기 인천 미두시장의 활황을 실감하게 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당시 미두시장은 현물 없이 쌀을 거래해 지금의 선물시장과 같은 개념이었다. 1896년 ‘인천미두취인소(거래소)’ 개설이 촉발한 미두시장의 융성은 팔도 상인과 노름꾼들을 빨아들이며 인천의 근대화 물결을 주도했다.

일제가 미곡의 품질과 가격을 표준화하겠다는 명목으로 개설한 인천미두취인소에서의 쌀 거래는 중일전쟁 때까지 40여 년 동안 성행하며 수많은 벼락부자들을 만들었다. 1930년대 말엔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인 오사카 도지마취인소 거래를 능가하는 투기 열풍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확천금의 행운으로 얻은 부를 끝까지 지켜낸 이는 드물었고, 미두신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원금의 10%로 거래

‘세 손가락을 펴서 손바닥을 밖으로 쳐들고 “고햐쿠(五百) 야로~” 소리를 친다. 이것은 8전(29원98전)에 500석을 팔겠다는 뜻인데, 그 소리가 떨어지자 장내는 더럭 흥분이 된다. … 여기저기서 ‘얏다(됐다)’, ‘돗다(잡았다)’ 소리와 동시에 팔이 쑥쑥 올라오고….’

1920년대 궁정(현 중구 신생동) 거리. 사진 정면의 서양식 카페 건물 금파(金波)는 미두시장을 찾는 투기꾼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인천광역시 제공
1920년대 궁정(현 중구 신생동) 거리. 사진 정면의 서양식 카페 건물 금파(金波)는 미두시장을 찾는 투기꾼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인천광역시 제공
일제시대 미두취인소 풍경을 생생하게 그린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의 한 장면이다. ‘딱딱이’를 내리쳐 거래 시작을 알리면 중매점의 ‘바다지(場立·대리인)’가 일본어로 물량을 외치고 손가락으로 호가를 제시했다. 체결 가격은 다카바(高場·서기)가 기록했다.

미두취인소는 본래 쌀 외에도 대두(콩) 등 여섯 가지 상품을 거래했으나 거래 실적은 거의 없었다. 쌀은 100석(石) 단위로 거래하고 1석(144㎏) 가격으로 호가를 냈다. 거래는 대부분 미래의 일정 시점에 특정 가격으로 사고팔기로 계약하는 선물 청산거래였다. 가진 돈의 10배까지도 매수가 가능해 투기꾼들이 몰렸다.

시장은 전장과 후장 두 번 열렸다. 지금의 선물회사 성격인 중매점에 일정 금액의 증거금을 예치하면 누구나 거래할 수 있었다. 당초 조선의 쌀시장을 장악하려는 일본 상인들 의도에서 출발한 취인소의 시세는 당시 오사카 취인소에서 날아오는 전보 시세에 따라 변동했다.

투기 열풍이 취인소를 뒤덮은 것은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으로 쌀값 변동성이 커지면서부터다. 인천시에 따르면 1910년 2000만 석대였던 쌀 거래량은 1918년에 3000만 석을 넘었고, 1919년 6000만 석을 돌파했다. 반복창이 한 해 30만원(현재 가치 30억원 추정)을 번 것으로 알려진 1920년엔 9000만 석을 웃돌았다. 조선을 대표하는 ‘쌀의 도시’로 성장한 1930년대 말엔 하루 100만 석을 거래하면서 ‘원조’ 도지마시장을 능가했다. 1916년까지 15원 안팎이던 석당 가격은 투기 바람이 일면서 1919년 월평균 35~48원으로 폭등했다.

◆잇따라 탄생한 ‘벼락부자’

쌀값이 하루에도 몇 원씩 오르내리자 인천항 일대는 전답을 판 돈을 당나귀에 싣고 온 투기꾼으로 넘쳐났다. ‘마바라(소액투자자)’를 유혹하는 ‘일확천금 비법서’가 불티나게 팔렸고 중매점들은 현대 ‘지라시’의 원조격인 정보지를 만들어 하루에도 수차례 천국과 지옥을 오간 취인소 투사(鬪士)들의 영웅담을 전했다.

인천미두취인소 거래 모습. /인천광역시 제공
인천미두취인소 거래 모습. /인천광역시 제공
인천의 ‘월스트리트’를 주름잡은 반복창과 미두 재벌들 소식은 일확천금의 꿈을 부추겼다. 백범 김구의 제자였던 강익하는 미두 거래로 큰돈을 벌어 해방 직후 최초의 민간보험사인 대한생명(한화생명)을 창업했다. 대한제국 말 갑부 조중정의 장남 조준호는 1934년 동아증권을 차리고 오사카 주식시장 시세를 빠르게 전달하며 사세를 불렸고, 광복 후엔 서울 충무로에 사보이호텔을 세웠다. 김귀현은 1936년 일본의 정세 급변을 예측해 대박을 터뜨렸다. 본래 군산 미두취인소에서 재산을 탕진했다가 수개월 만에 20만원을 번 그는 나중에 명치증권을 설립했다.

쌀 거래와 수출 시장이 나날이 번창하면서 부두 노동자들도 급증했다. 싸리재와 터진개(현 신포동) 주변엔 고급 요리집과 주점, 여관 등 유흥업종이 들어섰다. 인천 최초의 카페 ‘금파’가 문을 열었고 ‘화월관’이나 ‘용금루’ 같은 요정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인천항엔 쌀이 산처럼 쌓였고 정미산업도 크게 번성했다. 당시 상공회의소 기록에 따르면 1910년 6개였던 인천 정미소는 1932년 32개로 늘어났다. 인구도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취인소 개장 당시 조선인과 일본인은 각각 7000명, 4000명에 불과했으나 1910년엔 1만4000명과 1만3000명으로 불었고, 1930년대엔 모두 합쳐 10만 명을 넘어섰다.

◆‘악마의 굴’로 낙인 찍혀

‘피를 빨아먹는 악마 굴이요, 독소.’

1899년 인천미두취인소 전경.  /한국거래소 제공
1899년 인천미두취인소 전경. /한국거래소 제공
1924년 잡지 개벽은 ‘인천아 너는 어떤 도시?’라는 제목의 글로 금융 거래에 미숙한 조선인들을 파국으로 이끄는 미두취인소의 현실을 비판했다. 세간에선 “논밭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빼앗기고 얼빠진 부자들의 돈뭉치는 미두 바람에 몽땅 날린다”는 말이 떠돌았고, 일각에선 취인소를 ‘멸망동이 양성소’라고 비꼬았다. 조선인들이 15년간(1919~1934) 미두취인소에 바친 돈이 수억원(현재 가치 수조원)에 달한다는 추산도 있다.

재산을 탕진해 증거금마저 내지 못하는 미두 노름꾼은 집에 돌아갈 당나귀를 전당포에 맡기고 ‘합백(合百)’이란 노름판을 벌였다. ‘절치기꾼’ ‘하바꾼’으로 불리는 이들은 경찰 단속을 피해 취인소를 떠돌며 불법 내기 도박을 벌였다.

결혼식 당일에만 3만원을 쓴 조선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 반복창의 영화도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일본인 미두중매점에서 일하며 모은 400원의 밑천으로 1920년 한때 재산을 40만원으로 불렸지만, 그 후 손실로 전 재산을 날렸다. 아내마저 세 아이를 남기고 떠난 뒤 그는 합백에서 한 판에 몇 전을 거는 ‘절치기꾼’으로 전락했다. 서른에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됐고 정신마저 이상해졌다. 이후 20년 가까이 미두시장을 떠돌던 미두신은 1939년 불혹의 나이에 송림리(송림동) 곁방에서 초라하게 생을 마감했다.

인천미두취인소는 반복창의 비참한 최후가 알려진 당해 문을 닫아 다시는 열지 못했다. 중일전쟁 3년째에 접어든 1939년 일제가 전시 자원 동원을 위해 쌀 가격을 직접 통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핵심 산업이었던 미곡산업의 타격도 엄청났다. 1936년 마산에서 정미소를 차렸던 당시 26세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와 2년 뒤인 1938년 23세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쌀 가게를 열었던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도 이 여파로 사업을 접어야 했다.

◆50년 후 다시 열린 선물시장

해방 후 한국의 쌀 가격은 정부 통제와 시장원리를 혼합한 방식으로 결정했다. 1960년대 양곡거래소의 필요성이 대두되기도 했지만 미두취인소의 악몽이 매번 발목을 잡았다.

한국에 선물시장이 다시 열린 것은 반세기가 지난 1996년이었다. 코스피200 주가지수를 거래 대상으로 하는 코스피200선물이 상장됐다. 새 선물 시장은 ‘압구정 미꾸라지(윤강로 씨)’ ‘목포 세발낙지(장기철 씨)’ 등 새로운 고수들의 성공담으로 다시 일확천금의 꿈에 불을 붙였다. 빚을 내 선물시장에 뛰어드는 투자자들이 몰리면서 2002년과 2003년엔 한국의 선물·옵션 거래량이 세계 1위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

선물시장 열풍은 그러나 개인투자자들의 진입을 억제하는 금융감독당국의 규제 강화와 부정적 인식의 확산으로 침체 국면에 들어갔다. 옵션만기일 주가지수가 급락한 2010년 ‘도이치 옵션 쇼크’와 전용회선을 활용한 스캘퍼(초단타 투자자) 농간에 놀아났던 2011년 ‘주식워런트증권(ELW) 사태’도 침체의 골을 더욱 깊어지게 했다. 한국 파생상품시장 규모는 최근 수년간 주식시장과 비슷한 세계 10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ng.com